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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ph Park Jul 16. 2017

희년선포

Your kingdom come

예수께서 갈릴리로 돌아오셨다.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40일동안 악마의 시험을 받으셨다. 광야로부터 돌아오신 예수님은 유대사람들이 모이는 회당에서 두루마리 성경을 가르치셨다.(눅 4:15) 안식일에 고향인 나사렛에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회당 관리자로부터 이사야 두루마리 성경을 건네받아 펴시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희년 선포를 하신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눅 4: 18 ~ 19)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회당에서 희년을 선포한 예수님에게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예수님은 예언자들이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했다고 말씀하시면서 엘리야와 엘리사를 예로 드신다. 예수님의 희년 선포를 듣고 감탄하는 사람들도 있었고(눅 4:22), 잔뜩 화를내며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도 있었다(눅 4:28 ~ 29). 희년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정의로운 하나님 나라를 만드시기 위해 50년마다 사회 경제체제를 되돌려 놓는(Reset law) 유대인들이 꼭 지켜야 하는 경제법이였지만 수세기동안 유대인들은 이 율법을 지키지 않아 예수님 당시 유대땅은 빈익빈 부익부가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99%와 1%로 금수저와 흙수저로 불평등 사회가 팽배한 현재 대한민국 사회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당시 유대사회를 이해하면 왜 예수님께서 유대회당에서 희년을 선포하셨고 복음은 영적인 구원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경제적, 육체적, 정서적 등)의 구원과도 깊게 연결되었음을 알수 있다. 왜 예수님은 고향땅인 나사렛 유대회당에서 다른말씀도 아닌 희년을 선포하는 메세지로 첫 사역을 시작하셨을까? 성령 충만하여 고향으로 돌아오신 예수님이 이땅(earth)에 오신 이유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오셨다는 메세지를 선포하셨는데, 그당시 갈릴리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기쁜 소식은 어떤 소식이였을까? 포로된자, 눈먼사람, 억눌린 사람들에게 은혜의해 즉 50년마다 이스라엘이 대안식년을 선포하던 나팔소리가 당시 사람들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왜 헤롯왕이나, 대제사장, 바리세인 등 기득권자들은 예수님을 죽이지못해 안달이 났을까? 예수님 시대 갈릴리 역사를 들여다 보면서 희년선포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갈릴리지방의 생활환경


갈릴리지도


갈릴리는 그 지리적 조건(토양)과 기후조건(기온과 강우량)에 비추어 볼 때 팔레스틴에서 가장 비옥하여 풍부한 농작물을 산출했다.


갈릴리 호수 북서쪽에 있는 겐네사르 평원은 토양이 아주 기름지기 때문에 모든 식물들이 자랄 수 있어 지역 주민들은 가능한 모든 종류의 식물을 심었다. 뛰어난 기후는 다양한 종류의 농산물이 자라는 것을 촉진시켰다. 더운 기후 에서만 자라는 야자수들과 마찬가지로 대체로 서늘함이 필요한 호두 나무도 그곳에서 대단위로 자랐다. 온화한 자연에 더 적당한 무화과 나무와 올리브 나무도 그 곁에서 자랐다. 갈릴리의 토양은 포도와 무화과를 열달 내내 쉬지 않고 달리게 하며 다른 과실들도 1년 내내 열매를 맺었다. 게다가 풍부한 샘으로 인해 관개수도 넉넉했다. 실제로 겐네사르 평원은 갈릴리 지방에서 가장 비옥하고 기후 조건이 좋은 지역이지만 그 지역은 그렇게 넓지 않다.


갈릴리 전지역이 겐네사르 평원과 같은 좋은 조건이라 할 수는 없으나 갈릴리 전역에 걸쳐서 가장 중요한 산물인 밀과 올리브, 포도 및 무화과가 상당히 풍부하게 생산되었다


하부 갈릴리 지방(Lower Galilee)의 요단강 서편 여러 평야는 가장 유명한 곡창지대였다. 이곳에서 생산된 밀은 이웃의 두로와 시돈에 공급되는 주요 수출품이었다.

