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자루 만년필의 초상
한 배에서 나온 서로 다른 자식들을 모았다.
내게 들어온 경로는 모두 달랐고, 그만큼 생김새도, 쓰임새도 제각각이다.
그들을 나름대로 분류해두었고,
쓸 때마다 목적에 따라 골라 들었다.
그러나 생긴 대로 노는 것도 아니고,
쓰이는 것이 생긴 만큼만 하는 것도 아니다.
파이롯트 커스텀 우루시
— 숨을 고르게 하는 크기와 붉음
우루시 레드는 5월 장미빛 빨강, 혹은 스페인 집시 여인의 드레스로 유혹했다.
빛 속에서 이 펜은 춤춘다.
그러나 그 유혹은 단지 시각적 자극만은 아니다.
손에 쥐었을 때, 그 질감과 무게가 글보다 먼저 나를 감싼다.
우루시는 초대형 필기구다.
닙의 크기 또한 초대형이다.
빨강의 유혹보다도, 크기가 주는 압도감이 먼저 다가와 숨을 고르게 한다.
편하게 쓰여지진 않는다.
긴 문장이나 섬세한 기록보다는, 단숨에 휘둘러야 제 맛이다.
한 획에 감정을 실을 때, 그 무게가 글을 이끈다.
커스텀 845 — 절제된 힘, 검정색 단호함
커스텀 845는 중절모를 쓴 화투의 비광이었다.
검은 배럴과 금장의 조합.
말을 아끼면서 할 말을 모아두는 것은 아닐지.
그것은 검은 결을 따라 흘러가는 문장이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도 설득력 있는 이들이 있는 것처럼,
845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말을 남긴다.
커스텀 845는 BB닙으로 들였다.
묵직하고 두터움이 마치 붓을 쓰는 듯하다.
살짝 눌러주며 세로획을 내려 쓸 때, BB닙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시킨다.
잔잔하고 단정한 문장에는 맞지 않다.
그러나 크고 느리게, 조금은 거칠게 쓰고 싶은 날에는 가장 잘 맞는 도구다.
커스텀 마끼에 — 쓰기 전의 침묵
마끼에는 어색하게 금막을 두르고 무대에 올라선 가부키 여인이었다.
쓰는 것보다 보는 것이 먼저이고,
필감보다 긴장감이 먼저 다가온다.
문장을 쓴다기보다는 의식을 치른다는 느낌.
단어 하나를 꺼내는 데도, 손보다 마음이 먼저 조심스러워진다.
마끼에는 쓰임새보다는 생김새가 구 할이다.
화려한 금박, 섬세한 문양.
그 자체로 하나의 무대이며,
꺼내 드는 순간 주변 공기까지 정리된다.
그렇다고 마냥 두고 볼 수만은 없다.
캡을 열고, 가지런히 써본다.
어쩌면 가부키 무대에서 내려온 여인의 얕은 한숨일지도 모른다.
쓰는 도구가 나를 만든다
우루시를 든 날은
세상에서 멋지게 날아가고 싶다.
845를 든 날은
조용히 안으로 침잠하고 싶다.
마끼에를 꺼낸 날은
문장을 쓰지 않아도 되는 하루여도 괜찮다.
선택은 취향이지만,
그 취향이 쌓여 나를 만든다.
그리고 펜은, 문장이 되기 전의 나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이 세 자루의 만년필을 갖고 있다.
때로는 유혹당하고,
때로는 절제하며,
때로는 망설이면서.
펜촉 끝으로 오늘을,그리고 내일을 조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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