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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귿 May 18. 2019

AI시대의 인간

영화 <블레이드 러너>와 AI 이슈로 바라본 인간의 정의

서론: 사유하는 AI(Artificial Intelligence, 인공지능)


지난해 ‘기계가 바둑에서 인간을 넘어서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을 가볍게 무시하고 등장한 알파고는 ‘알파고 쇼크’라는 신조어를 낳으며 새로운 공론의 장을 열었다. 알파고 쇼크는 단순히 기술의 발전에 대한 충격이 아니었다. 알파고는 그동안 인간의 전유물로만 여겨지던 영역을 AI가 모방할 수 있게 되었고, 머지않아 AI가 인간을 넘어설 것이라는 공포를 안기며 우리에게 인간에 대한 철학적 담론을 안겨주었다. 그동안 AI는 단순히 우리의 명령을 따르며 우리를 보조하는 존재였지만, 우리는 ‘알파고 쇼크’를 통해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며 ‘사유

[1]하는’ AI가 현실에 등장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수명이 4년으로 제한된 복제인간 노예인 레플리칸트를 통해 인간성에 대해 질문하며 디스토피아적인 2019년의 로스앤젤레스를 그려낸다. 이 영화는 1982년에 나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현재 시점의 AI 이슈에 대해 진지한 담론을 갖추며 ‘인간’에 대해 다시금 곰곰이 생각해보게 한다. 극 중에서 레플리칸트의 유전자 설계자(Sebastian)가 아무 행동이나 해보라며 내리는 명령에 대해 레플리칸트들(Batty와 Pris)이 데카르트를 인용하는 장면은 사고하는 것이 인간의 고유한 특징이라는 근대적인 믿음을 조롱하는 듯하다.



Sebastian: Show me something?

Batty: Like what?

Sebastian: Like anything.

Batty: We’re not computers, Sebastian, we’re physical.

Pris: I think, therefore I am.

 


기억의 기원Origin


영화의 레플리칸트들은 비록 수명은 짧지만 강인한 육체와 인간과 다르지 않은 지능을 가진 존재로, 우주에서 인간을 대신해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가 반란을 일으키고 지구로 잠입해 자신들을 제작한 타이렐 컴퍼니로의 침투를 시도하자 이들을 제거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블레이드 러너인 형사 데카드가 이를 막으려 한다는 것이 영화의 내용이다. 한편 레플리칸트를 제거하는 것은 처형execution이 아닌 폐기retirement로 불리는데, 이는 인간들에게 레플리칸트들은 기계 그 이상으로 취급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렇듯 외관상의 차이가 거의 없는 레플리칸트와 인간을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극 중에서 사용되는 도구는 바로 ‘기억’이다. 인간은 오로지 기억을 통해서만 우월한 지위에 놓인다. 영화는 레플리칸트 여부를 감별하기 위한 Voight-Kampff Test를 실시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레플리칸트들은 인간과 같이 성장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기억이 없기에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으면 당황하는 모습을 보인다. 타이렐 회장의 조카의 기억이 이식된 레플리칸트인 레이첼의 경우 데카드가 Voight-Kampff Test를 통해 그가 레플리칸트임을 밝혀 내기 전까지 본인이 레플리칸트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모습을, 그리고 본인이 레플리칸트임을 아는 순간에 이르러서는 본인의 기억이 이식된 것이라는 것에 대해 절망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인다. 이처럼 기억은 영화를 풀어가는 중요한 도구로 사용된다.


인간은 기억을 레플리칸트와 인간을 구분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지만, 레플리칸트에게 기억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시켜주는 수단이다. 극 중에서 레플리칸트들은 사진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특징을 보이는데, 이는 그들의 ‘파편화된 기억’ [2] 을 뒷받침해줄 유일한 증거물이 사진이기 때문이다. 사진에 대한 레플리칸트들의 기억은 타이렐 컴퍼니에 의해 이식된 ‘가짜 기억’이지만 레플리칸트들은 그것을 진실로 믿고 추억한다.


