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균열, 그리고 사람을 담는 도구

오로라 옵티마 데몬 만년필

by Concept Varia

오로라, 균열 속에서 쓰는 기억


오로라를 처음 손에 올렸을 때,

그건 '빛'이라는 이름의 감각이었다.

검은색 일색이던 만년필 세계에,

이탈리아산 오롤로이드 배럴은 말 그대로 충격이었다.

반짝이며 빛나는 그 표면은, 손에 쥐는 순간 잉크가 아니라 무언가 더 깊은 것을 흘려보낼 것만 같았다.


오—호라!


연필처럼 서걱거리는 필감은 유독했다.

서걱, 서걱. 감촉이 단어를 깨우는 게 아니라,

감정이 단어를 흔드는 듯한 착각.

한 자, 한 자 적을수록 손끝에서 감성이 밀려나왔다.

역시 훌륭했고, 예뻤으며, 쓰는 맛이 색달랐다.

오로라 옵티마 블루와 오로라 88 오탄도트, 어렵게 들여온 오로라 옵티마 데몬스트레이터까지.

세일러 KOP 데몬 모델, 펠리칸 M805 데몬과 함께, 이 데몬 삼총사의 어울림은 더할 나위 없었다.


데몬스트레이터: 펜의 속을 들여다보다


만년필의 정교한 내부 작동 방식은 외관만으로는 알기 어려웠다.

그래서 제조사들은 투명한 몸통으로 펜을 만들었다.

잉크가 채워지고 소진되는 모습, 피드를 따라 펜촉으로 흐르는 과정, 그리고 다양한 충전 방식까지, 이 모든 것이 눈앞에 펼쳐졌다.

데몬스트레이터는 그렇게 펜의 속을 보여주는 '교육용'이자 '전시용'으로 시작되었다.

데몬스트레이터는 미적인 요소와 함께, 만년필의 작동 원리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기능을 탑재한 모델이다. 펜의 속을 들여다보는 행위는, 어쩌면 대상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과 맞닿아 있을지도 모른다. 투명함이 선사하는 가시성은, 완벽한 이해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한다.


균열의 시작, 그리고 기대의 무게


그러나 아름다운 것들은 언제나 균열을 안고 있다.

내게 온 오로라 데몬스트레이터는 그렇게 두 동강이 났다.

배럴이 갈라지는 방식은 마치, 오랜 균열이 조용히 시간을 기다리다 스스로 터져나간 듯했다.

세상에 알려진 '설탕 배럴'이라는 악명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다.

캡을 닫을 때마다 조심했고, 혹시라도 깨질까 집 밖으로 외출조차 금지했던 그 오로라였다.

그저, 이탈리아 만년필 특유의 불안한 구조가 내게 도착한 것뿐이었다.


오호 통재라!


A/S는 3개월에서 6개월.

수리비는 '00'만 원.

얼마나 많은 수리 요청이 있었는지,

기계적이고 간단한 전화응대만으로 모든 절차가 끝났다.

수선 의뢰를 모아 본사로 발송한단다.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이 펜을 기다려야 한다.

마치 딸을 시집보내고 빈방에 남은 아버지의 심정으로.

아들을 군에 보내고 편지를 기다리는 어머니처럼.

한 자루의 만년필이 이토록 많은 감정을 동반할 줄은 몰랐다.

그간 이 만년필을 왜 밖에 갖고 다니지 않았는지 이제야 이해한다.

깨질까 봐서가 아니다.

내가 너무 많이, 너무 완벽하게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도, 물건도, 감정도 — 기대는 늘 균열의 시작이다.

완벽을 바라는 마음이 오히려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파격이 된다.


상처마저 기록하는 펜


그럼에도 오로라를 쉽게 놓을 수 없었다.

포기하지 못할 만큼 아름다웠고, 잊을 수 없을 만큼 인상적이었다.

연필을 쓰는 것 같은 서걱거림,

그 오묘한 필감은 내구성을 포기할 만큼의 매력이었다.

나는 지금도 기억을, 감각을, 그리고 상처마저도 기록하려 한다.

만년필은 그래서 잉크가 아니라, 사람을 담는 도구인지도 모른다.


완벽하지 않은 존재가 남긴 상처를 통해 비로소 온전한 의미를 찾아가는,

그것이 펜과 나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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