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김대령의 '훈하말씀' 인지 '잔소리'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긴 연설이 이어진다. 나는 멍해지는 머릿속을 붙잡아야 할지 안드로메다를 돌아다니게 내버려 둬야 할지 분간하기 어려워져 갔다.
이 인간이... 아니 이 양반은 분명 밟는 게 취미이자 특기일 것이다.
- OOO 분석모델에 대해 보고를 시작 하겠...
하는 순간 김대령의 입은 쉴 새 없이 가동되기 일쑤였다.
- 어이... 송 부장! 그게 말이야...
- 야. 김소령.. 이건 체크하고 있는 거야?
- 윤 팀장! CBD(컴포넌트 기반 방법론) 쓰면 금방 개발 완료되는 거야?
송 부장이고 윤 팀장이고 간에 갑을 관계이며 계급도 깡패인 데다가 말발도 무시할 수 없는 김대령을 상대하기란 거의 '고양이 앞에 쥐' 신세 일 수밖에 없었다. 대개의 경우 연대장, 여단장 레벨인 대령쯤 되면 좀 무게감이 있기 마련인데 이 분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심각한 상황이연출되다가도 점심시간 벨이 울리는 순간 모든 것이 정지된다. 마치 자정의 신호에 신데렐라 마법이 풀려 타고 온 은마차가 허름한 수레가 되고, 화려한 드레스는 누더기 하녀 옷으로 변하듯, 혹은 법정에서 판사의 '휴정하겠습니다' 신호라도 되는듯 대령 이하 모두가 식사를 하러 나선다. 아마 사기업이었으면 '오늘 점심은 틀렸구나...' 하게 될 터인데^^
○○ 사령부 정문을 빠져나왔다.
- 팀장님... 점심을 어떻게...?
- 젠장할 점심은 뭔 점심.ㅠㅠ
팀장은 아마 또 사무실 옥상에 올라 하릴없이 담배를 물고 먼 곳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 눈에 선하다. 다행인 점은 개발실이 있는 건물이 삼층에 불과하여 혹여나 팀장의 안위를 심각하게 걱정해야 할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마포대교. 난 그냥 한강다리가 건너 보고 싶었을뿐^^
일장연설이 취미인 김대령과 같은 육사 출신인 전 직장의 대표이사는 직원들에게 맞짱의 기회를 제공했었다. 어찌 생각해보면 '그 정도는 수용할 수 있으니 어디 한번 도전해봐라', '후후.. 니들이 까불어봐야 내 손바닥 안이다' 하는 듯한 여유 혹은 넓은 포용력으로 생각되곤 했다. 난 제공된 기회 아래 '나의 견해'라는 이름으로 대표이사와 맞짱(토론^^)을 뜰 수 있었고, 권력자와의 적정한 수준에서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어느 간부급 회의에서 나는 일반 직원의 이직율에 대한 사장의 정책('나가도 그만'이고 '가는 놈 붙잡지 않는다'는^^)에 반대 의견을 제시했고 소소한 논쟁까지 이어졌다. 사장은 나와 단둘이 있게 된 어느 자리에서 넌지시 내게 한마디 건넸다.
- 자네 말대로 직원들 대하려고 내 스타일 확 바꿨다. 느껴지냐?^^
간부급 직원들 CBD 방법론 교육하겠다고 나섰던 주말 어느 날. 나는 이런저런 현장의 실정을 얘기하고 한가지 질문을 던졌다.
- CBD 방법론의 어느 곳에 실제 수행 주체인 인간에 대한 배려가 있을까요?
정보기술 개발에는 더 원활한 수행을 위해 CBD니 SOA니 따위의 각종 개발 방법론이 넘쳐나고 있었다. 하지만 각 개발자의 수준이나 작업 및 근무 환경이 다르고, 무리한 일정과 잦은 요구사항 추가와 변경이 판치는 한국의 개발현장에서, 과연 이 방법론들이 현실적으로 적용될 수 있을지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법론의 행위들이 결국 개발자 개개인의 많은 혹은 무한한 희생을 기반으로 해야만 효과를 보는 것이 현실이기에.
