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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은빛 Apr 01. 2023

컴퓨터 학원 강의

생각과 달리 적성에 맞았던 강사시절

이젠 호랑이 껌 씹던 시절로 들리는 8,90년대.

나는 뭔가 "창조자스러운 느낌"이 나는... "프로그래머" 이 단어가 꽤 맘에 들었나 보다. 우리말로 풀어보면 "컴퓨터 프로그램 만드는 놈"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느낌도 있고, 새로운 미개척 분야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나를 이 길로 인도했다.


하지만...

정보처리기사 자격증을 딴 나는 프로그래머가 된 게 아니라 컴퓨터 학원 강사가 되었다. 어느 여상 앞에 있는 학원을 운영하던 선배로부터 호출이 온 것이었다.


"정보처리 (자격증) 땃다메. 함 와봐라"


얼떨결에 불려 간 나는 잠시 하면서 프로그래밍 일거리 찾아보자는 생각에 몇 년을 하게 될지 모를 학원 강사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컴퓨터 안에는 저장하는 장치인 디스크라는 놈이 있는데... 이 안에는 또 가상의 구분을 둬서 디렉토리 라고 하고 그 안에 파일이.... 어쩌구 저쩌구... "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한 학생들은 앞에 선 바싹 마른 강사를 바라보며 앉아 있다. 수업을 듣는지 강사를 살피는지 둘 다인지 모를 얼굴들을 하고.




"디아이알 엔터(dir <enter>)를 하면 컴퓨터 안에 들어있는 정보를 보실 수... 어쩌구 저쩌구"


5개월 간 머물던 여상 앞 학원을 떠나 성인들이 오는 학원으로 옮겼다. 그곳은 일반인 대상 50분짜리 같은 수업을 오전 2개, 야간 4개씩 편성해 놓고 "언제든 와서 수강할 수 있"도록 홍보를 했다. 하지만 같은 얘기를 하루에 여섯 번씩이나 해야 하는 강사는 여간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1~2명만 찾아오는 야간 마지막 시간이 되면 아무리 천천히 수업을 해도 10~15분이 남았다. 그렇다고 더 진도를 나갈 수 없는...




"상단에 a라는 변수를 선언하면 메모리 영역 안에 1바이트짜리 공간이 예약되고, 그다음 변수를 초기화할 때 예약된 메모리 안에 알파벳 대문자 'A'를 넣을 경우 컴퓨터가 알 수 있는 이진수 값인 "0100 0001"이라는 ASCII 코드값으로 저장이 되며... 어쩌구 저쩌구..."


다시 대구 중심부의 가장 오래된 컴퓨터 학원으로 옮겨간 나는 드디어 컴퓨터 기초 활용이 아닌 랭귀지(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 수업을 맡게 되었다. 학기 중엔 지역의 대학생들이 찾아왔고, 여름방학이 되면 서울로 유학 갔던 대학생들이 귀성하여 찾아오는 탓에 북새통을 이뤘다. 소위 "서연고서성한"으로 시작하는 거의 모든 인서울과 인대구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그중 내게 기억에 남게 한 친구들이 몇 있었는데...

서울대 공대생이 개강일 보다 이틀 지나서 수강을 해 왔다. 꼭 설대생이 아니래도 이틀 치 수업 내용은 맘만 먹으면 따라잡을 수 있건만, 이 친구는 와서 내내 잠만 자는 거였다.


"OO 씨 서울대 맞아요? ㅎㅎㅎ"

쉬는 시간에 농담을 던지면 그 친구는

"엄마가 가라그래서 왔어요"

ㅋㅋㅋㅋ.


이십여 년이 지나 이제야 고백하자면

그 학원이나 본 강사나 지역 초대생부터 서연고서성한 학생까지 섞인 강의실에서 학생들 모두에게 적절한 수업을 제공할 수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지금 생각하면 좀 미안하지만 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ㅠ




생각 외로 학원 강의는 내 적성에 맞았다.

원래는 내성적인 성향의 아이였지만, 8,90년대 시국 시위 때 더러 연단에 나가 연설을 하기도 했던 게 도움이 된 건지, 아니면 내 안에 교육기술자의 피가 흘렀던지 알 수는 없다. 강의 준비를 위해 연구를 하고 교안을 만들고 하는 게 재미있었다. 그리고 처음 보는 수강생들과 미묘한 기싸움을 하며 흡입력 있게 끌어당겨 오는 맛이 괜찮았다. 컴퓨터 언어 쯤 배우러 오는 학생이면 나름 컴 관련 공부 좀 했다는 얘기고, 하다 잘 안 돼서 왔으니 '강사 니가 얼마나 잘하나 보자' 하는 경우가 있는데, 초장에 기선 제압(^^)을 하지 않으면 수업이 어려워진다.


하지만 강의가 적성에 맞고 매력이 있다 해도, 낮은 임금과 보장되지 않는 미래와 무엇보다도 목이 너무너무 아파서 도저히 수업을 해 나가는 게 어려웠다. 고등학생 때 수업 중 필기 잔뜩 해 놓고 가급적 말을 적게 하려던 선생님들의 고충을 이해하게 되었다. 인어공주가 걸을 때마다 다리를 칼로 찌르는 고통이 있다면 강사나 교사는 말할 때마다 칼로 목을 쑤시는 고통이 몰려왔다.


이때 몇 명이 모여 컴퓨터 벤처기업을 하던 후배로부터 함께 하자는 제의가 왔다. 내 능력이 필요하다기보다는 나를 스윽 끼워 주겠다는 제안이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오 년여 정든 학원 강의여 안녕! ^^


- 다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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