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릿 버트하임의 <공간의 역사> 리뷰
近來安否問如何(근래안부문여하)
月到紗窓妾恨多(월도사창첩한다)
若使夢魂行有跡(약사몽혼행유적)
門前石路半成沙(문전석로반성사)
요즈음 어떻게 지내시는지
달 드는 사창에 한이 더욱 서리네요.
꿈속에 넋이 오간 흔적 남는다면
문 앞 돌길이 반은 모래가 되었을 거예요.
조선시대 시인이었던 이옥봉의 시다.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애달팠으면 자갈돌이 모래가 되었을까? 이 시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단연 간절함을 기막히게 표현한 비유에 있다. 한데 왜 그것이 기막힌 비유가 될까?
정신 공간과 물질 공간은 두 개의 구별된 공간이다. 그런데 시인은 정신 공간과 물질 공간을 잇는 시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간절함을 극대화한다. 다른 성질의 두 공간을 하나의 정서 안에 묶는 것은 확실히 시적 도약이다. 이미 시를 읽은 이후에는 도약이 아닌 것 같을 수 있지만, 공간에 대한 개념은 의외로 확고해서 그것을 넘어서기 쉽지 않다.
물리학 전공자이자 과학 저술가인 마가릿 버트하임은 서구에서 공간의 개념이 어떤 우여곡절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지 『공간의 역사』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다. 이 책은 단테의 『신곡』에서부터 사이버스페이스까지, 문학, 회화, 물리학을 넘나들며 공간 개념의 변천사를 읊는다. 그 여정의 끝에서 그녀는 공간에 대한 개념은 곧 인간에 대한 개념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공간 개념의 산물이다.
이 말은 공간의 개념을 혁신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존재론의 변화를 수반하는 힘겨운 작업임을 뜻한다. 그 힘겨운 작업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그 끝에서 우리는 어떤 공간을 살아가고 있는가?
단테는 『신곡』에서 지옥, 연옥, 천국의 세 공간을 실제적인 공간처럼 묘사하고 있다. 비록 현대인의 눈에 땅 밑의 지옥이 보이지 않고, 예루살렘의 지구 반대편에 연옥(정죄산)이 보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신곡』은 지상의 공간만큼이나 중세인에게 실재하는 천상의 공간, 영혼의 공간을 보여준다. 물질 공간을 실증적인 의미에서의 유일한 공간으로 생각하는 현대인에게는 매우 낯설겠지만, 중세인에게 영혼의 공간으로서의 지옥과 천국은 현세(現世)에 대한 경고나 위안으로서의 은유가 아닌 실재, 실존적 사건의 공간이었다.
지상과 천상, 물질 공간과 영혼 공간으로 이원화되어 있던 공간 개념은 르네상스의 여명기부터 조금씩 위태로워진다. 첫 번째 균열은 과학이 아닌 회화에서 찾아왔다.
아레나 성당 내부(좌) 와 아레나 성당 벽화(우)
<출처 좌 - http://www.sitweb.org/arena-chapel-giotto.html 우 - http://www.peter-burkes.de/weihnacht-in-der-kunst-2.html >
13세기에서 14세기로 넘어가는 시기, 중세와 근대의 경계에서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는 공간에 대한 르네상스적-근대적 사고방식을 예고하는 작품을 그린다. 대표작 중 하나인 아레나 성당의 벽화를 보면 2차원 평면에 실감 나는 3차원 가상공간을 표현하려 한 것을 알 수 있다. “공간이란 물체의 표면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방식을 막 벗어나려는 듯하다. 하지만 조토에게 중요한 것은 육신이 살고 있는 3차원 공간의 실재성의 재현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그린 가상공간은 교회의 벽이라는 물질 공간의 연장(extension)으로서, 벽 너머의 ‘또 다른 실재’ 공간에 초점을 맞춘다. 3차원 기법은 물질 공간 너머의 공간에 생동감을 불어넣어 영적 세계의 실재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15세기 이후 직선원근법의 확립은 조토(Giotto)에게서 기미만 보였던 공간 개념의 변화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직선원근법은 소실점을 통해 관찰자의 ‘눈’의 위치를 지정한다. 이것은 공간 개념에서의 중요한 변화였다. 중세 회화에서 세계는 육체의 눈이 아닌 영혼의 눈으로 음미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다빈치 등으로 대표되는 직선원근법의 기하학적 표현은 공간에서 영혼의 눈을 밀어내고 육체의 눈으로 공간 전체에 질서를 부여한다. 회화에서 정신의 공간이 삭제된 것이다.
