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원시 평생학습관 웹진 <와>에 정기 기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2017년 1월 첫 기고글 전문을 옮깁니다.
웹진에서 글을 보시려면 링크를 클릭하세요. http://www.wasuwon.net/110115
나는 삶과 죽음 사이의 공간에서 일생을 보낸다면 연민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스스로의 존재도 고양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하찮은 물질주의, 쩨쩨한 자만에서 최대한 멀리 달아나 문제의 핵심, 진정으로 생사를 가르는 결정과 싸움에 뛰어들고 싶었다.
- 『숨결이 바람이 될 때』 중에서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기 위해 문학과 철학을 파고들었던 한 청년이 그 질문에 더 실존적으로 다가서기 위해 의학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의사로서의 경력의 정점을 코앞에 두고 말기 폐암 판정을 받았다. 제목조차 시적인 『숨결이 바람이 될 때』는 모두 앞에 놓인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또는 삶이라는 것에 대해 반드시 써야한다고 생각한 의사이자 환자, 폴 칼라니티의 치열한 기록이다.
사람들은 직업을 통해 타인을 만난다. 교사는 가르치는 일을 통해 학생을 만나고, 상인은 물건과 서비스를 통해 고객을 만나며, 예술가는 작품을 통해 관객을 만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만남을 통해 상대의 삶에 일정한 흔적을 남긴다. 때로는 그 흔적이 타인의 삶의 정체성을 결정하기도 한다. 의사라면 더더욱이.
나는 환자의 뇌를 수술하기 전에 먼저 그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정체성, 가치관, 무엇이 그의 삶을 가치 있게 하는지, 또 얼마나 망가져야 삶을 마감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지.
- 『숨결이 바람이 될 때』 중에서
뇌는 경험을 중재한다. 즉 우리는 뇌를 통해 경험을 인식한다. 또 뇌를 통해 경험을 창조한다. 언어 인지를 관장하는 뇌의 영역에 문제가 생기면 대화라고 하는 뜻 깊은 경험을 ‘인식’할 수 없다. 운동 신경을 제어하는 뇌의 영역이 파괴된다면 등산이나 조깅이라는 경험을 ‘창조’할 수 없다. 때문에 뇌를 건드리는 수술은 환자의 앞으로의 삶에 놓인 경험 위에 조심스레 메스를 올려놓는 것이다. 의식을 존재의 근본으로 본 데카르트라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경험은 한 사람의 정체성을 빚어낸다. 그래서 경험에 영향을 주는 것은 상대의 정체성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종양을 제거하면 언어도 잃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의사는 이렇게 결정적인 삶의 정체성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매너리즘은 타인에 대한 섬세한 감각을 무디게 만든다. 초년생 레지던트 시절 한 환자의 죽음 앞에서 칼라니티는 이렇게 다짐했다.
그때부터 나는 환자를 서류처럼 대할 것이 아니라 모든 서류를 환자처럼 대하기로 결심했다.
- 『숨결이 바람이 될 때』 중에서
그가 이런 결심에 완전히 성공한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뒤로 하고 이 질문을 나에게 던져본다. 나는 타인을, 혹은 심지어 나의 삶조차, 숫자처럼 대하진 않았나? 모든 숫자를 인생처럼 대했어야 하는 건 아닌가? 고객보다 매출액이, 학생보다 성적이, 관객보다 객석 점유율이, 국민보다 정책 달성 비율이, 사람보다 연봉이 더 전면에 부각된다는 것은 놀랄 일도 아니다. 하지만 놀라지도 않는 자신은 그야 말로 놀랄만한 인간이 아닌가?
칼라니티의 글을 읽는 내내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그의 대답이 궁금했다. 하지만 책의 첫 장과 마지막 장 사이 어디에서도 이렇다 할 답은 없었다. 대신 그는 나에게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운 좋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누군가는 사고로 죽고, 누군가는 병으로 죽는다. 또 누군가는 천수(天壽)를 누리다가 노환으로 죽고, 누군가는 스스로 삶을 마감한다. 당신은 이러한 죽음들 중에서 무엇이 가장 비극적이라 생각하는가?
