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숲에서 사각이는 바람 소리

세계에서 단 하나, Wancher 만년필

by Concept Varia

만년필의 세계에는 오래된 강자들이 있다.

몽블랑, 파커, 펠리칸, 세일러… .

수십 년, 혹은 백 년이 넘는 역사를 등에 업고 정통이라는 권위를 지닌 브랜드들이다. 그러나 정통만이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정통을 빗겨나, 변두리에서 다른 길을 모색하는 젊은 브랜드들도 있다.

일본의 완차(Wancher) 역시 그 중 하나다.


창업주는 중학생 때 처음 만년필을 접했다.

그 작은 경험은 마음속에 오래 남아 있었고, 성인이 된 1990년 이집트의 뜨겁고 건조한 현장에서 연구하던 그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기록을 남길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만년필은 단순한 필기도구가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도 흔적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 생각이 10년의 연구로 이어졌고, 결국 2000년 그는 THT Inc.라는 회사를 창립했다.

이후 2011년에는 완차(Wancher Inc.)라는 이름으로 독립적인 만년필 브랜드를 세웠다.

단순 유저였던 한 개인이 집념 끝에 제조자의 길로 건너간 것이다.

매니아가 스스로의 갈증을 채우기 위해 제조자가 되는 순간 그것은 단순한 전환이 아니라 변신이었다.

삶의 방식이 도구를 바꾸었고, 그 도구가 다시 한 사람의 세계를 바꾸어놓았다.


내 손에 들어온 것은 완차 세계수 시리즈 중 하나다.

베트남 전통 나전칠기 장인이 1년여에 걸쳐 완성한, 단 하나뿐인 작품이다.

더 이상 제작하지 않겠다고 장인이 선언했으니, 말 그대로 세계 유일의 만년필이다.


재질은 나무다.

표면에는 옻칠이 입혀져 있고, 곳곳에는 자개 조각이 사각형으로 스며들 듯 박혀 있다.

빛의 각도에 따라 색이 달라지는 그 나전칠의 반짝임은 마치 밤하늘의 별이 푸른 대나무 숲 사이로 흩뿌려지는 듯하다.

손에 쥐면 가볍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나무가 주는 따스한 온기와 두툼한 그립감이 묘하게 공존한다.

특이하게도 캡에는 클립이 없다.

트위스트 방식으로 여닫는 구조는 다소 낯설지만, 대신 만년필의 곡선미를 방해하지 않는다.

기능을 덜어내고, 미학을 앞세운 선택이라고 해야 할까.


프리미엄 만년필을 표방하면서도 완차는 인하우스 닙을 만들지 않고 독일 요보(Jowo)의 스틸 닙을 사용한다. 만년필의 본질은 닙에 있고, 닙에서 브랜드의 고유성이 갈린다는 점에서 아쉬운 대목이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한 부족함이라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선택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완차는 닙 경쟁에서 몽블랑·세일러와 맞붙기보다, 장인의 공예와 독창적 외형에 자원을 집중했다.

닙은 글로벌 스탠다드를 빌려 쓰고, 대신 옻칠과 나전칠, 그리고 나무라는 재질의 감각에서 승부를 건 것이다. world best가 아니라 only를 향한 길. 그것이 완차의 철학적 전략일지 모른다.


나는 이 펜에 디아민 Meadow 잉크를 주입했다.

Meadow란 영어로 ‘목초지’를 뜻한다.

영국에서는 소와 양이 풀을 뜯는 푸른 들판을 가리키는 단어다.

이 단어를 곱씹는 순간, 잉크의 색감은 단순한 연두빛 녹색이 아니게 된다.

Meadow는 계절의 풍경을 불러온다. 바람에 스치는 풀 냄새, 넓게 펼쳐진 들판의 초록, 해 질 무렵 황금빛으로 물드는 목초지의 기억.

글자를 쓰는 순간, 종이 위에 풀잎이 자라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펜의 녹색 바디, 나전칠의 은은한 빛, Meadow 잉크의 초록빛.

세 요소가 만나면서 만년필은 단순한 도구를 넘어 하나의 풍경을 완성한다.

이 만년필과 수많은 잉크 중에 Meadow를 고른 내 감각에 스스로 뿌듯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이 만년필을 해외 경매에서 낙찰받았다.

바로 그것이 완차의 방식이었다.

고가의 만년필을 이베이에 저렴하게 올려놓고, 전 세계의 매니아들이 서로를 의식하며 입찰하게 만드는 것. 판매의 경로 자체가 곧 브랜드의 메시지였던 셈이다.

유저 중심, 접근 가능한 프리미엄. 이것이 완차의 출발점이었다.

완차의 만년필은 세계 최고라는 자리를 두고 경쟁하지 않는다.

대신 세계 유일이라는 자리를 향해 간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 누구도 복제할 수 없는 방식, 장인의 손길이 깃든 단 하나의 결과물.

우리에게도 언젠가, 이런 길을 걸어가는 브랜드가 나오기를 바란다.

거대한 자본이 아니라 집념에서 시작되는 기업, best가 아니라 only를 향하는 기업 말이다.


완차의 만년필은,

한 사용자가 사랑했던 도구가 어떻게 하나의 브랜드가 되고,

하나의 세계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세계 최고가 아니라, 세계 유일을 향한 길.

그것이 곧 삶을 살아내는 또 다른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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