미학적 완성도의 추구는 예술가만의 특징은 아니다. 천문학과 수학을 다루는 자연철학자들 역시 설명의 간결함, 수식의 대칭성, 기하학적 통일성을 미적이라 느낀다. 때문에 별들의 움직임을 산뜻하고 간결하게 표현하려는 시도는 자연철학이 추구한 예술이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르네상스 이전까지의 우주관은 천동설이었다. 고대 자연철학자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체계는 중세의 전 기간을 지배했고, 코페르니쿠스는 그것을 ‘혁명적’으로 바꾸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설명을 따를 때 신의 작품으로서의 우주 체계가 너무 복잡하다는 불편한 마음을 그저 해소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지구의 위치를 우주의 중심에서 옮겼을 뿐, 여전히 지상계와 천상계를 별개의 공간으로 보았다. 즉, 지상계 외부에는 영적 질서가 충만한 천상계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순수하게 보존한 것이다.
진정으로 혁명적인 사고를 연 천체물리학의 원조는 케플러다. 그는 천체가 움직이는 원리를 알고 싶었다. 이를 위해 천체를 지구와 같은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 ‘물체’로 취급했다. 즉, 천상계를 지상계와 동일한 자연법칙의 공간에 포함시킨 것이다. 이것은 회화에서 시작된 중세적 공간 개념의 위기에 과학이 승인 도장을 찍은 사건이었다. 물리학의 천재 뉴턴의 작업은 이러한 케플러의 업적을 수학적으로 간결하고 아름답게 정리한 것이다.
이로써 공간 개념의 혁명을 위한 밑 작업은 끝났다. 직선원근법은 공간에서 영혼의 눈을 밀어내는 것을 시각적으로 경험하게 했고, 물리학은 지상계와 천상계의 담을 헐었다. 남은 일은 물질 공간에 대한 자연법칙이라는 불도저로 단테가 그린 9단계의 천상계를 한 겹씩 밀어버리는 것뿐이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물질 공간 ‘너머’에 있다고 믿었던 영혼 공간의 자리를 지웠다.
물리학은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갔다. 20세기 초 천체물리학자 허블은 지름이 3만 광년 정도일거라 생각한 우주에서 백만 광년이나 떨어진 은하계를 발견한다. 갑자기 우리 은하는 우주의 ‘유일한’ 은하에서 무수한 섬 중 하나가 되었다. 더 인상적인 것은 그 섬들이 제각기 아주 빠른 속도로 멀어지고 있다는 우주 팽창을 발견한 것이다. 그런데 이 팽창을 거꾸로 하면 오래 전에는 우주가 아주 작았다는 사실이 된다. 그 유명한 빅뱅(Big Bang) 이론의 탄생이다.
이것은 영혼 없는 물질 공간의 창세기(Genesis)였다. 이제 물질 공간은 그 유일한 지위와 함께 스스로의 창조 이야기까지 갖게 된 것이다. 단연코 공간 개념은 중세의 이원론으로 되돌릴 수 없을 만큼 확고해졌다.
버트하임은 이러한 공간 개념의 변천을 차가운 우주에서 정신이 거주할 공간을 잃어버린 방향감 상실로 묘사한다. 서구의 정신적 위기의 원인을 여기서 찾는 것이다. 그때 기적과 같이 사이버스페이스가 열렸다. 사이버스페이스는 전적으로 새로운 공간이었다. 사람들은 가상공간에서 성별, 피부색, 나이와 계급 등 실세계가 제한하는 모든 것에서의 자유를 만끽했다. 어떤 이는 사이버 영혼의 개념을 제안했고, 또 다른 이는 사이버 영생이 가능할 것이라 말했다. 인간의 정신을 웹에 업로드(upload)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실로 사이버스페이스는 영혼의 새로운 거처가 되는 것 같았다. 천국이 척박한 지상의 삶 너머에 있는 위안이 되는 것처럼, 사이버스페이스는 21세기적 새 예루살렘의 출현으로 보였다.
