혁이의 민첩한 하루

학교가 좋다

by 게으른 산책가

“혁이야, 아침 먹어라.”

“네, 지금 가요.”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랑 같이 잔다. 동생은 건넌방에서 부모님이랑 잠을 잔다.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첫 번째 알람이다. 그러면 할머니는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내 엉덩이를 토닥인다. 이게 두 번째 알람이다. 그래도 나는 끝까지 버텨본다. 나를 못 버티게 만드는 건, 세상에서 제일 요란한 알람 소리 때문이다.

“으아아아앙, 유치원 안 갈 거라고. 싫어 싫어!”


나는 유치원을 다녀본 적이 없다. 하지만 여덟 살은 학교를 가야만 한다고 했다.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만 지키면 되었는데, 이제 꼬박꼬박 해야 할 게 많아졌다. 밤새 씻어둔 물병을 챙겨야 했고, 엄마의 이름을 적은 종이를 꼭 가져가야 했다. 선생님은 꼭 다섯 번씩 같은 말을 했다.

“엄마에게 꼭 이거 보여드리고, 사인받아와야 해요! 알았죠?”

알았다고 대답하지 않고, 눈만 껌뻑여서 일까. 어제도 속으로 세어 보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그러면 드디어 태양이와 레고를 가지고 놀 수 있다. 오후가 되면 돌봄 선생님이 오신다. 요즘 들어서 우리 할아버지 목소리와 비슷하게 변했다. 마치 옷을 갈아입은 것처럼 목소리도 바꿔서 출근한 것만 같다.

“얘들아, 내가 감기에 걸려서 목소리가 좀 이상하지? 너희도 감기 조심해.”

선생님은 우리가 다른 생각을 하기 전에 냉큼 알려준다. 물어보지 않은 것도 먼저 알려줘서, 재밌는 상상을 할 수가 없다. 나도 할아버지 목소리랑 내 목소리를 바꿔서 하루만 다니면 어떨까, 상상하던 중이었는데.

“선생님, 감기 걸리면 목소리가 그렇게 변해요?”

내가 말을 하면 선생님은 언제나 웃는다. 그리고 나랑 눈을 마주치며 원래 선생님이 말하는 속도보다 느리게 대답한다. 아마도 내가 말하는 속도인지도 모르겠다.

“으응, 요즈음 날씨가아 변덕이 심해서어 목감기가아 많이 거얼린데. 우리 혁이도 조심해야 해!”

가족과 말할 때는 나도 선생님처럼 빨리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왜 학교에 오면 말이 느려지는지 모르겠다. 내가 사는 세상이 우리 동네에서 학교까지 커졌는데, 휴대폰이 산에서 잘 터지지 않는 것처럼 학교에서의 내 모습은 내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나름 빨라진 게 있다. 친구가 레고로 마을을 꾸미는데, 거실을 만들고 있었다. 나도 센스라는 게 있는 사람이다.

“자, 이것은 밟으면 갇히는 덫이야.”

“야 됐어엉. 난 그런 거 필요 없다고!”

옆 친구는 클레이로 사슴을 만들고 있다. 뿔 하나를 완성하는데 저렇게 오래 걸리다니. 나는 큼직하게 만들어서는 친구에게 묻지고 않고 직접 사슴에게 붙여줬다. 어떤 동물을 만나도 용감하게 싸울 수 있는 사슴이 되었다.

“야, 이게 뭐야. 사슴뿔이 짝짝이잖아?”

‘짝짝이가 뭐지?’

“얘들아, 혁이가 친구들을 도와주고 싶은가 보다. 이제 정리하고 밖으로 나가자. 벌써 세 시야.”

세 시라는 말을 엄청 좋아한다. 세 시가 되면 가방을 들고 운동장으로 나간다. 축구만 재밌는지 알았는데, 모래놀이도 재밌다. 그네를 타던 채연이가 나를 부른다.

“혁이야, 이리 와. 그네 타자.”

그네를 타면 발은 공중으로 뜨게 된다. 그런 무시무시한 그네를 채연이는 배로도 타고 배배 꼬아서도 탄다.

“난 무서워.”

우리를 지켜보던 돌봄 선생님이 다가왔다.

“혁이야, 우선 앉아봐. 내가 뒤에서 봐줄게. 줄을 잡아보자.”

줄을 껴안듯, 손이 안으로 말려들었다. 어깨가 오므라들었다.

“혁이야, 손을 바깥쪽으로 잡고, 어깨 힘을 빼볼까? 자 선생님이 손을 놓지 않고 밀어줄게.”

세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단단한 은행나무 기둥만 보다가 새 둥지가 있는 가지까지 보이다가 이내 나무 기둥이 보였다. 세상이 움직인다.

“혁이야, 어때?”

“선생님, 엄청 신나요.”

신나는 건 나인데, 선생님은 할아버지 목소리로 까르르 웃는다. 나도 그네를 배배 꼬며 탈 날이 올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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