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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아미 Oct 23. 2024

Day24 알베르게가 순례길에 미치는 영향

레온에서 산마르틴까지 25km

Today’s route ★★☆☆☆

레온León → 산마르틴 델 까미노San Martín del Camino 25km




레온에서 하루 더 머물기로 했다. 모처럼 늦잠을 잘 수 있는 아침이었지만 순례자의 루틴이 익숙해진 것인지 아침 일찍 저절로 눈이 뜨였다. 다들 한참 자고 있어 주변 산책을 하러 혼자 길을 나섰다. 숙소가 시내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편이 아니라 조금 걸으니 금세 레온대성당에 닿았다. 유럽에서 성당, 교회는 발에 채일만큼 흔한 것이지만 소위 ‘대성당’이라 이름 붙인 큰 성당들은 아무리 봐도 대단했다. 당대 최고의 기술과 예술의 집합체인 건축물인 데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거점이 되기 때문이다. 순례자들이라면 거점 도시의 대성당에 반드시 들러 예배를 드리고 스탬프를 받게 된다. 



레온대성당은 입장료가 7유로로 꽤나 비쌌다. 불과 몇 주 전 파리 여행할 때 입장료 20유로를 아무렇지 않게 쓰던 내가 고작 7유로를 비싸게 느낀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관광객 마인드와 순례자 마인드는 천양지차다. 오전에는 바깥 풍경만 감상하고 시내 구경을 했다. 맨날 비바람 맞으며 대자연 속을 걷다가 오랜만에 옷가게며 소품가게며 도시 문물을 영접하니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재미있는 건 조금 걷다 보면 자꾸만 아는 사람을 마주친다는 것이었다. 아는 사람이라 봤자 순례길에서 비슷한 속도로 걸으며 바나 숙소에서 인사를 나눈 적 있는 다른 순례자들이다. 우리처럼 다들 레온에서 하루쯤은 쉬어가는 모양이었다. 하긴 이렇게 멋진 도시에서 걸음을 재촉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나중에라도 다시 오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레온이 마음에 드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인심 좋은 카페 문화다. 혼자 카페에 들어가 가장 저렴한 에스프레소 한잔을 시켰는데(1.8€) 꽤 두툼하고 촉촉한 카스텔라 하나를 같이 내어주는 게 아닌가. 엊그제부터 커피를 마실 때마다 서비스 디저트를 주는 곳이 늘었다고 느끼긴 했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에서는 술 한 잔에 공짜 안주 하나(타파스)를 내어주는 문화가 있는데 이쪽 레온주에서는 커피나 차 한 잔을 시키면 공짜 디저트를 내어주는 문화가 있는 모양이었다.



스페인은 풍요로운 땅인 만큼 먹는 인심이 참 후하다. 와인이 많이 생산되는 지방에선 공짜 와인이 수도꼭지에서 콸콸 쏟아져 나오고, 밀밭으로 가득한 지역에서는 빵 인심이 후하다. 한 바구니 가득 식전빵이 나오기도 하고, 리필도 무한대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딱 맞다. 갈리시아 지방이 가까워지니 밀 농사 지방에서 벗어난 건지, 식전빵에 돈을 받기 시작했다. 대신 뽈뽀 등 해산물 요리가 점점 많아진다. 워낙 먼 거리를 횡단하는 여행을 하다 보니 이러한 식문화를 피부에 느껴지게 체험하게 되는 것도 참 재미있는 부분이다. 




레온에서는 그렇게 나름 바쁜 하루를 보냈다. 오후에는 현석 씨를 만나 함께 점심을 먹기로 했다. 부르고스에서 만난 이후 약 일주일 만인가. 형우와 민지는 처음이었지만 또 금세 가까워졌다. 하루쯤 더 앞서 걷던 현석 씨는 이때부터 우리와 속도를 맞추게 된다. 11.9유로짜리 메뉴델디아를 파는 중식당에 가서는 내가 모두에게 점심을 샀다. 다 같이 시내를 돌아다니며 쇼핑도 하고, 명소에서 재밌는 사진도 찍었다. 현석 씨가 카페에서 추로스도 사줬다. 또 다른 외국인 순례자들을 만나 왁자지껄 인사하고 사진 찍고 레온대성당에 입장료 내고 들어가 관람도 하고……. 이 날따라 날씨는 또 어쩜 그리 좋던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참 평화롭고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되돌아보니 이때가 맑고 화창한 날씨를 만끽했던 거의 마지막 시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걷는 것도 중요하지만 중간에 가끔 이렇게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냈던 추억이 순례길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던 것 같다. 







다음 날 아침. 출발을 해야 하는데 안 좋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 도저히 걸을 수가 없어.” 

이번에는 라나의 다리가 문제였다. 전날 쉬지 않고 시내 여기저기를 하도 돌아다녀서 그런지, 고질병이었던 무릎 통증이 더 심해진 것이다. 누구보다 걸어서 완주하겠다는 의지가 강한 친구였기 때문에 더욱 속상해했다. 하지만 때론 포기하는 데도 용기가 필요한 법. 레온은 큰 도시라 약국도 있고 병원도 있으니 며칠 머물면서 낫는지 지켜보던가 버스로 점프하는 것도 고려해 보기로 했다. 이번에는 형우가 라나 곁에 남겠다고 했고 민지는 계속 걷고 싶다고 했다.

