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의 품격, 말쑥하게 조율된 침묵

단단한 탄력과 얇은 긴장, 그라폰 파버카스텔 마카사르 만년필

by Concept Varia

단단한 탄력, 검은 경주마를 닮은 필기구


어떤 펜은 단순한 도구로 다가오지 않는다.

마치 눈빛이 말을 거는 것처럼,

가만히 책상 위에 놓여 있어도 나를 쳐다본다.


그라폰 파버카스텔 클래식 라인, 마카사르 모델이 그랬다.

검정이라 말하기엔 너무 고요하고,

회색이라 말하기엔 너무 단단하다.


흑단나무로 만든 바디와

티타늄으로 마감된 캡과 그립은

차가움과 따뜻함을 동시에 품고 있다.


단단한 목재와 금속의 이질적 조합은

조화보다는 긴장에 가깝다.


그래서 이 펜은 말쑥하다.

지나치게 말쑥하다.


얇다, 그래서 손에 오래 남는다


손에 쥐었을 때의 첫 인상은 ‘얇다’.

익숙했던 두께를 벗어난 그 감각이,

때로는 불편함보다 집중을 유도한다.


‘편안함’보다 ‘정제됨’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펜이다.


닙의 크기도 작고, 배럴도 가는 편이다.

플래그십이라기보다는 숨을 조여오는 연습곡처럼,

조금은 긴장된 상태로 나를 문장에 진입시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꾸만 손이 간다.

책상에 있는 다른 펜들과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고개를 돌려도,


이 펜은 슬그머니 시선을 잡아챈다.


가늘고 검은 경주마.

단단하고 탄력 있으며,

검은 근육으로 잘 정리된 실루엣을 갖춘.


잉크가 아니라, 무게감


마카사르라는 이름을 가진 이 펜에,

같은 이름을 가진 잉크를 넣는다.


디아민 마카사르.

이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펜과 잉크는 한 쌍이 된다.


EF닙이지만, 글씨는 꽤 두껍고 묵직하다.

가로획은 날렵하지만,

세로획은 진득하게 남는다.


닙이 종이 위를 미끄러지는 게 아니라,

종이가 닙을 잠시 붙잡고 머무는 듯한 감각.


닙 끝에서 종이가 떨어져 나가는 순간까지도

긴장이 느껴진다.


쫀득하다는 말, 진득하다는 말밖에 쓸 수 없다.

말로는 전달되지 않는, 그 접촉의 여운.


쓰지 않으면 사라질 것 같은 펜


그라폰 파버카스텔 클래식 라인의 이 펜은

단지 고급스럽거나 품격 있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말없이 말을 거는 펜.

검은색이지만 검정이 아니고,

얇지만 가볍지 않다.


차가운 티타늄과 따뜻한 목재가 그어내는 선들.

그 선은 단어를 떠올리기 전의 마음 상태에 가깝다.


이 펜은 쓰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기 위해 쓰기를 유도한다.


그것이 내가 이 펜을 고르고,

또 꺼내 드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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