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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동준 Mar 08. 2017

도덕의 침묵과 매끄러운 사회

영화 <사일런스> 후기

수원시 평생학습관 동향리포트 3월 칼럼으로 쓴 글입니다.

원문 : http://www.wasuwon.net/116321





엔도 슈사쿠의 동명 소설 <침묵>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사일런스>가 얼마 전 개봉하였다. 영화는 가톨릭 선교에 대한 박해가 가장 극심했던 17세기 일본의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한다. 강한 믿음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간 예수회 신부 로드리게스는 가톨릭 박해의 잔혹함으로 이름을 떨치던 다이묘(지방영주) 이노우에의 손에 붙잡힌다. 그는 “예수님의 얼굴이 그려진 동판을 밟고 지나가면 고문당하고 있는 일본인 가톨릭 신자들을 살려주겠다.”는 제안 앞에서 괴로워한다. 성직자의 신념과 인간적인 윤리는 양 끝에서 그의 심장을 찢어 당기는 고통이 된다.


<출처: 씨네그루(주)키다리이엔티>


“고통의 순간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라는 질문이 주제가 되는 영화 <사일런스>는 많은 종교적 메시지 혹은 논쟁점을 던지지만, 나는 좀 다른 성질의 기억을 회상하였다.



불편한 존재피곤한 사람


20대 후반 장교로 입대하여 놀란 것 중 하나는 군대 행정의 대부분이 소위 ‘가라(거짓)’라는 것이었고, 더 놀란 것은 그것을 문제 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일차적으로는 진실함이라는 양심의 소리에 충실하고 싶었고, 근원적으로는 사회적 약속의 한 형태인 행정의 토대라고 할 수 있는 신뢰성을 지키고 싶어서 부단히 애썼다. 피곤한 장교로 찍힌 것은 애교였다. 고백하건대 그 당시 참 많이 기도했었다.     


사회에 나와 들어간 첫 직장도 노골적 불법만 아니라면 편법과 관행을 어려워하지 않았다. 대안을 제시하면서 개인과 조직의 윤리를 다 지켜보려 했지만 임원과의 불편과의 관계 때문에 결국 퇴사의 형식으로 해고당했다.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 싶었던 힘겨움은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크고 작게 겪었던 진실과 도덕의 힘겨움 중에 나를 가장 괴롭게 했던 질문이 있다. 그 질문은 종교인으로서의 나에게 ‘조금’ 잔인했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해 자기 목숨도 버리셨는데, 너는 너의 도덕적 순결을 위해 모두를 힘들게 하고 있지 않냐? 너의 도덕은 이기적인 도덕이 아니냐?



영화 <사일런스>에서 로드리게스 신부 역시 같은 질문과 비난에 직면한다. “당신 신념 하나 지키자고 저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는가?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닌가?” 그가 그 질문 앞에서 고통한 것처럼, 나도 시원스레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질문 앞에서 괴로워했다. 때때로 도덕적 민감함 자체가 이기심의 발로인가 싶은 마음에, 그런 마음과 싸우기라도 하듯 괴로움 속에서 편법에 굴복하기도 했었다. 또 때때로 딜레마적 상황을 만드는 제도와 규정의 모순을 바꾸기 위해 분투했고, 작은 승리들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스스로 분명하게 답할 수 있기까지 5년이 걸렸고, 그 시간 동안 나는 자주 불편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윤리적 딜레마는 관계론적 책임의 문제다.


이런 상황을 흔히 도덕적 딜레마라고 한다. 마이클 센델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를 비롯한 대부분의 윤리학책에 등장하는 도덕적 딜레마의 전형이 있다. “선로 위에 한 사람이 서 있는데, 그를 살리기 위해 기차를 탈선시킬 것인가? 아니면 그를 죽이고 갈 것인가?” 나 하나 죽어서 딜레마를 벗어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장치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탈선을 통해 죽는 것이 내가 아닌 다수의 승객이라면?