올리브 나무는 자생력이 강해 팔레스틴 어느 곳에서나 잘 자라지만 구약성서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일찍부터 갈릴리 지방은 올리브 기름으로 이름이 났다.


상부 갈릴리 지방(Upper Glalilee)의 풍부한 올리브 산지에서 기샬라의 요한(John of Gisela)이 올리브유를 독점적으로 매집하여 장사하므로 막대한 돈을 벌었다.


또한 남부의 세포리스(Sepphoris)와 메론(Meron)및 테코아(Thekoa)도 올리브 나무숲으로 유명했다. 올리브 기름은 높은 칼로리를 공급하는 식품일뿐만 아니라 몸을 치장하는 화장품으로, 상처에 바르는 약품으로, 더 나아가 등불을 밝히는 연료로서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물품 중 하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올리브 나무의 목재는 가구를 만드는데 중요한 재료가 되므로 갈릴리 주민들의 경제에 크게 기여했음을 넉넉히 짐작해볼 수 있다.

갈릴리의 평야 지역이 밀과 보리 경작에 사용되었다면 구릉지와 산악지대는 가능한 한 포도 생산을 위해 활용되었던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갈릴리뿐 아니라 지중해 세계의 주민들의 기본적 양식으로 빵과 기름과 함께 포도주를 빼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갈릴리의 경사진 산비탈들은 포도를 경작하기에 이상적인 조건을 갖추었으나 적절한 물을 댈 수 없음이 큰 약점이었다. 적합한 조건을 갖춘 대단위 포도농장들은 대지주들이 경영하였으며 대다수의 소농들은 조그만 농지에다 과수원을 만들거나 다른 농산물을 경작하면서 그 일부에다 포도나무를 재배해야 했다.


우기인 겨울에 예상보다 비가 많이 오지 않을 경우 그 다음해 봄에 충분한 추수를 기대하기 어려우며 혹은 마태복음 7장 24절 ~ 27절에 나오는 것 같이 큰 비가 내리면 농작물이 많은 피해를 입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갈릴리의 농민 역시 그들의 생계를 적절한 햇빛과 바람과 비를 베풀어 주는 하늘의 은총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한편 갈릴리 지방은 겐네사렛(Gennesareth)호수라는 독특한 수입원을 갖고 있었는데 맛과 생김새가 다른 많은 종류의 물고기들이었다. 그 가운데는 베드로 고기로 알려진 독특한 물고기도 있는데, 그 물고기는 알과 새끼를 입에 넣고 다녀 입에서 나간 새끼가 위험에 처하면 즉시 입으로 받아들인다고 한다. 갈릴리 호수(겐네사렛 호수 혹은 긴네렛 호수, 티베리아 바다라고도 불림)에는 물고기가 풍부하여 그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그들 중 상당수는 어부와 생선 장사들로 이루어졌다. 갈릴리 호수의 동편 가를 따라 자리잡은 가버나움과 겐네사렛 그리고 큰 규모의 도시들인 막달라와 티베리아는 주로 어업에 의존하는 생활을 이루었다고 본다.


그 중에 막달라는 수산업의 중심지였는데, 막달 혹은 막달 누나이야 라는 유대인들의 말은 물고기의 탑을 뜻하는 의미를 가졌으며, 헬라인들은 이곳을 타리코스(즉 소금에 절인 생선 이라는 말에서 유래된 타리케아)라고 불렀다.타리케아 호수에서 나온 생선은 그곳 자체의 공장에서 손질되어 소금에 저려지는데 뛰어난 요리로 쓰인다.


