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카로운 첫 키스와 EF닙의 떨림
한용운은 첫 키스를 날카롭다고 말했다.
첫 키스라 하면 대개 달콤하고 부드러운 것으로 기억되기 마련인데, 그는 그 순간을 칼날에 비유했다.
왜일까.
아마도 그것은 입술의 단순한 접촉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서로에게 새겨지는 각인(刻印)의 순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날카롭다는 것은 스치기만 해도 피가 배어 나오는 상태다.
고통스럽지만, 그만큼 진하고, 그만큼 오래 남는다.
부드러움은 시간 속에서 희미해져도, 날카로운 상처의 기억은 영원히 남는 것처럼 말이다.
그 날카로운 감각은 만년필에 깃들어 있다.
수많은 펜촉 가운데서도, 종이의 결을 느끼며 흔적을 남기는 EF 닙은 가장 날카롭다.
특히 파이롯트 커스텀 우루시 EF 닙은 그 상징에 가깝다.
육중한 30호 닙을 극도로 세밀하게 다듬어낸 그 예리한 끝은 결코 세상을 부드럽게 대하지 않는다.
손에 쥐면 서늘하다가 이내 체온으로 따뜻해지는 붉은 옻칠 바디는 불타는 첫 순간의 격정을 닮았고, 종이를 미세하게 긁으며 나아가는 촉각은 두 사람 사이의 긴장과 떨림을 그대로 전한다.
한용운이 노래한 첫 키스의 날카로움은 그렇게 손끝에서도 살아난다.
부드럽게 감싸는 것이 아니라, 예리하게 파고드는 것.
아픔과 설렘이 동시에 스며드는 것.
그것이 EF의 필감이며, 첫 사랑의 기억이다.
하나의 펜에 하나의 감각이 깃든다면, 다른 작가의 영혼 역시 저마다 다른 펜의 육신 속에 잠들어 있을 터.
펜의 무게, 배럴의 질감, 닙이 종이를 가르는 저항감. 이 모든 감각의 공명이 바로 작가의 정신과 만나는 고유한 울림, ‘필각(筆刻)’일 것이다. 문학은 이로써 눈을 넘어 손끝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김훈의 문장은 응축되어 있다.
군더더기를 허락하지 않는 짧고 단단한 문장.
그는 연필을 깎듯, 문장 하나하나를 깎고 다듬어 날을 세운다.
그 글쓰기는 몽땅 깎인 연필처럼 결연하면서도, 한 글자 한 글자에 온몸의 무게가 실려 있다.
그 문체는 비스콘티 메디치 오버사이즈, 23K 닙에 겹쳐진다.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팔각형 세례당에서 영감을 얻은 바디는 대리석처럼 장중하고, 오버사이즈의 크기는 손에 쥐는 순간 단순한 필기구를 넘어선 권위와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 거대함이 화려함으로 흐르지 않도록 제어하는 것이 바로 닙이다.
23K 팔라듐 닙은 부드럽지만 강직하다.
특유의 단단하면서도 절제된 강직함, 거대한 몸체에서 뻗어 나오는 묵직한 균형감각이 필기 전체를 지배한다. 펜의 무게가 자연스럽게 종이를 누르도록 맡겨두기만 하면, 한 획 한 획이 김훈의 문장을 닮아간다.
웅장하지만 절제된 힘, 장황하지 않으면서도 깊은 여운을 남기는 필감. 바로 거기서 ‘응축된 한국어 문체’가 손끝에 재현된다.
카프카의 문장은 또 다르다.
그는 언제나 균열과 불안을 이야기했다.
합리적이고 단정한 외형을 지닌 채, 그 안에서는 거대한 체제의 압력에 짓눌린 인간이 서서히 금이 가고 소외되어 무너진다.
그 감각은 오마스 셀룰로이드에서 고스란히 느껴진다.
오마스는 화려하다. 아르코 셀룰로이드의 깊고 영롱한 빛은 눈부시고, 정교하게 배열된 패턴은 완벽한 질서를 상징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 완벽한 아름다움은 세월 앞에서 치명적으로 예민하다.
오래된 셀룰로이드에는 언제나 내부로부터의 균열과 붕괴의 위험이 도사린다.
그리고 그 특유의 낭창이는 닙은, 힘을 주어 쓰다 보면 예기치 않게 무너질 듯 흔들린다. 필기 내내 느끼는 이 아슬아슬한 불안감. 카프카의 문장은 바로 그러한 감각을 닮았다. 겉보기에는 단정하지만, 그 내부에는 부서질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연약함이 숨어 있다. 화려함과 좌절이 동시에 스며 있는 펜촉. 오마스는 손끝에서 카프카의 세계, 그 아름답고도 비극적인 불안을 재현한다.
그리고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조르바는 자유다.
그는 이성이나 규율, 타인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삶 그 자체를 긍정하며 춤으로 표현한다.
그의 춤은 계산되지 않았고, 그의 언어는 가공되지 않았다.
그 원초적인 자유분방함은 오노토 블랙 체이스드, 7호 닙에서 보인다.
7호 닙은 크고 곧으며, 종이 위를 달리며 자유롭게 선을 남긴다.
막힘없는 잉크의 흐름은 그의 넘치는 생명력과 같아서, 때로는 직선으로, 때로는 곡선으로, 때로는 제멋대로 흩어진 낙서처럼 보이지만 결국 하나의 생동하는 리듬으로 귀결된다.
조르바의 춤과 언행처럼 거침이 없다.
오노토의 필감은 자유롭고, 제약을 모른다.
단단하고 정직한 닙은 망설임을 허락하지 않고, 생각을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조르바의 정신을 닮았다.
필선이 춤이 되고, 삶의 호흡이 된다. 그것은 글쓰기라기보다는 존재의 선언에 가깝다.
이렇게 놓고 보면 만년필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각 펜촉은 하나의 문학적 성격을 품고 있는 하나의 세계다.
우루시 EF 닙은 첫 키스의 날카로움이며, 비스콘티 메디치는 김훈의 응축된 힘이다. 오마스 셀룰로이드는 카프카의 균열이고, 오노토 7호 닙은 조르바의 자유다. 손끝에서 문학은 다시 태어나고, 필감은 문학의 리듬을 흉내 낸다.
우리는 책을 눈으로 읽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문학은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펜으로도 읽혀진다.
종이 위의 마찰, 잉크의 번짐, 펜의 무게와 호흡.
그것들이야말로 문학의 추상적인 감각을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실체다.
한용운의 첫 키스가 날카로웠듯, 김훈의 문장이 절제되었듯, 카프카의 세계가 불안하고 조르바의 춤이 자유롭다면, 펜촉 하나에도 그러한 영혼이 깃들어 저마다의 문학을 품는다.
만년필을 쓴다는 것은 펜으로 문학을 다시 번역하는 일이다.
펜은 단순히 기록하는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철학이며, 세계와 만나는 방식이다.
날카로운 EF의 떨림, 웅대한 바디의 압축된 힘, 화려하지만 부서지는 셀룰로이드의 불안, 자유로이 흘러가는 7호 닙의 춤. 그 모든 것이 문학이다.
문학을 통해 다시 만년필을 쥔다.
펜촉은 곧 문체이고, 문장은 곧 필감이다.
그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
눈으로 읽히고, 손끝에서 느껴지고, 삶 속에 남는다. 날카로운 첫 키스처럼, 오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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