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구성의 아쉬움과 감각적 체험 사이
하나 또는 두세개의 사례로 전체를 아우르는 누를 범하고 싶지는 않다.
단지,
지극히 내 개인적 사용기일 뿐이다.
심미안적 눈높이가 대단치 않은 나에게도 이탈리아 만년필들의 색채감은 유별나고 다채롭고 신비하고 환상적이다.
대체적으로 그렇다.
그에비해 내구도에는 불만 가득하다.
유럽의 다른 만년필 업체에 비해 살짝 세필이다.
내 기준으로 가장 좋은 것은 역시 필감의 독창성, 또는 특별함이다.
오로라의 서걱거리는 연필같은 필감이라든지,
오마스의 낭창이는 연성닙의 필감은 다른 만년필로서는 흉내 내기나 따라잡기가 불가하다.
이 독창적인 경험에 대한 가치를 말하는 것은,
어쩌면 쓰기라는 행위의 본질을 '효율'이 아닌 '경험'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만년필의 세계에서
독일제는 기계적 신뢰성과 견고함으로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는 '도구'로서의 정설을 보여주고,
일본제는 완벽에 가까운 마감과 한결같은 정교함으로 '흠결 없음'의 경지를 보여준다면,
이탈리아의 그것은 전혀 다른 대척점에 서 있다.
그것은 도구가 아니라 대화의 상대방에 가깝다.
때로는 변덕을 부리고 길들일 시간을 요구하지만,
한번 마음을 열면 세상에 둘도 없는 교감을 선사한다.
오로라가 주는 닙의 저항감은
생각의 속도를 조율하고, 한 자 한 자 글쓰는 행위 자체를 인식시킨다.
비스콘티는 현무암과 레진을 뒤섞어 빚어낸 육중한 존재감으로 필기구를 쥔 것이 아니라 마치 피렌체 어딘가에 있는 조각상의 일부를 떼어 든 듯한 예술적 소유욕을 자극한다.
몬테그라파의 화려함은 쓰임새 보다 생김새에 반하게 되고,
비교적 신생인 피나이더는 '펜에 오케스트라를 담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대담한 디자인을 선보인다.
그들의 노력은 모두 합리적 완벽보다는 감각적 체험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결국 이탈리아 만년필은 기술적 결함 속에서도 감각의 힘을 믿는 문화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이제는 사라진 오마스라는 브랜드의 부재는 많은 애호가들에게 깊은 아쉬움과 향수를 남긴다. 그들의 영롱한 셀룰로이드 바디와 버터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낭창이는 연성 닙은 여전히 전설처럼 회자된다. 오래전 오마스를 처음 손에 쥐었을 때의 떨림은, 단순히 좋은 필기구를 얻었다는 만족감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라져가는 아름다움의 마지막 흔적을 만났다는 실존적 체험에 가까웠다. 지금 그 명맥을 잇겠다는 새로운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지만, 오마스가 남긴 전성기의 기품을 그대로 되살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아쉬움 속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탈리아 펜에 기대를 건다. 그 불완전한 계승의 노력마저 이탈리아 펜의 서사에 깊이를 더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만년필들의 모순은 언제나 뜨거운 논쟁거리다.
누군가는 뽑기운에 실패한 쓰라린 경험을 토로하며 "예술적 감각으로 포장된 불량품"이라 혹평하고,
다른 누군가는 그 모든 결함을 상쇄하고도 남을 압도적인 디자인과 대체 불가능한 손맛을 예찬하며 "결함마저 사랑스러운 파트너"라 부른다. 이 펜들과의 관계 맺음은 마치 까다로운 연인을 대하는 것과 같다. 어떤 잉크를 좋아하는지, 어떤 종이 위에서 최고의 기량을 뽐내는지 세심하게 관찰하고 맞춰주어야 하는 수고로움을 동반한다. 그러나 바로 그 과정 속에서 물건과 사용자 사이의 일방적 관계는 소멸하고,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상호작용의 역사가 쓰인다. 그 불완전함이야말로 삶의 은유처럼 다가온다.
그래서 오늘도 기꺼이 이 아름다운 모순 덩어리를 갈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탈리아 만년필의 내구성을 질책하면서도 꽤 많은 이탈리아 만년필을 갖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완전무결한 상품에 대한 실용성을 대하는 태도와는 다른 결을 갖는다.
이탈리아 만년필의 외형적 아름다움은 보는 즐거움이 있고 독특한 필기감은 쓰여지는 경험의 즐거움이 있다. 내구성의 아쉬움과 불편함으로, 또는 경제적 가치로 이탈리아 만년필을 설명하지 못하는,
아니,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경험적 가치가 나를 매번 유혹하고, 나는 매번 기꺼이 유혹당한다.
역시 사람은 합리와 효율을 이성적으로 표피에 두르고 감성적 경험에 빠지는 우를 범하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 불안정 속의 아름다움, 불편 속의 즐거움, 불완전 속의 완전성. 그것이 이탈리아 펜이 내게 가르쳐 준 역설이다.
흑묘백묘론, 즉 쥐만 잘 잡으면 되는 실용의 논리는 여기서 통하지 않는다.
잘 쓰이기만 하면 된다는 명분으로 설명되지 않는 세계가 있다.
나는 결국 이 아쉬움 섞인 목소리로 이탈리아 만년필을 질책하면서도 동시에 찬사를 보낸다.
#이탈리아만년필 #만년필사용기 #오로라 #오마스 #비스콘티 #몬테그라파 #피나이더 #레오나르도펜 #필기감 #필사 #글쓰기철학 #불완전의미학 #감각의경험 #만년필컬렉션 #만년필추천 #만년필리뷰 #잉크와종이 #글쓰기도구 #만년필세계 #필감 #필사생활 #브런치북 #철학적글쓰기 #브런치작가 #컬렉션취향 #글쓰는즐거움 #필기구애호가 #예술과도구 #감성적체험 #삶의역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