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는 결국, 삶을 살아가는 연습이다

by 코난의 서재

"선생님, 솔직히 이거 배워서 어디다 써요?"

지난주, 중3 태민이가 수학 문제집을 덮으며 물었다. 이차방정식. 인수분해. 피타고라스 정리.

"이거 진짜 쓸 일 있어요? 어른들도 안 쓰잖아요."

틀린 말이 아니다. 나도 장 볼 때 이차방정식을 풀지 않는다. 회의할 때 인수분해를 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말이다.

태민이의 질문을 듣고, 나는 오히려 다른 게 궁금해졌다.

"태민아, 그럼 넌 수학 문제 풀 때 뭐가 제일 싫어?"

"음... 모르는 문제 나올 때요. 막히면 짜증나요."

"막히면 어떻게 해?"

"그냥... 답지 봐요. 아니면 넘겨요."

사실, 그게 핵심이었다.

공부가 삶에서 쓸모 있는 이유는 공식을 외워서가 아니다.

막혔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모를 때 어떻게 버틸 것인가. 실패했을 때 어떻게 다시 시작할 것인가.

그걸 연습하는 거다.

대치동에서 25년을 아이들과 보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하나를 깨달았다.

공부 잘하는 아이가 인생을 잘 사는 게 아니다. 공부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배웠느냐가 그 아이의 삶을 결정한다.

초등학교 5학년 유빈이 이야기를 해야겠다.

유빈이는 수학을 싫어했다. 정확히는, 틀리는 걸 싫어했다.

문제를 풀다가 막히면 연필을 꺾듯 던졌다. "나는 수학 머리가 없어요."

엄마는 걱정이 많았다. "선생님, 쟤는 조금만 어려우면 포기해요. 공부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것도 다 그래요."

그렇다. 유빈이의 문제는 수학이 아니었다.

어려움 앞에서 자신을 지키는 법을 몰랐던 거다.

우리는 유빈이와 작은 약속을 했다.

"틀려도 돼. 대신, 틀린 문제 옆에 별표 하나만 그려줘."

별표의 의미는 이랬다. '이건 내가 아직 모르는 거야. 나쁜 게 아니라, 아직인 거야.'

처음엔 별표 투성이였다. 유빈이는 자기 문제집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선생님, 별이 너무 많아요."

"응, 그만큼 배울 게 많은 거지. 근데 유빈아, 저번 주보다 별이 줄었어."

유빈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진짜요?"

"응. 세어볼까?"

6개월이 지났다.

유빈이의 수학 점수가 극적으로 오른 건 아니었다. 하지만 달라진 게 있었다.

문제가 막혀도 연필을 던지지 않았다. "이건 아직이야"라고 중얼거리며 별표를 그렸다.

어느 날, 유빈이 엄마에게서 연락이 왔다.

"선생님, 유빈이가 달라졌어요. 어제 자전거 타다가 넘어졌는데, 예전 같으면 울면서 안 탄다고 했거든요. 근데 어제는 '아직 못 타는 거지, 연습하면 돼'라고 하더라고요."

나는 그 말을 듣고 한참을 생각했다.

유빈이가 배운 건 수학이 아니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법이었다.

고2 준혁이는 또 다른 경우였다.

준혁이는 똑똑했다. 이해도 빠르고, 암기력도 좋았다.

문제는 계획이었다. 시험 2주 전, 거창한 계획표를 세웠다. 하루에 국어 3시간, 수학 4시간, 영어 2시간...

그리고 3일 만에 무너졌다.

"선생님, 저는 왜 계획대로 안 될까요? 의지가 부족한 건가요?"

"준혁아, 그 계획 누가 세웠어?"

"제가요."

"그 계획 세울 때, 어제의 너한테 물어봤어?"

준혁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이렇게 설명했다.

"계획을 세우는 건 '미래의 나'야. 근데 그 계획을 실행하는 건 '현재의 나'거든. 미래의 나는 늘 현재의 나를 과대평가해."

준혁이가 피식 웃었다.

"맞아요. 계획 세울 땐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서 계획을 세울 때, 어제의 나한테 물어봐야 해. '야, 이거 진짜 가능해?' 어제의 나는 현실적으로 대답해줄 거야."

준혁이와 함께 계획을 다시 세웠다.

거창한 목표 대신, 작은 단위로 쪼갰다. "하루 수학 4시간" 대신 "수학 문제 10개, 30분 안에".

그리고 하나 더. 계획을 못 지켰을 때 자책하는 대신, 왜 못 지켰는지 기록하게 했다.

"피곤해서", "친구랑 카톡해서", "유튜브 보다가".

3주 후, 준혁이가 자기 기록을 보며 말했다.

"선생님, 저 유튜브가 문제네요. 10분만 보려다가 1시간씩 봐요."

"그걸 알았으면, 이제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준혁이는 스스로 답을 찾았다. 공부 시간엔 핸드폰을 거실에 두기로 했다.

