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의 안부

필리핀, 보홀 알로나 비치

by 홍아미

트래블 매거진 #아미가

세 번째 시리즈 [바닷마을 다이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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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연

뭍보다 물이 편한 바다형 인간.


여름 풍경 하면 해운대 백사장에 알록달록 늘어선 파라솔이 떠오른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20년간 매년 여름 친구 혹은 가족들과 해수욕장에 갔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바다에 갔다. 봄엔 비밀로 사귀던 남자친구와 동백섬에서 벚꽃비를 맞았고, 가을엔 반 친구들과 부산국제영화제 레드카펫을 보고 밤의 광안리에서 불꽃놀이를 즐겼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조금씩 다른 바다를 보며 또 한 계절을 보낼 힘을 얻었다. 시내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바다로 향하던 그 순간의 설렘. 그 때의 마음으로 바다에 다녀온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1. 섬의 안부


필리핀, 보홀 알로나 비치
Phillipines, Bohol, Alona be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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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휴양지, 하면 모두가 세부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휴양지라 하기엔 세부는 너무 번잡하다. 적어도 도시를 좋아하지 않는 나에겐 그렇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손을 잡아끄는 호객 상인들과 혼을 빼놓는 교통 체증, 번화한 빌딩들과 고층 쇼핑몰, 쓰레기가 떠다니는 해변가와 구걸하는 아이들. 개발된 관광 휴양지의 모습은 어딜 가나 비슷하다. 그럴 땐 그 옆의 작은 섬을 찾아보면 답이 나온다. 보홀 역시 그렇게 발견한 섬이었다.



세부에서 한 시간 정도 배를 타면 닿는 섬. 세부보다는 개발이 덜 되었지만 바다는 훨씬 깨끗하고 조용하다. 5km 남짓한 알로나 비치를 따라 옹기종기 모여 있는 식당과 마사지샵이 번화가의 전부. 그러니 보홀에서 여행자의 일과는 알로나 비치에서 시작하고 끝난다. 좌우로 길게 펼쳐진 알로나 비치를 따라 맛집과 각종 액티비티샵이 일렬로 촘촘하게 늘어서 있다. 그러니까, 너무 쨍해서 눈이 시릴 정도인 민트색 바다를 바라보며 늦은 아침을 먹으며 멍을 때리다가, 그 옆집에서 스노클링 등의 액티비티를 하고선 스노클링 집 옆옆 식당에서 모래 위에 세워둔 테이블에 앉아 ‘해변가 해산물 바비큐’를 즐기면 되는 것이다. 해변의 끝에서 끝까지 걸어서 20분이면 되니 도착한지 이틀 만에 몇몇 가게 사람들과는 눈인사를 주고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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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잠들기 아쉬워 아무 바에 들른 밤이 있었다. 해변 모래사장에 위치한 간판 없는 오픈형 술집이었다. ㄷ자형 테이블을 따라 손님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고 분위기가 달아오르면 취한 외국인들이 테이블에 올라가 춤을 췄다. 춤추는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바텐더에게 눈이 머물렀다. 밀크초콜릿색 피부에 작은 얼굴, 많아봐야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필리핀 여자였다. 익숙하다는 듯 테이블을 정리하면서 리듬에 맞춰 몸을 살짝살짝 움직였다. 밖이 아닌 몸 안에서 리듬이 나오는듯 자연스러웠다. 탄력 있는 그 몸짓이 너무 예뻐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이름은 제니라 했다. 활달하고 흥이 많은 그녀와 나는 금세 친해졌다. 제니가 일하는 바는 사이리 비치 초입에 있어서 어딜 가든 그곳을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바 앞을 지날 때마다 제니가 있으면 수다를 떨고, “나중에 봐!”하며 헤어지는 날들이 이어졌다. 떠나기 전날 밤, 제니에게 인사를 하러 그 바에 다시 갔다. 제니는 12월이 성수기라 훨씬 더 재밌다며 다시 오라고 했다. 나는 그때 보자며 손가락을 걸었다.



아마 그녀는 그 약속은 물론 내 얼굴도 잊었을 것이다. 매일 밤 밀물처럼 몰려든 전세계의 여행자들이 파티를 벌이고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곳이니까. 그럼에도 가끔은 조급한 마음이 되기도 한다. 혹여나 12월에 오기로 한 나를 기다린다면? 연락처도 주고받지 않았으니 속절없이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럴 때면,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술집이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모든 걸 팽개치고 당장이라도 보홀로 달려가고 싶어지는 것이다.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현실에 발이 묶인 채 보홀에서의 기억을 떠올린다. 제니는 여전히 아름다운 춤을 추며 밤의 주인공 자리를 즐기고 있을지, 내가 좋아하던 스파게티 집과 자꾸만 발에 모래가 달라붙던 해변가 레스토랑은 그대로일지. 떠나온 곳의 안부가 궁금해질 때면 반짝, 하며 잠깐이나마 그곳과 연결되어 있는 기분이 든다. 먼 섬에서 나에게 어떻게 지내냐는 안부를 물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때도 있다. 언젠가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는 건 이상한 용기를 준다. 언제까지고 현실에 묻혀 있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어쩌면 나는 기대하는 삶을 위해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안부 인사처럼 남기는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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