이렇듯 본질적으로 기억을 사용하는 방식에 있어서 레플리칸트와 인간은 결코 다르지 않다. 결국 기억에 대해 레플리칸트와 인간이 다른 점은 오직 기억의 기원Origin이 다르다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식된 기억이 아닌, ‘삶을 통해 경험된 기억’을 지녔기 때문에 우월한 존재인 걸까. 과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억이 이식된 가짜 기억이 아니라는 것을 누가 증명할 수 있을까. 이진경은 이에 대해 “기억이 자신의 신체에 새겨진 과거의 기록이라면, 혹은 자신의 것으로 ‘인정reconnaissance’함으로써 그에 맞추어 살아가게 하는 ‘오인méconnaissance’이라면, 그리고 그 효과가 동일하다면, 대체 그 ‘기원’이 다르다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을까?”라고 지적한다. [3]


현대인은 직접적으로, 또는 글이나 영상매체를 통한 간접적인 방법으로 끝없이 다양한 경험에 노출되는 삶을 살아간다. 과거의 인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경험의 바다 같은 삶 속에서 우리의 기억은 왜곡되어 가고 우리는 오직 사진을 통해서만 과거를 추억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정말 실재했던 기억인지, 정말로 진실된 것인지에 대해 스스로 확신할 수 없다면 인간은 가짜 기억이 이식된 채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레플리칸트와 다를 것이 없다. 이처럼 영화는 기억을 통해 레플리칸트와 인간을 구별하는 것을 꼬집으며 기억의 기원이 다르다는 이유로 레플리칸트의 인간성을 부정하는 것을 비판한다.


인간보다 더 인간답게


영화에서 레플리칸트를 제작하는 타이렐 컴퍼니의 모토는 “인간보다 더 인간답게(More human than human)”이다. 이러한 모토에 부합하듯, 영화에서 레플리칸트들은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존재로 묘사된다. 극 중의 인간들은 모두 독신으로 살아가며 감정이 없는 것처럼 표현되고 레플리칸트들을 죽이는 것에 무감각한 반면, 레플리칸트들은 서로 간절하게 사랑하며 동료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연출은 인간에게는 이미 메말라버린 감정이 레플리칸트들에게는 여전히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형사 데카드가 무기도 없이 벌거벗은 상태의 레플리칸트들을 향해 잔혹하게 여러 발의 총을 발사하고 레플리칸트들은 눈물을 흘리며 죽어가는 장면을 보며, 비인간화되어가는 인간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와 대비되는 레플리칸트의 모습에서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모습을 느끼게 된다. [4] 종국에 밝혀지는 레플리칸트들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단지 ‘사랑하는 이와 오랜 시간을 함께 하고 싶다’라는 너무도 인간적인 욕구[5]때문에 반란을 일으키고, 생명연장의 꿈을 안고 목숨을 건 채 자신들의 창조주인 타이렐 회장을 찾아 지구로 잠입한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우리에게 인간다운 것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마지막 남은 레플리칸트이자 레플리칸트 반란군의 수장인 배티는 자신을 폐기 retirement 하러 온 형사 데카드를 죽일 수 있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배티는 데카드와 달리 그를 죽이려 하지 않는다. 그는 데카드를 용서하며 그를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주고 레플리칸트에게 주어진 4년의 수명을 다하고 손에 못을 박은 채 품 속의 비둘기를 하늘로 날리며 죽음을 맞이한다. 마치 예수의 형상을 연상케 하는 [6] 죽음의 순간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난 저 우주에서 너희 인간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지. 오리온 좌의 불길 위로 공격해 들어가는 전함들을 보았고, 탄호이저 바다의 어두움을 밝힌 명멸하는 별들도 보았어. 곧 그 기억은 모두 시간 속에 사라지겠지. 빗 속의 내 눈물처럼 말이야. 이제 죽을 시간이야.”


배티의 마지막 대사는 기억이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레플리칸트와 인간을 구분하며 인간성의 중심에 기억이 자리하고 있다 [7]는 영화의 전제를 역설한다. 그의 대사에서 우리는 기원에서는 인조인간이었지만 경험에서는 위대한 인간[8]이었던 레플리칸트와 자연의 기억을 거세당한 채 살아가는 인간[9] 중 누가 더 인간 다운지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영화에서 지구에 남겨진 인간들은 무기력한 모습으로 하루하루 소일거리를 찾기에만 몰두한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의 꿈도, 열정도 남아있지 않다.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자 고되고 위험한 일은 모두 기계에게 의존하기 시작한 인간이지만 기계에 의존하면 의존할수록 인간은 본연의 인간성을 상실하고 기계처럼 살아가게 된다. 그에 비해 인간들의 일을 대신하기 위한 도구로써 창조된 레플리칸트들은 우주를 누비며 진정한 인간들이 해야 할 일들을 해내고 있다. 인간성을 상실한 인간과 인간의 역할을 대신하는 비인간을 우리는 영화를 통해 목격하게 된다.


