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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은빛 Oct 22. 2023

VP를 위한 변명

프로젝트 도중 교체되는 PM을 위한 기록

< VP를 위한 변명 >


1. 논현동


주말사이 뚝떨어진 기온에 스산한 바람이 시월의 거리를 휘감고, 뒹구는 낙엽은 내년을 기약하는 세이 굿바이를 속삭인다. 지금과는 달리 따스한 봄바람이 논현동을 감쌀 때 나는 '그'를 처음 만났다. 면접관으로 만난 그는 인터페이스 경험 여부를 중요하게 여기는 듯했고, 평범한(?) 인터페이스 경험위주로 했던 나는 변변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에구. 점수 많이 깎였겠는데요?"

"아니에요. 꼭 그런 건 ^^"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자면 법원과 법무부, 검찰, 경찰 등과 여러 인터페이스를 처리해야 하는 프로젝트 특성을 반영한 면접 질문이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면접관의 시선에 필요한 여러 가지 고려요소가 있었을 것이고, 그 요소 내에 포함된 어느 항목이 내게 있었던 듯하다. 건물을 나와 논현역으로 향하던 중 소속사로부터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출근 첫날 서먹하고 어색한 분위기 속에 몇몇을 만났다. 곱슬머리와 큰 키에 류OO, 말투가 좀 어색해서 어디 미국물 먹다가 왔나 싶었던 나OO 등등. 그리고 며칠 뒤 사람 착하게 생긴 이OO도 합류했다. 그리고 왔다가 사라진 몇몇 등.


논현동에서 보낸 몇 개월을 관찰자 시점으로 다시 보자면, 대법 프로젝트 수주의 첫 단추였던 '제안기간'에의 참여는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던 것 같다. 논현동 출근 2주 만에 제안서 제출일이 다가왔다. 프로젝트 1차 공고 이후 몇 달이 지났고, 그때부터 준비했던 제안서였기에 뒤늦게 참여한 우리가 고수준의 제안서 작성에 기여하기는 쉽지 않았다. 적당한 수준으로 마무리하고 나니 정작 중요한 마감작업은 '그'의 일이 되었다.


"이제 제가 마무리하면 돼요. 이런 거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고.^^ 수고하였어요"


그는 웃는 얼굴로 고생했다고 말했지만 실제 고생의 절정은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과거 여러 차례 제안작업에 강제 징용된 노동자처럼 참여해 봤던 기억에 의하면.


2. 생과 미생 사이


제안서 단독 제출과 발표를 무사히 마쳤다. 나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PT발표에 다녀온 류OO의 표현에 의하면 그의 PT발표는 '끝내줬다'라고 한다. 그리고는 결과가 바로 나올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최종결과 소식은 오늘도 내일도 전해 오지 않았고, 우리는 나라장터를 새로고침, 새로고침 하면서 하염없는 초조함에 시달리게 되었다. 애초에 커다란 제약조건을 갖고 있던 프로젝트라 그런지 쉽사리 최종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법도 '재고' 있었고, 그와 회사도 검토에 검토를 계속했다.


차일피일 결과가 미뤄지는 탓에 왕복 4시간에 달하는 강남으로의 출퇴근의 끝이 계속 연기되고 있었다. RFP 분석이나 Function Point 연구를 진행하고, 더러 경찰청 프로젝트에 소소한 지원을 하며 결과를 기다리는 학생 신세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사전연구'나 지원을 해 봐야 얼마나 할 것이며 그 초조함이나 지루함은 적절한 일이 주어졌을 때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하였다.


'그'는 이런저런 이야기하기를 즐겼다. 이야기 소재는 야탑 대법원으로 갔을 때 해야 할 일들도 있었고, 과거 프로젝트 수행 경험담, 인생이야기, P사 입사 후 사업부 체제에 대한 이야기 등등 다방면으로 이어졌다. 어느 날은 출근 후 근처 카페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점심때가 되어 식사를 같이하고, 학동 공원을 같이 한 바퀴 돌고, 학동 근처 가정집을 개조한 듯한 카페에서 또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회사 옥상의 철제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4시쯤 '이제 사무실로 내려갈까요?' 했던 전설적인(^^) 날도 있었다. 함께 경험하지 않은 3자가 건조하게 쓰인 문장만 보자면 '웬 할 말이 그리 많을까?' 할 테지만, 내겐 그의 '초조함의 발로'로 읽혔다. 나와 류OO이 초조해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것 이상으로,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야탑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생각했다.


