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만년필 이야기, 사관과 신사, 그리고 완벽한 브랜딩

절도있는 부드러움, 조화와 균형

by Concept Varia

— 강직과 유연의 미학


세상에는 서로 완벽한 궁합을 자랑하는 것들이 있다.
흑과 백, 음과 양,
그리고 나의 두 만년필,

워터맨 익셉션(Waterman Exception)과 까렌(Carène)이 그렇다.

이 두 펜을 나란히 두고 바라보다 보면, 문득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1982년 작, 『사관과 신사(An Officer and a Gentleman)』.
고된 해군 훈련소에서 진짜 사관으로 거듭나는 남자와,
그를 묵묵히 지켜보며 따뜻한 품으로 안아준 한 여인의 이야기.
영화의 제목은 ‘사관과 신사’였지만,
내 책상 위의 두 펜은 마치 ‘사관과 숙녀’처럼 서로를 완성해 간다.


처음 익셉션을 만났을 때,

그에게서 잘 훈련된 사관의 모습을 보았다.
네모반듯한 몸통, 절도 있는 캡의 마찰음,
검정 배럴을 감싼 금빛 클립과 중결링은
마치 열병식을 준비하는 사관생도처럼 묵직하고 단단했다.
4각형의 각진 외관은 손에 쥐는 순간, 정렬된 자세처럼 안정감을 주었다.
사관 생도의 외형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마음을 열어준 건 아니었다.

뽑기 운이 안 좋았던 걸까, 아니면 워터맨과 내 손의 궁합이 애초에 어긋났던 걸까.

잉크를 주입한 첫날부터 헛발질과 끊김이 이어졌고,

“길들이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두 달 넘게

잉크를 바꿔보고, 세척을 반복하고,

매일같이 8자 그리기와 가로·세로 획 긋기를 해봤지만

그 고집은 좀처럼 꺾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특유의 부드러운 필감만큼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버티고, 붙들었다.
그러다 을지로의 작은 연구소에서 손을 본 후
익셉션은 마침내 완성되었다.
필선은 더는 끊기지 않았고, 펜은 종이 위를 미끄러지듯 흘렀다.


이 펜의 부드러움은 흔한 ‘버터 필감’과는 결이 다르다.
부드럽지만 텁텁하지 않고, 폭신하지도 않다.
나는 오히려 사각거리는 필감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그러나 익셉션의 필감은 타 펜들의 부드러운 규격화에서 벗어난,
매끄러운 부드러움이었다.
그 미묘한 조율이, 이 펜을 예외(exception)로 만든다.

게다가 이 펜은 ‘뽕따식’으로 “딱” 하고 닫히는 캡의 절도 있는 마찰음이 있다.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어떤 책임과 결단의 느낌을 받는다.
무게, 마찰, 닫힘의 리듬까지 모두 ‘사관’이다.


익셉션이 사관이라면, 까렌은 숙녀다.
익셉션이 내 손에 완벽히 안착된 후,
나는 오래도록 마음속에만 담아뒀던 까렌을 마침내 맞이했다.

까렌(Carène)은 프랑스어로 ‘배의 선체’를 뜻한다.
그 이름처럼 그녀는 보트의 뱃머리를 형상화한 유선형의 바디를 지녔다.
닙부터 바디까지 매끄럽게 이어지는 곡선은
정제된 아름다움 그 자체다.
광택 있는 은장 캡과, 대비되는 깊은 검정 배럴.
화려하지 않지만 존재감 있는,
우아하지만 도도하지 않은,
‘숙녀’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만년필이다.


익셉션이 정렬과 각의 미학이라면,
까렌은 흐름과 곡선의 미학이다.
익셉션이 단단한 책임과 훈련을 떠올리게 한다면,
까렌은 유려한 감성과 포용의 리듬을 느끼게 한다.


펜을 닫는 소리도 다르다.
익셉션은 마찰을 남긴 채 ‘딱’ 하고 단호하게 닫히고,
까렌은 유려하게 스르르 미끄러지듯 닫힌다.
하나는 질서의 소리, 하나는 여백의 소리다.

두 펜을 나란히 두고 보면,
마치 『사관과 신사』의 두 주인공이
시간을 멈춘 채 나란히 클로즈업된 것처럼 보인다.
다만 내 해석 속에서 그 둘은
‘사관과 숙녀’가 되어 나의 삶을 정리하고,
한 줄의 문장을 완성해간다.


이 두 만년필은 단지 필기구가 아니다.
하나는 브랜드의 단단한 정체성,
하나는 유연하고 감각적인 소통의 상징이다.
익셉션은 브랜드의 ‘몸통’ 같고,
까렌은 브랜드의 ‘피부’ 같다.


단단하되 경직되지 않고,
유연하되 흐물거리지 않는 것.
사각과 곡선, 책임과 감성, 고집과 설득.

익셉션과 까렌.
이 두 펜은 ‘조화’와 ‘균형’의 미학이다.

그리고 오늘도,
두 펜을 나란히 놓는다. 선택하지 않는다.
그날의 마음과 사유에 따라,
단단한 계획을 쓰고,
부드러운 감정을 써 내려간다.


완벽한 브랜드, 완벽한 사람, 완벽한 글쓰기.
그것은 익셉션만으로 완성되지 않고,
까렌만으로도 살아남을 수 없다.
모든 것은 둘의 조화를 통해 완성되어 간다.

내 책상 위의 사관과 숙녀는,
오늘도 둘이 함께 나란히 있다.

그래야 완성된 하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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