버트하임 역시 사이버스페이스의 가능성에 주목한 사람이었지만 성급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정체성의 구성이 공간만 제공된다고 즉각적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녀는 가상공간에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자아가 개인의 통제 하에서 자유롭게 변형 가능하다는 사고방식의 결과라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실제적인 자아의 형성은 개인의 유전자, 소속된 문화와 사회, 서사(narrative)로서의 성장과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한다.
다만 버트하임은 우리가 가상공간에 접속할 때 우리 정체성의 일부가 그곳으로 흘러들어가고, 우리는 정신의 새로운 공간에서 ‘동일한’ 자아의 ‘다른’ 측면을 경험하는 ‘가능성’을 가진다고 말한다. 실세계의 공간과 가상공간을 개념적으로는 분리하면서도 실천적으로는 접속자의 정체성을 통해 연결함으로써 가상공간의 자유 이면에 있는 책임에 대한 인식을 촉구하는 것이다.
버트하임이 『공간의 역사』를 출간한 것은 대략 20년 전이다. 사이버스페이스의 태동기 시절이라 할 수 있다. 르네상스 이후 단일 공간만 남은 서구의 역사에서 새로운 공간의 출현을 지켜보면서 그녀는 천국도 지옥도 아닌 가능성을 희망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어떤 공간을 살아가고 있을까?
구글에서 future classroom(미래 교실)이라고 입력하면 다양한 이미지들이 나온다. 이들 상상도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시각화 기술이 도입된 학습 보조 도구이다. 하지만 역시 다수의 이미지가 여전히 1명의 교사와 여러 명의 학생으로 구성된 오래된 ‘공간’ 배치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온전히 사이버스페이스를 거주지로 하는 온라인 교육혁명 MooCs(Massive open online Courses)에서는 새 공간의 가능성이 충만하게 드러나고 있을까? 오프라인 대학을 대체하고 학습할 권리의 무한한 확장을 이룰 것이라 믿었던 MooCs는 이런 저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하버드, MIT, 스탠포드 등의 명문 대학, 스타 교수의 콘텐츠가 인기의 핵심 요인이 되고 있다. 실세계 공간의 질서가 사실상 주소지만 바꾼 셈이다. 물론 1년에 1억 가까운 유학비가 드는 서양 명문 대학의 최고 수준 강의를 무료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이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MooCs는 가상공간이라는 새 공간 개념에 어울리는 새 질서를 만든 것은 아니다.
그 밖의 일상은 어떤가? IoT로 불리는 초연결 현상은 가상공간과 실세계를 연결한다. 그것은 실세계의 인간에 대한 빅데이터 확보를 가능하게 한다. 이렇게 확보된 데이터는 향상된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거쳐 행동에 대한 예측을 생산해낸다. 온라인 쇼핑에서의 추천 알고리즘이 단적인 예이다. 계산 가능한 것은 예측 가능하다. 그리고 예측 가능한 것은 통제 가능하다. 미래의 공간에서 근대적 통제의 사고체계를 발견하는 순간이다.
비록 기술이 사이버스페이스라는 새 공간을 창조했고, 많은 이들이 그것이 가져올 해방의 가능성을 설파했지만, 새 공간에 걸 맞는 새 ‘개념’과 ‘규약’을 갖지 못한다면, 새 공간은 실세계의 효율적인 연장(extension)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르네상스 이후 몇 세기 만에 맞이한 가능성의 새 공간이 겨우 20여년 만에 식상한 기존 공간이 되어버릴 위기에 놓여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제는 영토의 확장이 아니라, 그곳(space)에 무엇이 존재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할 때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존재론의 요청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의 공간 개념의 산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