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수업에서 발표한 내용을 조금 다듬은 글입니다. 스포일러 주의.
여러분, 한 가지 가정을 해 봅시다. 여러분이 갑자기 기억상실증에 걸렸습니다. 당신과 가장 가까웠다고 주장하는 한 사람이 병실에 들어옵니다. 그 사람이 당신의 전공과 좋아했던 것을 말해줍니다. 뭘 거 같나요? 예술일 수도 있고, 프로그래밍일 수도 있겠죠. 여러분은 그게 한 번에 납득이 가실 것 같나요? 왜 그것을 사랑했나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여러분은 다시 그것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이 만화의 주인공은 야구를 했었다고 하네요. 병실에 들어온 친구는 아주 유명한 투수였고, 주인공은 이 친구의 공을 받아주던 포수였다고 합니다. 이 관계를 배터리라고 부른대요.
근데 어쩌라고요?
야구가 뭔지도 모르겠고, 어째선지 별로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어요. 야구를 좋아하고 잘했던 나를요. 원래 나는 머리 좋은 플레이로 유명해서 ‘지장’이라는 별명이 있었대요. 투수 친구는 나 아니면 공을 못 던진대요. 어떤 애들은 심지어 나 때문에 야구를 그만뒀대요. 대체 기억을 잃기 전의 나는 뭔 짓을 했길래 그랬을까요?
오늘 제가 다룰 만화는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야구의 즐거움을 잊어버린 주인공이 처음으로 돌아가 야구에 다시 빠지는 이야기. 일본 웹코믹, 우리 웹툰과는 달리 옆으로 넘기는, 일종의 e-book 형식인데요. 그 사이트인 소년점프+에서 현재 19권까지 연재된, 미카와 에코 작가의 망각 배터리입니다.
사람들은 왜 스포츠에 열광할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간단명료한 설명이 있어요.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보는 것이든 하는 것이든, 인간의 원초적인 경쟁심리를 자극해서 쾌감을 주고 어떨 때는 감동과 교훈까지 줍니다. 그런데 스포츠를 마냥 재미있게 즐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스포츠를 인생의 전부로 삼고자 하는 사람, 프로를 지망하는 학생 선수들이죠. 한국에서는 선수부가 일반 학생들과 완전히 분리되고요. 일본은 클럽 스포츠라고 해서 섞여서 경기하기는 하지만, 강호교, 혹은 프로선수를 지망하는 학생들의 일과는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학생 선수들의 치열함을 다룬 만화는 지금껏 많았습니다. 이들의 간절함은 어떨 때는 카타르시스를 위한 각성제가 되기도 하고, 로망을 위한 장치가 되기도 하고, 우정과 사랑과 성장의 매개체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던 와중 독특한 관점이 나타났습니다. 간절함이라는 감정 자체에 집중한 건데요. 저는 스포츠만화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망각 배터리는 제가 본 야구 만화 중에서 가장 감성적입니다. 어떤 장면에서는 거의 순정만화 보는 것 같은 느낌까지 들 정도로 감정선이 몽글몽글해요.
이 만화를 그린 미카와 에코 작가는 연재 전까지 야구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고 하는 여성 작가인데요. 그래서인지 이 만화는 열정과 경쟁이 지배하는 스포츠 세계의 논리 말고, 평범하고 일반적인 청춘의 관점에서 고교야구 선수들의 삶을 다룹니다.
‘야구’소년이 아닌 야구‘소년’, 학생 ‘선수’가 아닌 ‘학생’ 선수의 감정을 다룬 이야기. 그럼에도 야구가 빠지면 성립하지 않는 이야기. 이런 신선한 매력을 여러분께도 소개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감정에 집중했다는 특징이 있는 만큼 이 만화의 컷 배치는 등장인물 개개인이 보고 느끼는 것을 따라가는 구조입니다. 공간은 과장되어 있고, 시간 흐름은 주관적이고, 연출의 완급 조절도 굉장히 큰 폭으로 이루어집니다.
특히 페이지를 꽉 채우는 컷을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하는 것이 눈에 띄는데요. 이 컷은 타석에 있는 친구가, 원래는 타격을 하려 했다가, 다음 타순인 카나메를 믿고 볼넷으로 출루하는 장면입니다. 배트를 내려놓고 나가는 모습과 그걸 보는 주인공의 등이 함께 담겨 있죠.
조금 더 구체적인 예시를 볼까요? 여기 토도라는 캐릭터의 회상 장면을 살펴봅시다. 이 친구는 입스가 왔습니다. 입스는 말하자면 트라우마 같은 것입니다. 유격수인데, 중요한 경기에서 송구 실책을 했던 기억 때문에 1루로 공을 던지지 못하게 됐어요. 이게 처음 실책을 했을 때의 연출입니다. 보시다시피 이 공간 하나를 통째로 썼습니다. 머리가 새하얘진 것이죠. 이후에 이 친구가, 자기한테 입스가 왔다는 걸 깨닫습니다. 마찬가지로 텅 비었습니다.