갈릴리 호수에서 어업을 하는 일은 배와 그물 같은 장비를 갖추는데 상당히 많은 비용을 요하는 일로 여러 사람이 협력하여 하거나 한 가족이 연합하여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예를 베드로와 야고보 형제 또는 요한과 안드레 형제 및 그들의 아버지 세베대의 경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갈릴리에서의 어업은 상당한 수입을 가져다주는 일이었다고 생각되나 다른 사람에게 어부로 고용된 경우에는 일일 노동자에 준하는 임금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갈릴리에서 또 다른 생계수단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수공업이다. 건축업과 아마포 직조업, 도기업, 유리 제조업이 중요한 수공업에 속했는데, 특히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가 세포리스를 재건립하고 테베리아(Tiberias)를 건설하던 주전 2년에서 주후 20년 경에 이르는 기간에는 건축업이 성황을 이루었다. 거기에는 지상 건축과 지하 건축업자, 석공과 목공, 철공과 구덩이 파는 자, 우물 파는 자들이 참여했다. 그러나 수공업자들은 한정된 범위에서 일시적인 일을 했던 까닭에 그 숫자는 농부나 어부에 비해 훨씬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 갈릴리는 그 풍부한 산물과 동부 지중해 세계의 동서남북을 연결하는 무역로의 중심에 있어 상업 활동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었다. 그러나 당시의 무역은 대체로 지방통치자들에 의해 관장되는 대규모 무역일뿐 아니라 그것은 자유 무역과는 성격이 다른 로마제국 내의 수세(收稅) 및 물자 분배 정책에 의해 이루어지는 공적인 교역의 성격을 가졌다.


따라서 앞에서 예를 든 기샬라의 요한과 같은 특별한 경우들을 제외하고는 개인이 무역업을 수행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에 상업에 종사했던 사람들로는 자신들의 잉여농산물을 다른 물건과 바꾸거나 돈을 받고 판 농부들과 그들이 스스로 만든 생산품을 팔려고 내놓은 농촌의 수공업자들 및 다른 사람의 생산품을 사서 다시 파는 중간 상인들이 있었다. 이들의 장사는 주로 세포리스나 티베리아와 같은 대도시의 장터에서 이루어졌으며 농촌 지역의 주민들은 거의 상업과는 관계 없는 자급자족의 삶의 형태를 이루었다. 그러므로 상업을 생계의 수단으로 삼았던 사람들은 농부나 수공업자들에 비해 훨씬 더 적은 수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로마의 지배와 헤롯 가문의 갈릴리 경영
Hasmonean Kingdom of Israel (140 – 37 BCE)

페르시아 제국과 알렉산더의 동방정복 후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조와 시리아의 헬라 왕국의 지배 아래서 예속민으로 정치, 경제적 억압을 받던 갈릴리 주민들은 마카비 전쟁을 통해 어떤 면에서는 해방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스모니안(Hasmonean) 왕조는 갈릴리 주민들을 강제적으로 유대화 하기는 했으나 그들에게 십일조와 성전세만을 부과하므로 이방 세력의 지배 아래서 강요당했던 중세(重稅)의 짐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유대화 과정을 통해 하스모니안 왕족과 귀족들은 갈릴리의 비옥한 지역에 속하는 광범위한 땅을 차지하므로 갈릴리에서 경제적 세력을 장악하고 갈릴리의 많은 주민들을 그들의 농토에서 일하는 소작농으로 전락시켰다.


따라서 하스모니안 왕조가 붕괴되었을 때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던 주민들은 하스모니안 왕조의 잔존 귀족들을 중심으로 저항운동을 펼쳤지만 그들의 생활 터전을 상실한 소작농들은 환영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한편 하스모니안 왕조를 몰락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한 로마제국의 동방군 총사령관 폼페이(Pompey)는 갈릴리를 장악한 후 해안지대의 막대한 땅을 로마제국의 직할지로 몰수하였으며, 그 결과 갈릴리 주민 들이 경작할 수 있는 토지를 크게 축소시키므로 커다란 경제적 압박을 느끼게 하였다


주전 47년에 그의 아버지 안티파터(Antipater)에 의해 갈릴리의 총독으로 임명된 헤롯은 그에게 저항하는 히스기아(Ezechias)와 그 무리를 무자비하게 진압하였으나 예루살렘 산헤드린의 견책으로 갈릴리에서 철수해야 했다.