그 후로 준혁이의 계획 실행률이 올라갔다. 100%는 아니었다. 70% 정도.

하지만 준혁이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예전엔 계획 안 되면 '난 안 돼' 했는데, 이젠 '왜 안 됐지?' 하게 돼요."

그거다.

실패를 끝으로 보지 않고, 데이터로 보는 것.

이건 공부에만 쓰이는 기술이 아니다. 직장에서 프로젝트가 실패했을 때, 관계에서 갈등이 생겼을 때, 인생에서 뜻대로 안 될 때.

그때도 "왜 안 됐지?"라고 물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중1 하은이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하은이는 모범생이었다. 숙제도 잘 해오고, 예습 복습도 꼬박꼬박.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자기 생각이 없었다.

"하은아, 이 문제 어떻게 풀었어?"

"선생님이 알려주신 대로요."

"근데 이 방법 말고 다른 방법도 있거든. 혹시 생각해봤어?"

"아뇨... 알려주신 대로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하은이 엄마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은이는 시키면 다 해요. 착해요."

맞다. 하은이는 착했다. 하지만 나는 걱정이 됐다.

시키는 대로만 하는 아이. 정해진 답만 찾는 아이. 다른 방법을 시도하지 않는 아이.

이 아이가 커서 정해진 답이 없는 문제를 만나면 어떻게 될까?

하은이와 나는 일주일에 한 번, "틀린 답 찾기" 시간을 가졌다.

일부러 틀린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보는 거다. 왜 틀렸는지 분석하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고.

처음엔 하은이가 힘들어했다.

"선생님, 이거 왜 해요? 맞는 답 알면 되잖아요."

"응, 맞는 답 아는 건 중요해. 근데 틀린 답이 왜 틀린지 알면, 맞는 답을 더 깊이 이해하게 돼."

하은이가 반신반의하며 따라했다.

4개월 후, 하은이에게 작은 변화가 생겼다.

수학 문제를 풀다가, 스스로 다른 방법을 시도했다. 틀렸지만, 하은이는 웃었다.

"선생님, 이 방법은 왜 안 되는지 알 것 같아요."

그 순간이었다. 하은이가 처음으로 자기 머리로 생각하기 시작한 순간.

공부는 정말 삶의 축소판이다.

모르는 문제를 만났을 때 — 인생에서 막막한 상황을 만났을 때 시험을 망쳤을 때 — 중요한 일을 실패했을 때 계획이 무너졌을 때 — 삶이 뜻대로 안 될 때 시키는 대로만 했을 때 — 자기 선택 없이 살았을 때

아이들은 공부를 통해 이 모든 것을 미리 연습한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들께 이렇게 말씀드린다.

"성적표만 보지 마세요. 아이가 어려운 문제를 어떻게 대하는지, 실패했을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그걸 봐주세요."

얼마 전, 고3 수진이가 입시를 마치고 찾아왔다.

원하는 대학은 아니었다. 재수를 고민하고 있었다.

"선생님, 저 망한 거 아니에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수진아, 너 기억나? 고1 때 중간고사 폭망하고 일주일 동안 학교 안 갔잖아."

수진이가 쑥스럽게 웃었다.

"맞아요. 그때 진짜 세상 끝난 줄 알았어요."

"근데 지금은?"

"지금은... 그냥 시험 중 하나였네요."

"응, 이번 입시도 마찬가지야. 지금은 세상 끝 같지만, 10년 후에 보면 그냥 선택 중 하나일 거야."

수진이가 물었다.

"선생님, 그래도 억울해요. 열심히 했는데."

"응, 억울하지. 열심히 했는데 안 됐으니까."

나는 잠시 멈췄다가 말했다.

"근데 수진아, 열심히 했는데 안 되는 경험, 이게 처음이지?"

"... 네."

"앞으로 또 있을 거야. 직장 다니면서도, 뭔가를 준비하면서도. 열심히 했는데 안 되는 순간."

수진이가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때마다 무너지면, 힘들어. 근데 이번에 네가 이걸 한 번 겪어봤잖아. 다음엔 좀 덜 힘들 거야."

공부는 결국 삶을 살아가는 연습이다.

성적이 오르면 좋다.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막힐 때 멈추지 않는 힘, 실패해도 다시 시작하는 힘,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는 힘.

이 힘을 기르는 게 진짜 공부다.

그래서 오늘, 아이가 문제집을 덮으며 투덜거린다면 잠시 멈춰보면 어떨까.

"이거 배워서 어디다 써요?"

이 질문에 화내지 말고, 물어봐 주면 좋겠다.

"요즘 공부하면서 제일 힘든 게 뭐야?"

거기서 대화가 시작된다.

성적표에 나오지 않는 것들, 하지만 삶에서 정말 필요한 것들.

그걸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면, 공부는 짐이 아니라 연습이 된다.

삶을 살아가는 연습.

오늘, 아이에게 한 번만 물어보면 어떨까.

"공부하면서 요즘 뭐가 제일 어려워?"

그 대답 속에, 성적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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