칼라니티의 글을 읽고 난 후, 나는 삶의 관계와 의미를 정리할 시간을 가지지도 못하고 급작스레 맞이하는 죽음이 가장 비극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반대로 그러한 시간과 기회를 가졌다면 그건 꽤 ‘운 좋은 죽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모리’가 떠올랐다. 미치 앨봄의 책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에서 루게릭병으로 서서히 자신의 죽음과 대면해야했던 사회심리학 교수 모리는 병상에 누운 자신을 두고 “아무나 이런 행운을 누리는 것은 아니라네”라는 말을 ‘자주’ 했다.
차츰 줄어드는 시간이 아쉽긴 해. 하지만 이런 시간이 내 삶을 바로잡을 기회를 주는 게 고맙다네.
-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중에서
사람은 누구나 몇 가지 정도는 후회와 아쉬움을 가지고 살아간다. 아직 용서하지 못한 사람, 아직 용서받지 못한 일들, 후회스러운 선택. 이런 것들은 마치 시간에 쫓겨 제출한 불만족스러운 원고 마냥 지나온 삶을 절뚝거리게 한다. 삶을 정리할 시간을 가진다는 것은 이런 것들을 바로잡을 기회를 가진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용서와 화해라는 타인과의 관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삶에 대한 후회를 받아들이는 것도 포함시켜야 한다.
후회는 이미 날아가버린 것 같은 기회와 아직 되돌릴 수 있을 것 같은 미련 사이 어디쯤에 있다. 하지만 되돌릴 시간이 남아있지 않다면? 그렇다면 후회를 수용으로, 절뚝거리는 삶을 바라보았던 불만스러운 눈빛을 따뜻한 눈빛으로 바꾸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죽어 가면서 평화로울 수 있다면 마침내 진짜 어려운 일을 할 수 있겠지?
그게 뭔데요?
살아가는 것과 화해하는 일
-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중에서
칼라니티의 아내 루시는 “그가 희망한 것은 가능성 없는 완치가 아니라, 목적과 의미로 가득한 날들이었다”라고 회고한다. 나 역시 그러한 삶을 바라기에 책을 읽는 내내 만나는 사람들마다 물어보았다.
많은 사람들은 대답하지 못했고, 몇몇은 대답을 주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대답이 있다.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의미 있는 것 아닌가요?” 이 대답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너무 공감해서가 아니다. 이 대답은 오히려 다시금 질문을 하게 만들었다.
버스 안에서도, 걷는 동안에도, 집에 있을 때에도 계속 물었다.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그러다 문득 20대 중반의 내가 생각났다.
열정을 다 바쳤던 단체가 갈등 속에서 무너지고, 나 스스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과오를 저지르고, 소중한 친구들과의 관계조차 끊어진 때가 있었다. 꼭 죽으려고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날 한강다리를 걸어보았다. 그러다 중간 즈음 갔을 때, 다리 아래 강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알았다. ‘저기 뛰어들어서 차갑고 숨 막히는 고통 가운데 죽고 싶지는 않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죽고 싶지 않다는 것은 확실히 알았는데, 살아야할 이유는 아직 찾지 못한 것이다. 내 삶을 정당화하고 싶은데 어디에서 그 답을 찾아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존재하는 것은 가치가 있다. 특히 타인의 삶에 대한 존중의 측면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힘겨운 시절에는 ‘존재’만큼이나 ‘이유’가 필요할 때도 있는 것 같다.
내게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글들이 필요했다.
- 『숨결이 바람이 될 때』 중에서
칼라니티와 모리는 ‘목적과 의미로 가득한 날들’을 꿈꾸며 살았고, ‘운 좋은 죽음’의 과정 덕에 ‘살아가는 것과 화해’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게 삶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칼라니티와 모리에게 주어진 행운도 사실은 엄청난 육체적 고통이 포함된 시간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하기에 죽음이라는 대(大)사건을 마주하고 나서야 삶의 의미를 갈무리하는 것보다, 삶 속에서 부단히 화해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커튼콜보다 본 무대가 중요하지 않은가!
칼라니티는 진부한 교훈이나 훈계를 늘어놓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의사가 아닌 작가로서, 메스가 아닌 문장으로 내게 흔적을 남겼다. 진실로 진실로, 진부하지 않았다.
숨결이 바람이 되기 전...
계속 살아갈 만큼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 『숨결이 바람이 될 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