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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미가 Apr 13. 2018

여행에도 한정판이 있다 2

결국 모든 것은 타이밍

“아이 쿠든트 파인드 라바. 두 유 마인드 이프 아이 테그 어롱”라는 내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형제는 “Let’s Go!”라며 외쳤다. 뒤처지면 민폐를 끼치는 게 되어 버릴까 재빨리 그들을 쫓았다. 울퉁불퉁 지그재그로 된 용암의 흔적을 따라 걷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내딛는 걸음마다 집중하지 않으면 발목을 다치기 일쑤였고 좀처럼 속도를 낼 수도, 그렇다고 뛰어다닐 수도 없다.

머리 위 하얀 구름, 저 멀리 푸른 바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검은빛의 용암 더미. 간간이 보이는 초록 초록한 새 생명만이 그곳을 즐기고 있었다. 그늘 하나 없는 말 그대로 땡볕. 용암 대지는 쉴 새 없이 열을 내뿜는 듯 쉽게 갈증을 불렀다. ‘휘-이익 휘-’ 대지의 소리는 쾌청했다. 기분 좋게 몽글몽글 맺힌 땀방울을 식혔고, 조금이나마 마음을 홀가분하게 해주었다.


불과 몇 분 전 절망적이던 상황과 꽤 많이 달라졌다. 혼자가 아닌 함께 라바를 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내딛는 걸음은 가벼웠고 씩씩했다. 대지에는 용암의 시간이 곳곳에 새겨 있다. 다리가 끊긴 것처럼 흐르다 ‘뚝’하고 끊기기도, 펠레 여신이 꼬불꼬불 파마한 것 같은 모양의 흐름도, 용암의 웨이브라곤 믿기 힘들 만큼 수려한 곡선도, 마냥 새까만 것 같은 용암의 색은 오묘하다 느껴졌다. 뿐만 아니라 그 색은 무척이나 다양했고 가만히 바라보니 보석처럼 반짝였다. 퇴적된 용암층은 갖가지 색으로 신기함을 더했다. 우린 마치 오랜 시간 여행을 함께 한 이들처럼 이색적인 풍경을 함께 찾고 그 모습에 신기해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사진을 찍어주었다. 혼자 내딛기 힘든 상황에선 누가 먼저라고 할 거 없이 손 내밀기도, 뒤처진 이들을 기다려줄지도 알았다. 그러다 라바를 보고 돌아 나오는 이들에게 ‘얼마나 더 가야 하냐’는 정보를 구하며 라바를 향해 전진했다.





얼마쯤 갔을까, 부부 중 부인이 뒤처졌고 곧이어 남편도 포기를 선언했다. ‘그래 힘들 수 있어’ 쉽지 않은 이 길에 그들의 마음을 십 분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남은 우리 셋은 라바를 찾겠다는 일념 아래 걷고 또 걸었다. 쉽사리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라바가 원망스럽긴 했지만, 포기할 순 없었다. 흰 연기라도 보여줘야 어디쯤 있는 줄 눈치라도 챌 텐데 연기마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웨얼 이즈 잇?”라고 물으니 형이 저 멀리 산등성 마루를 가리켰다. ‘오버 데얼 오버 데얼. 룩 앳 더 오버 데얼.”


땅으로 흐르는 라바를 보려면 결국 산등성이까지 들어가야 한다는 이야기 같아 잠깐 좌절도 했지만, 온갖 힘을 미간에 주며 시선을 열심히 움직였다. 그렇게 가느다란 한 줄기가 들어왔다. 콸콸 쏟아지지도, 그렇다고 철철 흐르지도 않았다. ‘진짜 많이 줄었구나!’ 하는 아쉬움과 ‘이렇게라도 보는구나!’ 싶은 마음이 교차했다. 한 시간쯤 걸었을까, 산등성이로 들어가면 갈수록 점점 지쳤고 쉬는 횟수가 더 잦아졌다. 잡으려 해도 손에 잡히지 않는 미지의 영역인 듯했다. 형제도 조금 지쳐 보였다. 온몸이 스케치북 같았던 형이 “아 유 킵 고잉?”이라고 물었다. 여기까지 와서 이 무슨 날벼락같은 소리인가! 나는 한 시도 주저 없이 “예스. 아윌 킵 고잉!”이라 대답했다.