데카드가 배티를 쫓는, 그리고 배티가 데카드를 용서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레플리칸트와 인간을 의도적으로 대비하며 레플리칸트와 인간 사이의 경계를 흐린다.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던 인간을 용서하고 구해주는 ‘비인간’과 자신이 죽이려던 ‘비인간’에 의해 구조된 인간의 대비[10]로 흐려진 둘의 경계에서 우리는 레플리칸트인 배티에게서 더 인간적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을 죽이려는 타인을 용서하고 진정한 자연의 기억을 보유한 채 죽어가는,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레플리칸트를 보며 우리는 ‘인간을 인간답게’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게 된다.


“과연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사유하는 존재, 인간


파스칼은 팡세에서 “인간은 천사도 아니요, 짐승도 아니다.”[11]라고 인간을 정의했다. 이는 인간을 축약하여 표현한 좋은 문장이다. 신의 불완전한 피조물, 그러나 물체와 동물에 대한 우월성을 가지는 존재로의 인간관은 우리에게 가장 보편적인 인간관이다. 문명이 시작된 이래 수많은 과학자와 철학자들은 인간의 상대적 우월성을 입증하고자 애쓰며 “과연 무엇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가?”라는 질문의 답을 갈구해왔다. 인류의 지성은 끝없는 성찰과 토론을 통해 다양한 결론을 도출해냈으며, 그 결과물 중 가장 유명한 해답은 아마 영화에서도 등장하는 ‘데카르트 회의론’ 일 것이다.


데카르트는 인간을 사유하는 존재로 정의하고 이를 이른바 데카르트적 회의론을 통해 증명하고자 했다. 데카르트적 회의론이란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려고 했지만, 존재하지 않는다면 의심할 수 없기 때문에 그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것’으로 정의된다. 즉 우리는 스스로 사유하기에 우리의 존재를 증명하게 되고 인간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데카르트적 회의론은 이후의 인간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기에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 즉 스스로 ‘사유’한다는 것은 물체 혹은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었고 인간은 ‘사유하는 존재’로 스스로를 정의함으로써 물체와 동물에 대해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는 것에 성공했다.


이로써 인간, 즉 호모 사피엔스는 마침내 오만한 인간관을 확립해냈다. 인간만이 사유하는 존재이기에 모든 것에 대해 군림한다는 오만한 인간관은 인간의 모든 행위를 합리화시켰다. 자기 합리화 속에서 인간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구를 말 그대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 AI가 등장한다. AI는 오만한 인간관의 기둥인 인간만이 유일하게 사유하는 존재라는 전제를 무너뜨린다. 그렇게 AI의 등장은 사유하는 존재로 물체에 대해 우월한 지위를 차지해 온 인간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일찍이 데카르트는 다음처럼 물은 바 있다. “당신은 존재하고, 당신이 존재함을 알고 있으며, 당신이 이것을 알고 있는 것은 당신이 의심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에 대해 의심하고 있는 당신, 자신에 대해서만 의심할 수 없는 당신, 당신은 과연 무엇인가?”[12] 영화는 데카드에게 데카르트가 했던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데카드는 모든 인간에 대해 의심하지만 자신에 대해서만은 의심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당연히 인간으로 여기지만 영화는 데카드마저 레플리칸트라는 묘사로 끝이 나기 때문이다. 데카드마저 레플리칸트라는 진실은 우리의 생각에 경종을 울린다. 우리는 사유하는 인간인 내가 창조한 AI가 스스로 사유를 시작하게 되는 상황에서 우리가 우리를 인간이라고 믿을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에 빠진다. 결국 ‘우리가 자연적인 인간과 인공적인 것의 차이를 믿을 것인가 믿지 않을 것인가는 종교적 믿음의 문제가 되어버리는’[13]것이다.


데카르트적 회의론으로 절정에 이른 오만한 인간관은 AI의 등장으로 깨어지게 되었다. 더 이상 인간만이 사유하는 존재가 아니며, 우리는 다음의 질문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우리를 인간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그리고 사유하는 AI과 우리가 무엇이 다르기에 오직 우리만 인간이 되는 것인지.