주전 40년에 안토니우스(Antonius)와 옥타비아누스(Octavianus)에 의해 유대의 왕으로 임명받은 후에 로마에서 유대로 돌아오는 길에 프톨레마이스에 상륙한 그는 하스모니안 왕조의 귀족인 안티고누스(Antigonus)가 장악하고 있던 갈릴리를 정복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얼마 안되는 예외를 제하고는 곧 온 갈릴리가 그의 편에 섰다 는 요세푸스의 말은 심히 과장된 것이라 할지라도 길릴리에 헤롯을 지지하는 세력이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큰 힘을 들이지 않고 갈릴리를 평정한 헤롯은 자신의 친구 중 하나인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를 그 지역을 통치하는 장군으로 임명하고 사마리아로 이동했다. 그러나 갈릴리 사람들은 다시금 봉기하여 프톨레마이오스를 살해하고 혼란을 야기시켰다. 이에 분노한 헤롯은 갈릴리로 돌아와 그곳을 장악한 후 난폭하게 갈릴리인들을 억눌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 후 헤롯은 유대 지방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갈릴리에 대해서는 시종 억압적인 통치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갈릴리에서 일어난 사건들이나 그 지역에 대한 정보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은 철저하게 억눌려 있었던 상태를 반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 증거로 헤롯이 사망하자 헤롯에 의하여 처형되었던 히스기아의 아들 가말라의 유다(Judah of Gamala, 행 5:37에는 갈릴리 사람 유다로 나옴)가 무리를 모아 봉기하였던 사건을 들 수 있다.

그의 아버지 헤롯 사후 주전 4년에 갈릴리와 요단강 동편 베레아(Perea)를 분봉국으로 받은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는 그 지역에서의 통치권 장악과 더불어 경제적 재건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우선 그의 분봉국의 수도로 하부 갈릴리의 중심부에 위치한 세포리스를 재건하여 새로운 도시로 건설하였다. 이 도시를 중심으로 주변 마을과 비옥한 농토들이 대단위로 개발되었으며 도시 건설에 많은 사람들이 노동자로 참여하여 임금을 받는 혜택을 누렸던 것으로 짐작된다.


세포리스가 건설되자 안티파스는 다시금 겐네사렛 호수가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기로 계획하였다. 공동묘지 위에 도시를 건설함으로 유대인들로부터 혐오의 대상이 되었으나 그는 큰 야심을 가지고 웅장하고 화려한 헬레니즘적 도시를 건설했다. 주후 17- 22년에 걸쳐 이루어진 건설 공사에는 막대한 재원과 노동력이 소요되었는데 그것은 갈릴리 주민에게 중세의 짐을 지우는 동시에 갈릴리의 경제 활동을 활성화 시키는 역할도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헤롯은 이 새로운 수도에 당시 로마 황제의 이름을 따서 티베리아(Tiberias)라 명명함으로 황제의 호감을 얻고자 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도시는 유대인들에게는 별로 호감을 주지 못했다. 공동묘지를 터로 한 그 도시를 기피하는 갈릴리의 유대인들 중 빈민들을 강제로 이주케 하여 도시 주민을 채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도시에는 안티파스와 그의 행정관료 및 군대가 주둔하고 그와 더불어 상당수의 이방인들도 거주했던것으로 보인다. 이 대규모의 도시 주민들은 갈릴리에서 가장 큰 소비 집단을 이루었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기본적인 식량과 생필품은 그 주변의 농촌과 갈릴리 전역으로부터 공급받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데 그러한 생필품에 대해 적정한 가격을 지불함으로 농촌 주민들에게 보상되어진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농촌 주민의 희생 아래 티베리아 같은 도시 주민들이 혜택을 누렸다.


