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이의 혁혁(赫赫)한 하루

위대한 처음

by 게으른 산책가

나는 여덟 살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새벽이면 내 볼에 뽀뽀를 해준다. 따가울 때도 있고, 거칠 때도 있지만, 목소리만은 부드럽다. 건넌방에는 엄마, 아빠와 잠을 자는 동생의 잠투정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드디어 오늘은 학교 가는 날이다. 두 살 어린 동생은 병설 유치원에 가기로 했다. 떼보 동생은 이제 누구에게 떼를 쓸지 궁금하다.

나와 동생은 유치원에 가본 적이 없다. 할머니가 밭에 갈 때면, 나도 자동차 장난감을 챙겨 들고 나선다. 할머니가 간식을 챙긴다면, 밭일이 빨리 끝나지 않는다는 정도는 눈치껏 알고 있다. 나는 얼른 돗자리를 챙겨서 리어카에 던졌다. 요즘 무당벌레가 나오고 있었다. 그 녀석들은 아직 날개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갓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손으로 집어서 돗자리에 두고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바람 없는 날의 구름처럼 시간은 조용히 흘러간다. 내 곁에서 꼼지락거리는 무당벌레를 보니 내가 싫지는 않나 보다. 그래서 무당벌레랑 친구 하기로 했다. 덩치가 작아서 대답도 작나 보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내 손으로 기어오르는 걸 보니 좋다는 뜻일 거다.

“혁아, 크림빵 먹자. 에구, 벌레랑 놀고 있었어, 내 새끼.”

“할머니, 일 다 했어?”

“워이. 이제 고랑만 파면된게로 벌레랑 조금만 놀고 있어.”

“벌레라고 하지 마. 나랑 친구 하기로 했어. 이름은 당이라고!”

“그려 그려, 당인가 뭐신가랑 놀고 있어. 할매도 얼른 할 텐게.”

아빠가 오토바이에 나를 태워서 학교에 왔다. 문이 여러 개 있는 이 건물이 학교란다. 아빠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손을 꼭 잡고 1학년 교실로 들어갔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깜빡이지도 않는 아이들이 보인다. 내 표정도 저럴까? 분명 내 친구들일 거다. 여덟 살이 되면, 표정만 봐도 마음을 알 수 있다. 엄마가 잡은 손을 놓으면 울 표정인 친구들을 보니, 난 용감해지고 싶었다. 아빠 손을 살짝 놓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눈썹 짙은 친구도 엄마 손을 슬쩍 놓았다. 음, 역시 사나이야. 난 저 애랑 친해질 거야.

선생님은 여러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교실 밖으로 나가려고 했을 때도 선생님이 내게 말을 한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았는데, 부드럽게 내 어깨를 잡고 눈을 마주쳐서 알았다. 내게 말하는 거였다. 그래서 난 선생님들이 말을 하고 있으면 우선 멈춘다. 가만히 서 있으면, 내가 듣고 있다는 신호인데, 역시 선생님도 눈치가 빨랐다.

“혁아, 여기 색연필 정리할까?”

‘어떻게 정리하는 거지? 대충 모아서 뭉쳐두면 되나?’

눈을 껌뻑거리며 고민하는 사이, 선생님은 다시 말했다.

“자, 색연필이 담아있던 곳에 바르게 넣고, 책상 안에 넣어서 정.리.할.까?”

아까보다 선생님은 길게 말했고, 천천히 말해줬다. 내가 눈을 껌뻑거릴 때마다, 선생님 말은 여름 볕에 늘어진 엿가락처럼 느리며 길어졌다.

내 짝꿍은 눈썹 짙은 그 아이가 됐다. 이름도 멋진 태양이다. 그래서 더욱, 내가 생각했던 사나이인 줄 알았는데, 잘못 생각했다. 선생님이 칠판에 뭔가를 적으며 공부하려던 순간에 태양이는 울기 시작했다.

“엄마아아아아.”

태양이가 엄마를 찾으니까 나도 엄마가 보고 싶었다. 다른 친구들 눈썹이 송충이처럼 꿈틀댔다. 선생님은 친구들을 살펴보다가 놀란 거 같다. 더 이상 선생님은 등을 보여주지 않았다.

“어, 그래. 우리 그러면 줄 서는 공부 해볼까? 다들 복도로 나가서 학교를 둘러보자.”

선생님은 이 말을 하고서 우리를 직접 데리고 나서서 줄을 세웠다. 선생님은 정말 바빠 보였다. 먼저 말을 하고서 몸으로 또 움직이는 선생님 얼굴을 보니 귀 옆으로 땀이 맺혔다. 할머니가 고랑을 팔 때도 저런 땀이 났는데, 어른들은 땀이 많구나.

점심을 먹고 나니, 다른 선생님이 나타났다. 밥을 안 먹었는지 바짝 마른 몸이었는데, 목소리는 컸다.

“애들아, 난 돌봄 선생님이야. 물 먹고 싶으면 말하고,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나 날 불러줘요.”

물이란 말을 들으니 오줌이 마려웠다. 화장실은 우리 집처럼 바로 옆에 있지 않은데, 큰일이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랬지.

“선생님, 쉬 마려워요.”

“응, 갔다 와.”

“네......”

이럴 수가. 선생님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갔다 오라고? 복도까지 아무렇지 않은 척 나섰다가 난 용기를 냈다. 용기는 꼭 혼자 해결하는 것만이 아니다.

“선생님, 화장실이 어디인지 잘 모르겠어요.”

“아, 그래? 같이 가자.”

선생님에게도 길게 말해줘야 알아들을 때가 있었다. 나와 다를 바가 없다. 묵직한 오줌을 빼고 나니 걸음이 가벼워졌다. 얼른 태양이랑 놀아야지. 그런데 자꾸만 선생님이 누군가에게 뭐라고 하고 있다. 누구에게 말하는 거지? 아무튼 난 얼른 태양이에게 가야겠다.

“복도에서는 뛰면 안 돼. 뛰면 안 된다니까? 멈추자!”

내일은 화장실쯤은 혼자 갈 수 있겠다. 낯선 게 겁나지만은 않다.


1학년 돌봄 교실을 처음 맡아봤습니다. 순수한 아이들을 보니, 자꾸만 어리숙했던 제가 떠올랐어요. 이제 일주일쯤 만난 아이중 한 명을 주인공으로 세워서 상상해 써본 글입니다. 1학기가 지나면 지금보다 동작도 민첩하고 분명 개구쟁이가 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을 누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