결론-데카르트적 회의론을 넘어서: AI시대의 인간


사유하는 AI의 등장이 기존의 데카르트적 회의론에 기반한 인간관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로봇이라는 단어의 어원을 살펴보자. 로봇은 1921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소설가 카렐 차페크가 그의 희곡 「로섬의 인조인간(Rossum’s Universal Robots)」에서 제안한 것으로 노동을 의미하는 체코어 ‘robota’을 어원으로 한다. 이 희곡은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기 위해 창조되었으나, 반기를 들고 인간을 몰아내 자신들의 세상을 만든다는 내용이다. 극 중 한 인간의 대사는 우리가 갖는 사유하는 AI에 대한 공포가 AI라는 발상의 시작부터 내재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난 과학을 저주해! 과학기술을 저주한다고! 우리는 실수한 거야! 우리의 과대망상증을 위해서,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서, 진보를 위해서. 모르겠어. 어떤 거대한 무언가를 위한답시고 우린 인류를 살해한 거야!”[14]


AI라는 주제의 태초부터 내재되어 있던 사유하는 AI의 실현 가능성과 그에 따른 인간성에 대한 새로운 논의의 필요성은 천천히 그 모습을 드러내며 현실로 다가왔다. 우리 시대는 이미 신체에 물질을 주입하는 등의 성형수술이 보편화되었고, 신체의 일부를 인공장기로 대체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한편 우리가 알파고를 통해 확인한 것처럼, AI의 사고능력은 인간의 수준에 이르렀으며 어떤 면에서는 이미 인간을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다.


이처럼 인간과 기계를 구분하는 것의 기준은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인간은 기계화되어가고 기계는 인간의 모습을 닮아간다. 빠른 시일 내에 뇌를 인공장기로 대체한 인간이 등장할 수 도 있을 것이며 뇌를 제외한 신체가 기계로 이루어진 인간이 등장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에 대해 논쟁을 벌일 것이다. 과거 살아있는 유기체와 생명이 없는 비유기체로 명확하게 구분되던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무너지는 동시에 과거 단순히 공상의 영역으로만 존재하던 AI에 대한 공포는 공상의 영역을 벗어나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알파고가 등장했고 제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이 뉴스를 연일 장식하고 있다. 이렇듯 앞으로 우리가 창조해낼, 그리고 우리와 함께 살아갈 AI의 모습은 지금까지의 AI와는 다르다. 우리가 마주하게 될 AI는 인간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스스로 사유하는 존재이다. 명령에 의해서가 아닌 스스로 사유하며 행동하는 AI는 우리와 의사소통하고, 우리의 일자리를 대신하며 우리와 함께 거리낌 없이 살아갈 것이다.

사유하는 AI가 등장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들은 인간으로 불려야 할까. 그들이 인공이라는 과정을 거쳤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임을 부정한다면, 우리는 인공수정으로 태어난 아기도 인간으로 인정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15] 그들은 어쩌면 영화 속 타이렐 컴퍼니의 모토처럼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존재로 우리의 삶에 자리매김할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에게 AI는 현실적인 문제이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1982년에는 사유하는 AI의 존재가 단순히 공상에 머물렀기에 영화 역시 사유하는 AI에 대한 철학적 고민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2017년의 우리에게 있어 사유하는 AI는 현실이고, 공상에 머무르던 시절의 철학적 고민보다는 당면한 현실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야만 한다.


AI 이슈의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요즈음의 주된 논쟁은 ‘AI가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을 것인가’이다. 그러나 문제는 더 근원적인 곳에 숨어있다. 사유하는 AI의 등장은 우리에게 단순한 일자리에서의 경쟁자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창조된 AI와 별 다를 바 없는, 혹은 더욱 열등한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의 존재가 무엇인지에 대해 커다란 혼란에 빠질 것이며 AI는 단순한 일자리에서의 경쟁자를 넘어 ‘인간’이라는 지위의 경쟁자가 될지도 모른다.


AI시대에서 우리는 더 이상 데카르트적 회의론만으로는 ‘인간’을 정의할 수 없게 되었다. 더 이상 우리, 호모 사피엔스만이 지구 상의 유일한 사유하는 존재가 아니다.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채 맞이하는 사유하는 AI의 등장은 우리에게 자신의 존재가 무엇인지에 대한 끝없는 고민을 안기며 우리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엇인지에 대한 혼란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더 나아가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기존의 데카르트적 회의론을 뛰어넘는 AI시대의 새로운 인간관에 대해 논의해야만 한다.