“그래 당분간 둘씩 나눠서 걷자. 어차피 길은 하나니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민지와 나는 형우와 라나에게 잠시 작별을 고하고 정비를 마친 후 길을 나섰다. 

다행히 날씨도 좋고, 컨디션도 나쁘지 않았다. 아침 일찍 레온을 먼저 떠난 현석 씨는 이날 산마르틴 델 까미노라는 작은 마을까지 간다고 해서 우리도 일단 그곳을 목표로 25킬로를 걷기로 했다. 치기공사 출신인 민지는 무뚝뚝하고 말이 없지만 속정이 깊고 은근히 웃긴 스타일이었다. 걷는 걸 그리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고, 여행을 즐기는 것 같지도 않은데 이 힘든 여행을 선택한 게 좀 의아하긴 했다. 순례길에서 “왜 걷느냐”는 사실 본질적이고 어려운 질문인데, 민지는 아주 단순무식하게 대답했다. “안 걸으면 어쩔 거야. 울 거야?” 툭툭 내뱉는 한 마디가 아주 촌철살인이었다. 


중간에 바에 들러서 보카디요(스페인식 바게트 샌드위치)와 커피를 마셨다. 보카디요는 보통 너무 크고 입천장이 다 까질 정도로 딱딱해서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여기서 먹은 건 정말 맛있었다. 숯불에 살짝 빵을 구워서 주는 곳이었다. 이후로도 두 번 정도 더 쉬며 쉬엄쉬엄 걷다가 오후 2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 산마르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숙소에 들어서니 입구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현석 씨가 앉아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이렇게 불쾌한 알베르게는 처음이네.”

옆의 식당과 알베르게를 같이 운영하는 라틴계 여성이 주인이었는데, 영어를 전혀 못해서 소통이 안 되는 데다 거스름돈이 없다며 배 째라 식으로 나왔다는 것이었다. 결국 동전을 탈탈 털어 지불했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가 체크인할 때도 친절한 안내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고작 8유로에 불과했지만, 이건 돈의 문제도 언어의 문제도 아니었다. 도미토리는 어두침침하고 습했다. 침대와 매트리스는 어찌나 낡았는지 흡사 수용소 같았다. 화장실 상태는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수십 킬로를 걷고 드디어 하루의 안식처에 도착했는데 그곳이 편히 쉴 수 없는 곳이라면 그 실망감을 어찌 표현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우리가 늦게 도착한 바람에 아주 애매한 위치의 2층 침대밖에 남지 않았다. 내 표정이 구겨진 걸 보고 현석 씨는 본인이 먼저 맡은 1층 칸을 내게 양보해 주었다. 말로는 “아니에요. 현석 씨도 힘들 텐데…….”하고 사양했지만 내 몸은 이미 1층을 향하고 있었다. 이 아픈 발을 해가지고 저 흔들거리는 철제 사다리를 타고 2층을 오르내릴 자신이 없었기에 그저 고맙게 호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다행히 바깥 날씨는 화창하고 볕도 좋아서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야외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샤워를 마친 우리는 배가 고팠으나 이놈의 동네에는 저 불친절한 주인장이 운영하는 바 외에는 밥 먹을 데도 없었다. 슈퍼 하나가 있길래 거기서 과일과 주전부리를 사서 야외 테이블에 펼쳐놓고 대책회의를 나눴다. 

“순례길에서 알베르게가 차지하는 비중이 확실히 큰 것 같아요. 뭐랄까. 삶의 질 하고도 연결된다고 할까요.”

“맞아. 우울한 알베르게에 묵으니까 기분까지 우울해지네.”

“시설은 둘째치고 적어도 후기가 좋은 곳으로 찾아가야겠어요.”

“먼저 간 친구가 여기 추천해 주던데 어때요?”

현석 씨가 보여준 알베르게 사진에 민지도 나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멋진 저녁놀을 배경으로 세련되어 보이는 하얀 대형텐트가 몇 개 있었는데, 마치 글램핑장 같기도 하고 어디 몽골 대평원의 게르 같기도 했다. 

“와. 죽인다. 내일 여기 갑시다!”

“문제는 38km야. 우리가 걸을 수 있을까?”


한 번도 도전해 본 적 없는 장거리였다. 프로미스타를 건너뛰고 충동적으로 걸었을 때 거의 그 정도 거리였지만 중간에 5km는 배로 이동했으니…….


“한번 해보죠. 뭐.”

“짐만 없으면 해 볼 만할 거 같지 않아요?”

“오케이. 그럼 내일은 동키로 짐 보내고 가벼운 몸으로 한 번 도전해 볼까?”


우울한 알베르게를 보고 침체되어 있던 기분이 내일의 환상적인 알베르게를 기대하며 확 바뀌었다. 힘들기야 하겠지만 못할 것도 없지. 이 거지 같은 숙소를 벗어날 수 있다면, 하루 40킬로도 걸을 수 있어. 태어나서 그 정도 거리를 걷는 건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일이었지만, 나는 생각해 본 적 없었던 내일 하루가 기대되기 시작했다. 




오늘의 알베르게

Albergue de peregrinos de San Martín del Camino ★☆☆☆☆

1박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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