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크 한 방울에 담긴 선택의 철학
새로운 만년필을 손에 들면 언제나 첫 번째 숙제가 따라온다.
즐겁지만 결코 쉽지 않은 숙제.
이 만년필에 어떤 잉크를 채울 것인가.
잉크는 단순한 소모품이 아니다.
만년필의 피가 되고, 글줄기의 핏줄이 된다.
생각의 결을 드러내고, 감정의 색을 입힌다.
그래서 이 고뇌의 시간은 늘 기쁘다.
펜촉의 흐름이 풍부한지, 박한지는 그다음 문제다.
먼저 만년필의 외관을 더듬는다.
그 고유한 감성에 어울리는 색을 찾으려는 일.
이 작은 선택이야말로 삶과 선택의 은유일지 모른다.
대부분의 만년필은 검은 배럴을 가졌다.
오로라 블랙, 파카 퀸크 블랙.
안전하고 훌륭한 선택이다.
그러나 검정 펜에 검정 잉크만 채우는 일은
관습을 따르는 것과 닮았다.
그래서 다른 길을 찾는다.
검정에 가까우면서도 검정은 아닌 색.
디아민 셔우드 그린 같은 짙은 초록,
또는 깊은 갈색이 좋은 대안이 되었다.
잉크를 고른다는 건 넥타이를 고르는 것처럼 작은 자기표현이다.
비슷해 보이지만, 그 작은 차이가 글의 인상을 완전히 바꿔놓는다.
빛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라미 2000의 회색 배럴에 담았던 제이허빈의 그리 뉘아즈(회색 구름).
이름은 곱지만, 종이 위에서는 힘을 잃었다.
겉모습의 유혹과 실제 사용감의 괴리, 그 실패의 기록이었다.
다시 길을 찾아 디아민 얼그레이를 주입했다.
완벽하진 않지만, 외형과 어울리며 손에 붙었다.
실패와 타협 사이에서 얻어낸 작은 균형이었다.
투명한 데몬스트레이터는 언제나 푸른빛을 갈망했다.
워터맨 세레니떼 블루와 이로시주쿠 수국(자양화)은 맑고 청량했다.
그러나 ‘심해’라는 이름의 잉크는 뜻밖에도 검은 그림자만을 토해냈다.
빛과 그림자가 늘 함께하듯, 실패는 또 다른 선택으로 이어졌다.
붉은 배럴에는 옥스블러드 같은 붉은색 잉크가 제격이었다.
과하지 않으면서도 눈에 잘 들어오고, 오래 써도 부담이 없었다.
실패의 목록은 여전히 길다.
퍼플이나 와인 계열은 종이 위에서 유난히 튀어 보였고,
오렌지 계열은 예쁘지만 읽기 힘들었다.
결국 오래 쓰지 못했다.
커피 잔마다 맛이 다르듯, 잉크도 글맛을 바꾼다.
색이 아무리 곱더라도 읽히지 않는다면 오래 갈 수 없다.
실험의 충동은 멈추지 않았다.
가독성이 부족한 잉크에 오로라 블랙을 소량 섞어 보았다.
단 1mm의 검정이 만들어낸 변화는 놀라웠다.
색은 한층 깊어지고, 글씨는 또렷해졌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위험한 실험이다.
잉크의 혼합은 언제든 펜이 망가질 수 있다.
타협과 실험 사이에서 찾은 작은 균형일 뿐이다.
밤늦도록 인터넷을 헤매며
특정 배럴에 꼭 맞는 색을 찾기도 하고,
순전히 병이 예뻐서 잉크를 들이기도 했다.
이쯤 되면 잉크에 진심이라 불러도 좋겠다.
아니, 어쩌면 만년필을 사랑하는 이라면
누구나 이 진심을 품고 있을 것이다.
잉크 한 방울은 작은 우주다.
색을 고르는 과정은
삶의 피로 속에서도
놀이와 탐색을 포기하지 않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검정만으로도 충분하지만,
다른 색을 찾는 이유는
세상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고 싶기 때문이다.
잉크의 실패와 성공은
곧 나의 실패와 성공, 타협과 파격, 유혹과 괴리, 실험과 균형이 뒤섞인다.
잉크는 결국 나를 비추는 색, 삶과 선택의 은유다.
종이 위에 남긴 색은 사라져도,
그 순간의 선택은 오래도록 나를 닮아 있다.
#잉크 #만년필 #라미2000 #워터맨 #이로시주쿠 #제이허빈 #디아민 #파카퀸크 #오로라블랙 #필기구 #글쓰기 #취향 #작가의도구 #컬러잉크 #잉크추천 #만년필사랑 #글쓰기취미 #삶의은유 #사색 #브런치북 #브런치글 #브런치작가 #철학적에세이 #취향기록 #생활철학 #작은우주 #변주와파격 #타협과실험 #검정보다다른색 #삶의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