내가 '인간에 대한 배려'라는 지극히 관념론적으로 보이는 주제를 던지자 함께하던 개발이사, 부장 차장 등은 코웃음을 쳤다.
- 쟤 뭔 소리 하는 거야?
하는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빨리 끝내고 집에 가야 하는데 뭔 쓸데없는 소리냐는 등 구시렁거림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그때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 허.. 박사 논문 감이로군!
해결책이 있건 없건 누군가가 들어주고 공감해 준다는 사실 만으로도 표면적인 치유가 되는 경우를 종종 보곤 한다. 나와 사장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런 것이 작용했던 것이 아닐는지...
그러나 이젠.
그 주어진 한계 내에서 나를 허용해 주고 내 도전을 받아 주던 그분은 곁에 없다. 지금은 내가 잽을 내기도 전에 상대는 훅을 날리고 연속 스트레이트로 나, 우릴 유린했다. 두들겨 맞다가 죽지 않으려 간혹 헛되이 왼손 잽을 한번 내어보기도 했다.그로키 직전 종료 벨(점심 벨)이 겨우 우릴 살리자 상대는 인자한 미소를 띠며 어깨를 툭툭 토닥여준다.
- 내가 아프라고 때리는 게 아니야~
어둑해지는 퇴근길 도로를 벗 삼아 차를 몰았다.
불현듯 달리고 싶어졌다. 집, 회사, 집, 회사 하는 사이
나의 질주 본능은 저 구석 어딘가에 쳐 박혀 잠자고 있고 은색 세단의 엔진은 골골거리며 무료해한다.
유성IC 사진이 없어서 국회가 보이는 야경으로...ㅋ
유성 IC 하이패스 통과한다.
'북으로 갈까? 남으로 갈까?'
좌측 길을 따라 방향을 잡고 본선 진입을 한다.
크루징 모드로 잠시 80킬로미터 전후의 고속도로 흐름을 주시한다.저 앞에 트럭이 보인다.
- 다 주겄어...C.
수동모드로 바꿨다. 기어를 5단으로 내리자 이천 대 알피엠이 삼천 대를 향해 튀었다. 아니 약하다. 4단 기어로 바꿨다. 엔진이 굉음을 내며 알피엠은 급상승한다. 순식간 눈앞에 트럭이 보인다. 차선을 바꿔 추월한다. 5단으로 변경한다.
다음 상대는?
차종 식별 불가 검은색 세단.
액셀을 밟는다.
제친다.
찰나의 질주를 한 번 해주고 나자 도로가 막힌다.
잠시 숨 고르기를 하고 다시 길이 트였다.
4단으로 변경한다. 알피엠이 급 상승한다. 밟았다.
순식간 100킬로미터 퍼 아워를 돌파하며 알피엠은 4천, 5천, 6천 하며 상승한다. 레드존을 치고 엔진은 굉음을 내며 질주한다. 주행 차선의 차량들이 빠르게 내 뒤로 비켜선다.
- 뎀벼라... 쉐이들...^^
알피엠과 속도에 맞춰 증가한 오디오 음량이 실내를 때린다. '메탈리카' 커크 해밋의 기타 리프와 라스 율리히 드럼의 헤비메탈 사운드가 6개의 스피커를 찢어댄다.
제목이... 허허!
METALLICA의 <To Live is To Die>
To Live is To Die 가 수록된 메탈리카의 앨범
절묘한 랜덤 선곡일세!
To Live is To Die 일까? To Die is To Live 일까?
나는 달리고 싶다.
터질듯한 심장의 박동을 재우기 위해
나는 질주하고 싶다.
'델마와 루이스'가 저 앞 그랜드 캐넌의 벼랑에서 날 기다릴지라도...
승용차, 트럭, 버스로 뒤덮인 대전 외곽 순환 고속도로가 순식간 내 앞을 가로막는다. 시간대를 잘못 택했다. 퇴근 시간대에 질주하자고 덤비다니.
아쉬운 나의 질주는 평범한 퇴근길 차량의 어둠 속에 묻혀 버리고, 네비 아가씨가 알려주는 '50킬로미터 이하의 속도로...'에 맞춰 계기판을 신경 쓰며 하나의 희미한 불빛으로 사그라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