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칸 M805 데몬스트레이터
만년필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투명한 바디에 마음을 빼앗긴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금기와도 같은 매혹이다.
감추는 대신, 드러내는 것.
속을 보여주는 펜.
당당하게 훔쳐보게 만드는 구조.
펠리칸 M805 데몬스트레이터.
그녀는 스스로의 속살을 노출한다.
겉으로는 당당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는 나의 시선은 여전히 훔쳐보는 기분에 가깝다.
이 펜은 단순히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이 투명한 도구는 만년필의 은밀한 속살을 ‘당당하게’ 노출하고,
보이지 않지만 작동하고 있는 세계,
그 세계를 ‘보는 사람’에게 책임 있게 넘긴다.
데몬스트레이터란 본래 시연용, 말 그대로 Demonstrator다.
실제 사용보다는,
피스톤 필러 방식, 즉 잉크를 빨아들이고 구동하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극소량 제작된 모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아름다웠고,
사람들은 그 구조적 투명함을 욕망했다.
결국 이 펜은 시연의 경계를 넘어, 소유의 대상으로 시장에 등장했다.
펜촉을 잉크에 담그고 피스톤을 돌리는 순간, 파란 잉크가 배럴 속으로 스며들며 안쪽을 가득 채운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이 과정은 단순한 충전이 아니라 ‘내부가 살아 움직이는 장면’이다.
잉크가 피드를 적시고, 닙을 따라 흘러나와 종이 위에 내려앉는다.
이 모든 것은 평범한 펜 안에서도 일어나는 일이지만,
데몬스트레이터는 그것을 보여준다.
은밀한 움직임을, 가감 없이, 정면으로.
펜을 거꾸로 들면 남은 잉크가 배럴 아래 찰랑인다.
점점이 박힌 그 잔재들은 마치 아직 쓰이지 않은 말의 파편처럼 느껴진다.
이 펜을 쓰는 일은 곧, 쓰지 않은 잉크의 잔상까지 책임지는 일이다.
물론, 이 솔직한 구조는 시간이 지나면 낡는다.
투명한 배럴은 착색되고, 표면은 변색된다.
게다가, 내구성은 일반 모델보다 약하다.
세척과 보관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하고, 분해 시 치명적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아름다움에는 항상 대가가 따른다. 누군가의 진짜 속을 들여다 본다는 건, 흔히 그렇다.
그러나 예쁜 딸을 둔 부모가 더 많이 손을 쓰듯,
이 펜은 그런 존재로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사용하는 모델은 M805 은장(실버 트림) 버전이다.
손에 쥐면 적당하다.
무게도, 두께도, 길이도 과하거나 모자람이 없다.
잉크 흐름도 무난하고, 필감 역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다.
하지만 '적당하다'는 표현은, 때로는 특별하지 않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펜의 필감은 약간의 사각거림이 있다.
오로라처럼 부드러움이 그 사각거림을 감싸 안지도 않고,
파카 듀오폴드처럼 사각거림이 부드러움을 압도하지도 않는다.
양극단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이 미묘한 경계가,
어떤 날은 단단한 중심처럼 느껴지고,
어떤 날은 평범한 무색함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그것은 개체 차이일 수도 있고,
은장 모델의 물성 때문일 수도 있다.
혹은,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 수도 있다.
때때로 만년필이 글을 쓰기 위한 도구라기보다는
‘기억을 흘려보내기 위한 심리적 매개체’라고 생각한다.
데몬스트레이터는 그 흐름의 내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에,
더 많은 사유를 자극한다.
속살을 본다는 것.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서,
‘보는 자의 책임’을 묻는 일이다.
투명한 존재와 마주할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더 정직해진다.
펠리칸 M805 데몬스트레이터.
나는 이 펜을 ‘당당하게 훔쳐볼 수 있는 펜’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 당당함은 곧, 나 자신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투명함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펜은,
그저 예쁜 펜이 아니다.
그 안에는 나의 시선, 사유, 그리고 쓰지 못한 문장들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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