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보다 조금 늦은 시간에 일어나 씻고 기도를 했다. 하루의 시작을 마땅히 성경으로 시작해야 할 것 같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도 '그냥 책'이 읽고 싶어졌다. 얼마 전 사둔 책이 한 권 있었다. 교회의 어떤 동생에게 주고 싶은 마음에, 그저 표지만 보고 산 책이었다. 하지만 편지 한 장 써서 함께 주고 싶은 마음에, 책의 내용이라도 알아야 뭐라도 쓰지 싶은 생각을 하던 차였다.
그래서 그 책을 펼쳤다.
<모지스 할머니, 평범한 삶의 행복을 그리다>
책을 읽으면서,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을 보면서 최근에 유행한 '미니멀 라이프'가 생각이 났다. 일전에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한다면서 어떻게 하면 물건을 줄일 수 있을까 골몰하고 있는 아내에게 "그렇게 애써 물건을 줄이려는 태도가 미니멀하지 않은거 아니냐?"고 핀잔을 준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는 것은 소박하고 단순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소박함과 단순함을 추구하는 이유는 그 속에서 자신을 찾고 싶어서일 것이다. 달리 말하면 번잡한 삶 속에서 자기를 잃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 소유하고 소비하는 것에서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소비적 삶, 도시적 삶이 자신의 삶의 전부가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미니멀 라이프와 관련한 책들은 표지부터 'Simple'하다. 하지만 오늘 내가 읽은 책은 표지부터 다채롭기 그지 없다. 표지 뿐 아니라 모지스 할머니가 그린 그림은 대부분 캔버스를 가득 채운 풍경과 사람들로 빈틈이 없다. 하지만 단 한 점의 그림에서도 숨막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상하리만큼 소박하고 담백하다.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소박함은 무엇일까? 그것은 주변을 말끔하게 정리하는 단순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모든 장면과 순간을 수용하는 태도에 있는 것 같다. 그녀의 그림은 특정한 무언가를 강조하지 않는다. 거의 모든 그림이 마을 전체, 인물 모두를 담고 있다. 그건 욕심이 아니다. 마을 풍경 하나 하나, 인물들 하나 하나를 꼭꼭 그림 속에 담아주고 싶은 따뜻한 시선이다.
오래 전 처음 사진을 찍겠다고 하던 때가 생각이 났다. 대개들 그렇듯 나 역시 주변 배경을 날리고, 강조하고 싶은 피사체만 또렷히 남기는 아웃포커싱(Out-focusing)이 매력적으로 보였다. 한동안 내 사진기의 조리개 값은 4를 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사진을 찍고 나니 너무 작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찍고 싶은 피사체와 인물이 풍경과 맺고 있는 관계도 소중할텐데, 그런 관계들을 뚝뚝 끊어버리고 그저 인물 하나만 덩그러니 남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는 - 비록 나는 구도에 대한 감각이 없어서 실제로 그런 사진을 찍지는 못했지만 - 모든 오브제가 빼곡히 들어차 있는 가운데서도 애정이 담긴 대상을 읽어낼 수 있는 사진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은 그렇게 대상 전체에 대한 애정을 느끼게 한다. '나'라는 사람의 시선의 '목적성'을 드러내기 위해 풍경에 '개입'하기 보다는 주어진 풍경 전체에 대한 '애정'으로, 받아들임으로 구석 구석 부지런히 화폭에 옮긴 따뜻한 마음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그녀의 그림은 다채로운 색과 빼곡한 오브제들 속에서도 전혀 답답하거나 번잡하지 않다.
삶에서 목적이 중요하지 않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너무 강하게 드러나는 목적성은 종종 미래만을 가치 있게 바라보게 한다. 그래서 현재는 빛을 잃고, 소소한 것들은 묻혀진다. 나는 왜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편안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이 책을 읽고,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들을 보고, 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다. 나는 언제나 내 속에 있는 것을 표현하기 바빴다. 온 몸으로 아우라를 뿜어내기 바빴다. 그건 타인에게는 조금 숨막히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모지스 할머니는 그녀의 기억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표현은 드러냄이다. 하지만 그녀의 드러냄은 타인을 숨막히게 하지 않았다. 왜일까? 그건 그녀의 드러냄 이전에 수용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사람 곁에서는 나의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무시되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과 따뜻한 시선이 먼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한 번 사랑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너'에게 있는 것임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