동생은 우리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눈치다. 형제는 대화를 이어갔고 그 대화에 귀 기울였다. 혹시 형제마저 포기하면 난 어떡해야 하나 걱정도 앞섰다. 광활하기 그지없는 그곳엔 우리 셋 말고 보이는 자취라곤 산등성이 위를 맴도는 헬기뿐이다. 동생은 더 가고 싶은 눈치였다. “쏘 타이얼드. 벗 리틀 퐐더” 라며 고민하는 동생의 손에 시선이 멈췄다. 손에 들린 생수병에는 고작 물 몇 모금뿐이었다.




이들을 처음 만났을 때 등에 멘 가방을 보고 나와 같은 곳에서 자전거 렌탈을 했다는 걸 알았다. 그곳에서 준 물 뿐이라면 동생에게 남은 생수는 더 없다. 태양이 가장 높은 자리를 밝히는, 오후 2시를 향해가는 한낮의 더위는 물의 필요성을 더 간절하게 했다. 형제의 대화를 들으며 빛보다 더 빠르게 가방에 있던 물 하나를 꺼내 동생에게 건넸다.


물을 받아도 되는지 잠시 고민하는 동생에게 “헤이. 히얼 더 워터. 아이 헤브 모얼 워터 앤드 유 캔트 드링크 잇 이프 유 원트!”라고 했다. 망설이는 것 같더니 이내 자신의 손에 들고 있던 생수를 단번에 삼키고 건네받은 물을 시원하게 땄다. 마치 대지 사이로 물이 흡수되는 듯 목젖을 타고 내리던 달콤한 물은 그에게 생명수와도 같았고 결국 그를 움직였다. 마지막 힘을 내어 우린 다시 용암 위를 따라나섰다.


삼십 분 정도 더 걸었을까. 매미 소리 요란한 한여름 도심의 아스팔트에서 이글이글 올라오는 열기가 시야에 들어왔다. 설마 설마 하며 보니 기다리던 순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우린 누가 뭐라 할 것 없이 환호를 질렀고 하이파이브를 하며 연신 “어썸”을 외쳤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고요 속 침묵을 지켰고 ‘슝~우웅 흐흐흐’ 하며 부대끼는 바람 소리를 깨고 ‘타닥타닥 탁탁탁~ 쯔으----쯔찌직’ 하며 라바는 그 존재를 드러냈다. 환호하던 우리는 더 이상 무슨 말을 이어야 할 줄 몰랐고 신기하고도 신비한, 낯설고도 놀라운, 신선하면서도 기이한 이 광경에 빠져 헤어 나올 줄 몰랐다. 죤 킹도 그랬을까? 마법 같은 이 홀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을까. 불현듯 그가 떠올랐다.



라바의 열기도, 연기도 견딜만했다. 넋을 놓고 라바의 움직임에 주시하니 그 소리만이 대지를 메우는 것 같다. 그 순간은 하늘 위 헬기도 부럽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나를 더 부러워했을지 모른다. 라바가 흐르는 방향 앞에 쪼그리고 앉아 가만히 보자니 붉은색 라바가 검은빛의 대지를 녹이면서 새롭게 만들어내는 창조적 형태는 세상 어디서든 볼 수 없는, 특급 콜라보네이션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미 단단하게 굳은 바위 위로 라바는 미끄럼틀을 타듯 유려하게 흘러내리고, 다홍빛의 라바는 검은빛의 용암과 만나 오묘한 빛을 내며 땅을 넓혔다.

역시 여행은 타이밍이고 이번 여행에도 행운이 따르는구나! 포기하지 않고 오니 이렇게 자태를 보여주는구나! 펠레 신이 나를 저버리지 않았구나 싶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면서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봐도 봐도 지겹지 않을 이 광경을 바라보다 형제에게 고마움을 표현해야 할 것 같았다. “아임 럭키 걸. 아임 씨 더 라바. 잇츠 올 땡스 투 유얼 브라더”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라바 하이킹을 하고 온 지 2주가 지났을까. 흐르는 양이 많이 줄어 더 이상 투어가 힘들어졌다는 기사를 접했다. 다시 라바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아쉽기도 했지만, 또 언젠가 흘러내릴 것이란 확신에 찬 기대도 해봤다. 빅 아일랜드는 살아 숨 쉬는 자연의 섬이니 말이다. 역시 여행은 타이밍이다. 인생도, 라바도 결국 모든 것에는 타이밍이 있다. 이렇게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져 간 2018년 라바 타이밍, 이 한정판 여행 속엔 Justin과 Taylor 형제가 함께였다.  









글, 사진 | 박성혜

사보를 기획하고 글을 쓴다. 꿈꾸지도 않았던 여행지, 하와이에서 사랑에 빠졌고 하와이 여행을 통해 여행하는 법을 새로 배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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