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집의 불완전, 버림으로 완성된 수집

만년필 수집 변천사

by Concept Varia

만년필은 단순한 필기구가 아니다.
삶의 단계마다 변화하는 욕망과 사유를 담아내는 도구이고,
한 자루 한 자루 늘어갈 때마다 취향과 가치관을 재정의하게 만든다.
늘어나는 것은 펜이었지만, 실은 자신을 새롭게 쓰고 있던 셈이다.

갑자기, 아주 갑자기, 충동적으로 만년필을 쓰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처음에는 현행 새 제품에 유명 브랜드의 세필을 구입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시작은 단순했다. 라미 사파리.
가장 처음에 입문하는 편안하고 무난한 만년필이었다.
이어 몽블랑 마이스터스튁 145, 오로라 옵티마를 손에 쥐었다.
그때는 얇고 섬세한 글씨만이 좋은 글씨라 여겼고,
닙에 적힌 금의 숫자가 곧 진실이라 믿었다.
14K보다는 18K가 더 부드럽고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한 줄의 필감 안에서 질서와 완벽을 찾고 싶었던 시절이다.

조금 지나, 굵은 닙의 시원한 흐름을 알게 되었다.
세필의 날카로운 정교함과는 다른 세계였다.
처음엔 낯설었으나, 종이를 가득 채우는 힘 있는 필선에서 또 다른 매력을 발견했다.
그러다 취향은 다시 바뀌었다.
얇고 굵음을 따지지 않고, 상황과 종이에 따라 손끝에 맞는 펜을 고르게 되었다.
좋은 필감은 닙의 크기나 금의 함량이 아니라,
종이가 받아들이는 방식과 잉크의 흐름이 박한가 풍부한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욕망은 점차 ‘플래그십’을 향했다.
각 브랜드의 정상에 놓인 모델들을 모두 경험해보고 싶었다.
애호가들 사이에서 몽블랑을 최고로 여기는 사람들과 펠리칸을 최고로 여기는 사람들을 묶어 ‘몽펠파’라 부르곤 했는데,
그 두 진영의 대표작을 포함해 주요 제조사의 플래그십을 하나씩 손에 넣는 일이 작은 목표이자 성취였다.
다만 기능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같은 브랜드, 같은 라인이라도 한정판이나 특별한 디자인은 더 눈길을 끌었다.
만년필을 도구이자 ‘작품’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세상에 만년필은 많았고, 지갑은 얇았다.
결국 발길은 중고거래로 향했다.
처음에는 박스와 보증서, 풀세트 여부가 절대적인 기준이었다.
새것에 가까울수록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그 원칙은 금이 갔다.
중요한 것은 서류가 아니라 상태였고,
더 중요한 것은 손에 쥐었을 때의 감각이었다.
보증서가 있든 없든, 박스가 멀쩡하든 아니든,
필감이 살아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중고라는 경계는 오히려 자유였다.

한정판, 옻칠, 자개 같은 외형에도 눈길이 갔다.
세필이냐 태필이냐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종이와 상황에 따라, 손끝에 맞는 펜을 고르는 것이 전부였다.
중고거래에서도 원칙은 무너졌다.
박스와 보증서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가성비라는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
아직 써보지 못한 펜이라면, 가격의 합리성이 우선이고 그 조건에 맞게 펜을 들여놓았다.
펜의 계보나 상징성보다 경험 자체가 우선이었다.
수집은 가질 권리가 아니라, 써보는 용기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방향이 또 바뀌었다.
흥미가 사라진 펜, 특별하지 않은 펜, 쓰지 않을 것 같은 펜들을 방출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하나를 알았다.
수집은 모으는 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일로 완성된다는 것.
모으는 과정에서 욕망이 드러나고, 버리는 과정에서 취향이 드러난다.
무턱대고 쫓던 시절이 지나고 나니, 오래 곁에 둘 만한 펜과 그렇지 않은 펜이 갈라졌다.

마침내 오래된 펜들로 시선이 향했다.
현행품에서는 만날 수 없는 감각,
단종된 모델들과 사라진 제조사들이 남긴 전설의 펜들.
오마스의 낭창한 연성닙처럼, 필감 자체가 예술로 회자되는 펜들을 찾아 해외 경매를 기웃거렸다.
무작정 시작한 모험이었다.
결과는 대체로 실패였다.
아니, 절반의 실패였다.
상태는 기대보다 나빴고, 관세까지 더하니 국내 중고보다 비싸졌다.
그러나 이 실패는 손실로만 남지 않았다.
무엇을 얻으려 했는가, 왜 거기까지 집착했는가.
실패는 끝이 아니라 질문의 시작이었고,
그 질문이 남았기에 수집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SNS에서 만년필을 배웠다.
다른 이들의 펜 이야기를 간접으로 경험하는 일은 여전히 즐겁다.
그러나 지금은 욕망과 충동에 휘둘리지 않으려 자제하고 있다.
이미 곁에 있는 펜들을 오래 쓰고, 오래 아낀다.

세상에 완벽한 펜은 없다. 완벽한 수집도 없다.
있는 것은 실패와 욕망, 그리고 그 사이에서 길러지는 취향뿐이다.
수집은 멈추지 않았지만, 지금은 잠시 멈춘 자리에서 다음 계절을 기다리고 있다.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결심이 있다면 프루스트를 완독하는 것이다.
수집도 마찬가지다. 완결은 없다. 지금은 잠시 멈췄을 뿐이다.
미완성은 실패가 아니라, 시도 자체로 의미를 가진다.
단종된 펜, 오마스의 낭창한 연성닙 같은 전설의 펜을 좇던 경험이 그러했고,
삶 역시 그렇다.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여전히 미완의 세계를 살아가는 것.
그 미완의 세계가 바로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다.

분명한 건, 이 수집의 변천사는 언젠가 또 쓰이게 되리라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다른 얼굴을 띠며, 또 다른 이야기를 불러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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