즉 도시로 생산물이 집중되었는데 그 경로는 몇가지가 있었겠으나 크게 두 가지를 든다면 안티파스가 장악한 징세에 의해, 또 하나는 도시에 거주한 대지주들이 거두어들인 토지 임대료를 생각할 수 있다.


헤롯 안티파스가 그의 분봉국을 통치하며 거대한 건설 사업들을 수행하는데는 막대한 재원이 필요했는데 그것을 확보하는 가장 분명한 방법은 그의 통치 아래 있는 주민들로부터 세금을 거두는 일이었다. 따라서 안티파스의 치하에서 갈릴리 주민들이 중세에 시달렸음이 명백한바,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가 시리아와 유대 속주민들이 로마 황제에게 조세를 감면해 줄 것을 청원한 사실을 기록했는데 갈릴리인들 역시 거기에 해당된다고 본다.


세금의 압박으로부터 가장 큰 고통을 당한 것은 조금이라도 자신의 농토를 소유한 소농들이었다. 아무런 소유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세금도 낼 필요가 없었으나 재산 소유자는 납세의 책임을 져야했다. 대부분의 소농들은 중세를 감당하기 어려워 결국은 자신의 토지를 상실하고 다른 사람의 농토를 빌려 경작하는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위기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대토지 소유자들에 의한 부의 편중 현상이었다. 본래 갈릴리의 대토지 소유자들은 하스모니안 왕조 시대 귀족들이었으나 헤롯이 갈릴리를 장악한 후에 그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왕실 영지로 삼거나 그의 측근 퇴역 장교들에게 분배하므로 그들이 새로운 대토지 소유자로서 상류층을 형성했다. 안티파스 때는 그러한 현상이 고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안티파스와 그의 가문이 소유한 막대한 왕실 토지가 형성되었다. 그래서 안티파스와 그의 집안은 그들의 토지로부터 거액의 수익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안티파스는 그러한 재원을 바탕으로 이방인의 도시들을 후원하는데 유명인사로 행세할 수 있었다.


안티파스의 비호 아래 있던 대토지 소유자들은 점점 더 그들의 토지를 확대시켜 나갈 수 있었는데, 한발이나 수해로 작황이 부진할 경우 소농들은 그들의 농토를 잃게되는 반면 대토지 소유자들은 풍부한 자금으로 토지를 손쉽게 증대해 갈 수 있었다. 그 결과 부가 도시에 급속도로 집중하는 것과는 반대로 농촌 주민들은 심각한 빈곤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갈릴리 주민의 계층적 차이의 극대화

한 사회의 계층을 말할 때는 정치적, 교육적, 전통적 신분과 같은 여러 가지 요소들을 고려하는 것이 마땅하나 그 중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경제적 조건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안티파스 치세하의 갈릴리 사회는 상당히 복잡한 구조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이나,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 사회 역시 일반적인 피라미드 모양의 사회 형태에 속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상층부의 부유층과 가운데의 중간층 그리고 맨 아래층의 하층민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당시 갈릴리 사회의 상류층은 대토지 소유자, 대상인, 납세 임차인 즉 세리장 등을 들 수 있으며, 중간층으로는 수공업자, 소상인, 소농, 어부들을 들 수 있고, 하층민에는 소작농, 일일 품꾼, 무직자, 노예, 거지, 병자 등이 속한다. 그런데 그들은 안정된 피라미드 형의 사회구조를 이루지 못하고 중간층이 유동적인 불안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사회를 건실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안정된 중산층이 그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보는데, 고대 세계에서의 중산층이란 개념은 사용하기가 어려웠다. 왜냐면 중간층에 속하는 소규모의 재산을 소유한 사람들은 언제라도 그들의 재산을 잃고 무산자인 하층민으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갈릴리 사회는 소수의 불안한 중간층을 사이에 두고 상류층과 하층민 사이의 계층적 차이가 극대화 되는 현상을 나타냈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 당시 갈릴리 사회에서는 부자들과 가난한 자들로 대비되는 계층적 구분이 뚜렷이 드러났던 것이다.


성경적 토지정의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땅에 임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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