<출처: https://yijongdae.wordpress.com/tag/%ED%84%B0%EB%84%90%EB%94%9C%EB%A0%88%EB%A7%88/>



공리주의의 어려움을 다루고 있는 이런 도덕적 딜레마는 그 다양한 변형에도 불구하고 동일하게 전제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모든 결정과 책임이 기차 운전수에게만 있다는 것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다시 이전의 기억으로 돌아가 보자.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해 자기 목숨도 버리셨는데, 너는 너의 도덕적 순결을 위해 모두를 힘들게 하고 있지 않냐? 너의 도덕은 이기적인 도덕이 아니냐?



나는 생각했다. ‘내 마음을 꺾어서 구할 수 있는 것이 타인의 목숨인가? 혹은 상당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양심을 지켜서 다른 이들에게 불편함을 끼치는 것도, 양심을 꺾어서 괴로워하는 것도 나의 문제일 뿐, 공동의 고민과 책임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잔인하게도 사회의 많은 문제는 문제 상황의 범위를 좁이고 밀도를 높이는 것을 통해 매끄럽게(?) 해결된다.



강요된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혹자는 영화 속 로드리게스 신부가 결국에는 ‘후미에(성화 밟기)’를 함으로써 다른 가톨릭 신자를 살린 것을 육체적 순교에 비견되는 영혼의 순교라고 한다. 극한의 겸손이고, 사랑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자기 고집을 꺾고 공존을 모색하는 겸손이 되었든, 자기 신념 너머 타인을 바라보는 성숙한 사랑이 되었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공감과 합의의 ‘과정’이다. 하지만 로드리게스 신부는 강요된 딜레마 속에서 자신을 부인하였다.


박해를 지휘한 영화 속 이노우에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물리적 박해가 신자들의 마음을 오히려 강하게 한다는 것을 그는 간파하였다. 그래서 그는 신자들과 신부에게 예수님의 얼굴이 그려진 동판에 살짝 발만 대라고 한다. 진짜 무서움은 여기에 있다.


어차피 믿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살짝 발만 대라. 그저 형식일 뿐이다. 그리고 계속 믿음을 가지고 살아도 되지 않는가?

<출처:씨네그루(주)키다리이엔티>


이 대목에서 이노우에의 무서움을 느꼈다. 그는 마음의 성질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신념에 금이 가면 그다음엔 강요하지 않아도 쉽사리 부서진다. 갈등과 공감 속에서 스스로 배우고 자신을 갱신하는 깨뜨림, 깨우침과는 다르다. 강요된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그것은 성장도 아니고, 희생도 아니다.     



희망이기를


예술가가 살 수 없는 사회에서는 아무도 살 수 없다.


기이하고, 때때로 곤란하기까지 한 행동으로 불편함을 주곤 하는 존재가 예술가이다. 하지만 그러한 불편함이 던지는 의미를 숙고할 수 있는 것, 그러한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이 사회적 관용에 대한 시험대이기도 하다.


도덕적 감수성 역시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곤란하게도 도덕적 감수성은 예민할수록 불편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한 불편함을 개인의 예민함 혹은 과민함의 문제로 좁혀버린다면, 그 사회와 공동체는 표면적 매끄러움 외에 얻을 것이 없다. 지금 우리 사회가 딱 그러하지 않는가?


로드리게스가 남긴 대사 중 가슴을 쳤던 것이 있다.


도와주소서. 절망하고 싶은 유혹에 빠질까 두렵습니다.


절망은 쉬운 선택이다. 주변의 모든 것에 대한 살아있는 마음의 감각을 끊어버리면 된다. 반면에 희망은 생동감 있는 싸움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시절에 희망을 말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세상살이에 대해 조금 알고 나서도 희망을 유지하는 것은 녹록지 않다. 모순적 삶과 이해할 수 없는 사회상을 끌어안고도 절망이 아닌 희망을 택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절망적 상황에서도 희망을 품는 것이 소수의 강인한 영웅에게만 속한 일로 여겨지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한 사회가 타인의 도덕적 감수성을 존중할 수 있다면, 그것이 그 사회의 문화라면, 용기 있게 희망을 유지하는 사람들을 적잖이 볼 수 있을 것이다. 커다란 분기점 앞에 놓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그런 것 아닐까?


도덕의 침묵을 넘어, ‘희망’이기를 가만히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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