이제 야구를 그만두고 방황을 합니다. 의미 없는 시간이 빠르고 조밀하게 흘러갑니다. 머리가 점점 복잡해지죠.
그러다가 나쁜 길로 빠져요. 패싸움을 하러 나갔습니다. 주먹을 내뻗으면서 생각해요. 이렇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기를 망가뜨리고 있지만, 그 어떤 후회도, 공포도, 아픔도...
공간이 다시 새하얗게 빕니다.
추가로, 기존에 등장했던 장면이나 대사를 서로 다른 관점에서 조명하는 연출도 자주 등장합니다. 이 장면을 봅시다. 방금 봤던 유격수, 토도가 입스를 극복할 마음을 먹고 배팅 센터에 갔습니다. 가니까 옛날에 팀에서 의지했던 선배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선배의 시점으로 한번 봅시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런 연출들을 통해 무엇을 전달하고 싶었던 걸까요? 이 만화의 배경은 제대로 된 야구부가 없다고 알려진 도립 고등학교입니다. 다들 야구를 그만두려고, 다시는 쳐다도 보지 않으려고 이 학교에 온 겁니다.
그 대표인 주인공 카나메가 떠올린 옛날 기억을 한번 살펴봅시다. 카나메는 포수 자리에서 올려다본 타자의 표정들을 하나하나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습니다. 자신과 키요미네가 누군가의 꿈을 꺾어버리고 있다는 걸 ‘살인’이라고 표현할 정도로요. 그런 자신 또한 누군가의 재능에 밀릴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고, 여기에 부정적인 감정을 품는 스스로를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어마어마한 노력파에, 그린 듯한 모범생이었던 카나메는 한편으로는 행복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동경하며, 또래 학생들이 하는 말을 귀담아듣고 있었습니다. ‘연애를 할 거야.’ ‘놀러 가자.’ ‘청춘을 즐기자!’ 이 모든 말을, 기억을 잃은 주인공이 똑같이 되풀이합니다.
맞아요, 주인공은 전부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괴로웠던 것입니다. 섬세한 관찰력과 공감 능력 덕분에 포수로서 두각을 드러냈지만, 남들이 그냥 지나치는 하나하나가 스트레스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야구가 괴로웠던 기억만큼 야구에 쏟아부었던 노력과 애정의 흔적 또한 카나메의 무의식 속에 남아 있습니다.
다른 부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만화에서는 야구부에 들어오라고 설득하는 과정이 길지 않습니다. 그냥 어느새 자석에 끌리듯이 섞여 들어와서 같이 하고 있어요.
수많은 좌절과 고난이 있었음에도 이 친구들은 왜 그라운드로 돌아오게 되는 걸까요? 기억을 잃기 전의 카나메는 왜 힘들어 죽겠는 야구를 계속했을까요? 사람들은 왜 스포츠에 열광하고 스포츠를 사랑할까요?
당연히 즐겁기 때문이죠!
배트에 공이 잘 맞았을 때의 손맛. 아웃 카운트를 잡았을 때의 짜릿함. 주루 플레이로 점수를 얻어냈을 때의 뿌듯함. 동료와의 유대. 카나메가 무언가를 ‘잊어버렸던’ 것은 만화 시작 시점보다도 전이었던 거예요.
우리는 보통 어려움을 이겨낸 사람을 기억하지만, 이 만화는 그 뒤에 쓰러진 수많은 어린 선수들의 모습을 그려냅니다. 그리고 간접적으로 묻습니다. ‘우리, 무언가 본질을 잊고 있지는 않냐’고요.
그렇다고 해서 이 만화가 마냥 낙관적인 이상론만 늘어놓지는 않습니다. 야구 강호교가 아닌 곳에서 진지하게 야구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거듭해서 언급됩니다.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을 뛰어넘겠다는 주인공에게 기존에 소화했던 연습량을 알려주며 찬물을 끼얹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만화의 주인공은 기억을 잃은 카나메 케이입니다. 나중에는 기억을 잃기 전과 후가 거의 다른 인물처럼 분리되어 묘사되기까지 하는데요.
기억을 잃은 주인공은 자신과 배터리였던 키요미네에게 말합니다. ‘야구는 잊어버려서 잘 모르겠지만, 네가 내 친구인 건 확실한 것 같다’고요.
이들은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이번에야말로 키요미네는 카나메와 진정한 의미의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변 환경과 자신이라는 투수에게 맞춰진 지장 카나메 케이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카나메 케이와 함께요.
시작할 때 말씀드렸듯, 이 만화는 야구의 즐거움을 잊어버린 주인공이 처음으로 돌아가 야구에 다시 빠지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도 삶의 모든 것이 지치고 어렵게 느껴질 때 초심으로 돌아가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키요미네처럼 한결같은 친구가 있기를 바라며 머리를 한 대 세게 치는 것보다는, 역시 이 만화를 한 번쯤 보면서 위로받으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되었으니 한번쯤 확인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