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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워리살롱 Jul 13. 2018

글 대신 그림으로 쓰는 일기

[상수동 사람들] '나의 작은 소행성' 릴씨


여자는 낯가림이 심했습니다. 한땐 배달음식도 못시켰답니다. 그림을 시작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림은 대게 혼자서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죠. 살갑진 못하지만 그래도 사람을 좋아합니다. 친해지고 싶은데 먼저 말을 못 걸어서 전전긍긍하는 타입. 이곳에 작업실을 차린 지 1년 10개월이나 지나서야 작업실 건물 1층 ‘김씨네 심야식당’ 주인아저씨와 대화를 나눴답니다. 오늘은 서울 상수동에서 그림을 그리는 릴(29·여)씨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서울 상수동 '김씨네 심야식당' 건물 2층에서 그림을 그리는 릴씨.

                 

릴씨는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고, 졸업 후 바로 취업을 했습니다. 일이 다 안 끝났는데 회사는 새로운 일을 맡겼습니다. 그 일을 시작도 못했는데 또 다른 일이 주어졌습니다. 이건 제 업무가 아닙니다, 라고 속으로 말한 뒤 며칠 밤을 회사에서 보냈습니다. 꿈을 잃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생텍쥐페리의 동화 ‘어린왕자’엔 B612라는 이름의 소행성이 등장합니다. 이 별이 세상의 전부였던 어린왕자는 어느날 다른 별로 여행을 떠납니다. 7개의 별을 돌며 왕 허영쟁이 술꾼 사업가 가로등지기 학자 등을 만난 어린왕자는 결국 이들의 삶에 편입되길 거부하고 소행성에 남겨 둔 장미꽃을 찾아 돌아가려합니다.

릴씨도 회사를 그만두고 꿈을 찾아 돌아갑니다. 2014년 10월 이리카페 맞은 편 건물 2층에 작업실을 차렸습니다. 작업실 이름은 ‘나의 작은 소행성’. 소행성은 ‘소곤소곤, 행복, 감성’이란 의미도 있습니다. 최근 작업실에서 만난 릴씨가 소곤댔습니다. 저는 그림 그릴 때가 가장 행복해요.

매일 일기를 씁니다. 가끔 글로 남기기 힘든 감성이 피어오르면 글 대신 그림을 그립니다. 요즘 한창 날씨가 더웠는데, 하루는 바람이 되고 싶었답니다. 이날도 일기를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물을 많이 쓰는 편이랍니다. 그림은 꿈을 꾸는 어린 아이처럼 맑고 투명한 느낌이었습니다.


릴씨가 '바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날 그림으로 그린 일기

                              

그림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그림을 가르칩니다. 레슨을 시작하고 두 달 동안 그림을 배우러 온 학생은 단 한명밖에 없었습니다. 릴씨는 30대 중반의 여성에게 펜과 색연필 쓰는 법을 알려줬고, 소묘부터 콜라주까지 설명했습니다. 마지막 수업을 하는 날 손글씨로 편지를 적어줬습니다. 그림을 배워줘서 너무 고마웠어요. 여성에게 답장이 왔습니다. '너무 감사해요. 덕분에 수채화의 매력에 푹 빠졌어요.' 릴씨는 가끔 이 문자를 꺼내보곤 합니다.


한 50대 여성은 아들과 함께 작업실을 찾았습니다. 중년의 여성에겐 소녀 감성이 남아있었습니다. 혼자 오기 부끄러워서 아들을 데려왔답니다. 어머니는 풀숲을 그렸고, 아들은 장미꽃을 그렸습니다. 모자는 자기들이 그린 그림을 보고 뿌듯해하며 액자에 담아갔습니다. 이 모습이 그렇게 보기 좋았답니다. 자기 그림을 누군가에게 선물로 주고 싶어서, 여행을 떠난 뒤 풍경을 그리고 싶어서, 퇴근 후에 바로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사람들은 저마다 이유를 가지고 팔레트 위에서 물감을 푹 눌러 짰습니다.

                              

릴씨의 작업실 '나의 작은 소행성'의 모습.


‘나의 작은 소행성’에 그림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 중엔 삶이 너무 무료한 것 같다며 깊은 한숨을 쉬는 이들도 많습니다. 각박한 삶에 집중해서 그림을 그려 넣다보면 조금씩 마음이 편안해 진답니다. 그나저나, 꿈이 뭐에요?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을 그리고 싶어요. 글도 제가 쓰고, 그림도 제가 그려넣고 싶어요. ‘어린왕자’의 글과 그림을 모두 스스로 했던 생텍쥐페리처럼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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