나가며


고전의 반열에 이른 영화 <블레이드 러너>가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단순히 영화 속의 연출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아마 우리의 현재, 그리고 우리의 미래를 영화에서 적나라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우리는 신성한 노동의 권리를 저버린 채 많은 부분을 기계에 의존하고 있으며 영화 속 무감각한 인간의 모습은 현대인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가올 10월에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후속작인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가 개봉할 예정이다. 전작의 배경인 2019년에서 30년이 흐른 2049년의 이야기를 다루게 될 것이며 전작의 주인공 형사 데카드도 등장할 것이라고 한다. 1982년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가 던져준 메시지는 우리에게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35년 만의 후속작인 2017년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는 AI시대의 우리에게 과연 또 어떤 메시지를 남기게 될까. 10월이 기다려진다.
 

참고문헌

강순규, “비인간적인 인간과 인간적인 복제인간-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중심으로”. 영화 4. (2012) : 133-153

고맹임, “아포칼립스 이미지와 영상미학-<블레이드 러너>와 <A.I.)을 중심으로”. 카프카연구 15 (2006) : 69-90

김승욱, “데카르트 철학의 제일철학적 지평”. 누리와 말씀 27. (2010) : 160-190

노명우, “데카르트와 <블레이드 러너>의 데카드”. 문화과학. (2001) : 206-218

맹주만, “인간 복제와 인간의 가치”. 철학탐구 12. (2000) : 37-60

신순철, “사이버 문화와 인간 개념의 변화”. Speech & Communication 7. (2007) : 7-37

이영의, “로봇 존재론”. Korea robotics society review 63. (2009) : 12-15

이진경, “블레이드 러너: 복제인간과 안티-오이디푸스”. 창작과비평 23. (1995) : 332-357

정락길, “<블레이드 러너>를 통해 본 인조인간의 문제”. 로봇과 인간 6. (2009) : 20-23

한숭홍, “인간이란 무엇인가?”. 장신논단 5. (1989) : 333-356

홍성욱, 머니투데이, 2017. 6.24 <http://news.mt.co.kr/mtview.php?no=2017062108193724926>


          

[1] 본 에세이에서는 ‘사유’를 데카르트적 회의에 기반한 의미인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하는 상황에서 내가 생각한다는 것은 유일하게 의심할 수 없는 사실로 내가 현존함을 입증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2] 강순규, “비인간적인 인간과 인간적인 복제인간-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중심으로”. 영화 4. (2012) : 149

[3] 이진경, “블레이드 러너: 복제인간과 안티-오이디푸스”. 창작과비평 23. (1995) : 336

[4] 강순규, “비인간적인 인간과 인간적인 복제인간-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중심으로”. 영화 4. (2012) : 138

[5] 정락길, “<블레이드 러너>를 통해 본 인조인간의 문제”. 로봇과 인간 6. (2009) : 23

[6]  Michael Martin, “Mediations on Blade Runner”, The Journal of Interdisciplinary Studies 17 (2005) : 105~122. 강순규, 앞의 논문 138에서 재인용

[7] 강순규, “비인간적인 인간과 인간적인 복제인간-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중심으로”. 영화 4. (2012) : 149

[8] 이정우, 기술과 운명.(서울: 한길사, 2001) 43. 고맹임, “아포칼립스 이미지와 영상미학-<블레이드 러너>와 <A.I.)을 중심으로”. 카프카연구 15 (2006) : 79에서 재인용

[9] 강순규, “비인간적인 인간과 인간적인 복제인간-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중심으로”. 영화 4. (2012) : 150

[10] 이진경, “블레이드 러너: 복제인간과 안티-오이디푸스”. 창작과비평 23. (1995) : 352

[11] Blaise Pascal, Pensées. 358. 한숭홍, “인간이란 무엇인가?”. 장신논단 5. (1989) : 343에서 재인용

[12] René Descartes, 성찰. 이현복 역(서울: 문예출판사, 1997) 144.  노명우, “데카르트와 <블레이드 러너>의 데카드”. 문화과학. (2001) : 208에서 재인용

[13] 노명우, “데카르트와 <블레이드 러너>의 데카드”. 문화과학. (2001) : 212

[14] 홍성욱, 머니투데이, 2017. 6.24 <http://news.mt.co.kr/mtview.php?no=2017062108193724926>

[15] 신순철, “사이버 문화와 인간 개념의 변화”. Speech & Communication 7. (2007) :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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