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다는 점에서 인생과 닮아있다. 아무리 1분 1초 단위까지 꼼꼼하게 계획을 세운다 한들 조그만 변수에도 예상과는 다른 길로 접어들고 만다. 교환학생으로서 프랑스 파리로 떠나는 일이 결정됐을 때 나에겐 ‘파리’라는 로망보다는 나 홀로 첫 해외 생활을 잘 견뎌야겠다는 각오가 더 컸다. 외국어를 익히기 위해 한국인과는 멀리하겠다는 유치한 다짐도 함께였다. 그리고 앞으로 등장할 두 명의 친구를 만나기 전까지는 나 자신이 꽤나 계획 지향적인 사람이라고 단단히 착각했다.
KH와 YJ는 같은 시기에 같은 학교로 떠나게 된 교환학생 동기다. 멀리 떠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려면 준비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는데, 교내 커뮤니티는 유용한 정보를 마구 수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창구였다. 이미 내가 갈 학교에 다녀온 선배들이 온라인상에 남겨 놓은 조언과 팁은 그야말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서는 한계가 있었기에 우리는 자연스레 몇 번의 모임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워낙에 마음의 문을 열고 편해지기까지 오래 걸리는 성격에, 당시에는 그 둘과 상관없이 치기 어린 마음가짐을 지닌 상태였기 때문에 어색하게 굴며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앞으로의 전개는 전혀 짐작하지 못한 채 프랑스로 떠나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나와 YJ, 그리고 YJ의 고교 동창이 같은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유난히 더디 흐르는 듯한 지루한 시간 끝에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했다. 뭔지 모를 항공사의 사정으로 비행기가 늦게 출발해 예정보다 조금 늦은 시각이었다. 내리자마자 아차 싶었다. 나름 철저하게 준비를 한다고, 도착 시각에 맞춰 숙소까지 나를 안전하고 편하게 데려다 줄 개인 리무진을 예약해 놓았던 것이다.
바깥은 이미 어두워진 데다 비까지 내리고, 프랑스어는 제대로 할 줄 모르고, 난감한 상황이었다. 말 그대로 ‘첫발’을 내딛자마자 진흙탕에 빠진 꼴이었다. 원대한 계획이 이렇게 쉽게 틀어질 줄은 전혀 몰랐다. 사색이 된 내 얼굴을 보고 두 친구는 리무진이 왔는지 확인할 때까지 기다려주겠다고 했다. 현지에서 쓸 핸드폰도 없던 때라 공중전화로 달려가 리무진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나는 영어, 상대방은 프랑스어로 얘기하니 소통이 될 리 없었다. 어쨌든 그쪽의 결론은 ‘리무진이 너를 하염없이 기다리다 결국엔 떠나버렸고, 네가 늦었으니 전적으로 네 잘못이라는’ 것이었다. 돈은 사전에 모두 낸 상태였다.
허탈한 마음이 분노로 바뀌었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두 친구는 자초지종을 듣더니 우리 차를 같이 타고 가자고 흔쾌히 손을 내밀어 주었다. 절대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지만, 도리가 없었다. 덕분에 밤늦게 숙소에 무사히 도착했고, 그제야 안심이 됐는지 두 뺨 위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낯선 방에서 짐도 풀지 않은 채 한동안 펑펑 울었다.
그날 이후 나의 모든 계획과 마음가짐은 자연스레 수정되었다. 모든 것이 처음이기만 한 곳에서 같은 ‘한국 사람’은 존재만으로도 엄청나게 힘이 되었다. 게다가 KH와 YJ는 그중에서도 잘 맞는, 좋은 사람들이었다. 나는 언제부턴가 KH와 YJ가 함께 사는 집에 거의 매일 같이 드나들며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비슷했고, 비슷하지만 달랐다. 어떤 영화에서 ‘삼각형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도형’이라는 대사를 들은 적이 있는데, 우리 셋을 보면 정말 그런 것만 같았다. 우리는 각자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주며 부족한 점은 보완해주는 사이로 지금까지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연을 끈끈하게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한 건 바로 음식이었다. 역시 먹는 정은 무시할 수 없었다. 다행히도(?) 우리는 모두 먹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먹방’이 유행하기도 한참 전에 요리 영상을 즐겨 봤으며, 요리도 곧잘 했다. 프랑스는 대부분의 식재료를 자체적으로 수급하는 ‘미식의 나라’이기에 신선한 식재료도 지천이었다. 지금은 한국에서도 해외 식재료가 많이 들어왔지만, 당시에는 집 앞 마트에만 가도 처음 보는 것이 많았다. 요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스타 셰프인 제이미 올리버는 우리의 비공식 ‘랜선 요리 선생님’이었다. 훈훈한 그가 능숙하게 요리하는 모습, 그리고 당장 모니터에서 꺼내 먹고 싶은 먹음직스러운 결과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곤 했다.
우리가 함께 먹은 음식 중 유독 기억에 남는 것은 제이미 올리버의 레시피에 따라 KH가 요리해준 레몬 링귀니다. KH는 유독 양식에 강세를 보였는데, 레시피를 그대로 따라하기만 하면 된다면서 어느 날 해준 이 파스타는 낯설면서도 강렬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레시피를 응용해 버섯을 넣었다. 납작한 링귀니 면은 레몬과 치즈를 넣은 소스의 산미를 흠뻑 머금고 있었고, 버섯이 말캉한 식감을 더했다. 나는 그날 레몬, 치즈, 버섯의 맛에 비로소 눈을 떴다. 그리고 제이미 올리버를 신봉하며 요리 영상에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 요즘은 바쁜 일상에 치어 전혀 요리할 엄두가 나지 않지만, 그때의 추억으로 나는 깨달았다. 불편한 자리의 진수성찬보다 편안한 자리의 소박한 한 그릇이 더욱 큰 기쁨을 준다는 걸. 이제는 꽤 오래전 일이 된, 두 친구와 보낸 그 시절, 그리고 맛있는 음식들은 지금까지도 나의 원동력이다. 때론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지 자문하지만, 가슴속에 먹고살 추억이 있는 것만으로도 나름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고 자신을 북돋아본다.
제이미 올리버의 레몬 링귀니 레시피
* 출처: https://www.jamieoliver.com/recipes/pasta-recipes/lemon-linguine
재료
링귀니 파스타 500g
레몬 4개(제스트, 레몬즙 포함)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 6ts
파르메산 치즈 가루 125g
소금, 후추 적당량
생바질(다진 것) 한 줌
루콜라 한 줌
냄비에 물을 넉넉히 붓고 끓이다가 소금, 링귀니 면을 함께 넣고 12분간 삶는다. 면이 다 익으면 물을 완전히 따라 버리고, 소스 팬에 옮겨 담는다. 그동안 올리브 오일, 레몬즙, 레몬 제스트, 파마산 치즈를 한데 넣고 걸쭉해질 때까지 젓는다. 크림처럼 되직해지면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하고, 필요하면 레몬즙을 더 넣는다. 이렇게 만든 레몬 소스를 소스 팬에 붓고 면 가닥에 고루 코팅될 수 있도록 휘젓는다. 이때, 파르메산 치즈는 면과 섞이며 서서히 녹는다. 소스와 면이 잘 섞인 파스타 위에 다진 바질과 루콜라를 올려 마무리한다.
글쓴이 - 양슬아
‘먹고사는 일’에 관심이 많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을 때 가장 행복하다. 반대로 맛없는 걸 먹을 때 유난히 화가 난다. 궁극적으로 매 끼니 주변에서 나는 신선한 재료로 직접 만든 정성스런 요리를 먹는 호사스런 삶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