3. 결정? 결단?


6월 말에 가까워질 무렵 대표이사의 '야탑 프로젝트 불참' 결정 소식이 들려왔다. 자세한 이유나 내막을 내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애초에 위험부담을 안고 있던 프로젝트인데, 위험요소를 더 강조한 '불참파'와 중견회사 입장에서 수주 및 성공해 냈을 때의 이점을 더 강조한 '참여파'의 의견대립에서 불참파가 승리한 것이다. 그는 많이 낙심한 듯 보였다. 하지만 또 다른 사업을 위해 if의 else 문을 수행하는 모습을 보면 역시 리더는 리더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논현동 생활이 끝이 났구나'


나는 그의 '다른 프로젝트 수주나 수행을 위해 남아서 함께하자'는 제안에 정중히 거절했다. 함께 목표하던 대어를 잃고 아직 정해지지도 않은 소소한 파이를 나눠 먹기에는 서로의 처지가 비루해 보였다. 하지만 함께 한 멤버를 끌어안고 가겠다는 그의 제안에는 감사하게 생각했다.


나대로 다른 프로젝트를 알아보던 중 '모'사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로 결정 난 날이었다. '불참' 결정이 '참여' 결단으로 바뀌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소식에 따르자면 '기술협상'에서 대법 측이 회사의 요구사항을 상당 부분을 수용하기로 해서 참여하기로 최종 결단을 했다는 것이다. 과정은 모른 채 결론의 파편들만 듣다 보니 '이 무슨 장난도 아니고' 하는 생각도 스쳐갔지만, 그래도 몇 개월 간 목표했던 것의 결론이 드디어 눈앞에 현실화됨에 함께 기쁨을 나눌 수 있었다. 물론 누구보다 기뻤을 것이고, 또 누구보다 무거운 책임감이 시작된 것은 '그' 였을 것이다.


그는 서둘러 프로젝트 수행을 위한 진용을 구축해 갔다. 애초 수주를 전제로 감수하고 있었던 나와 류OO 그리고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고 있던 이OO 외에 보강 멤버가 필요했다. 그는 이런저런 유능한 분들을 면접했고, 또 이런저런 사항들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보강된 멤버들과 함께 드디어 8월 첫날 우리는 야탑으로 향했다.


4. 야탑 그리고...


야탑에서의 첫걸음 이후 내딛는 발걸음들이 순탄치는 못했다. 애초에 커다란 내외부 변수를 안고 시작한 것이 우리 프로젝트였다. 현 구성원 모두가 대체로 함께 경험한 8월 이후의 상황은 특별히 기술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그'가 프로젝트를 떠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사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이 프로젝트에 누구보다 애착이 있었고 누구보다 더 성공적으로 해내고 싶었을 사람이 '그' 였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상황이 깨져 버렸다. 여러 감정들이 있겠지만, 서로 미운 정과 고마운정이 혼재된 그와의 관계를 생각하자면 착잡한 심경이 주말 내내 나를 괴롭힌다.


삼국지연의 식으로 과하게 표현하자면...

나는 지난 4월에 그를 '주군(主君)'으로 만났다. 그의 곁에는 관우, 장비 격인 '이OO'와 '류OO'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제갈량'이 되지 못했고, 그는 나의 '유비'가 되지 못했다. 반년 넘게 그를 주군으로 보필했고, 이 시점에 그의 '순장(殉葬)'조가 되지 못함에 일말의 미안함도 느끼게 된다. 무주공산에 무혈입성을 했건, 벅찬 사업을 수주했건, 이 프로젝트를 위해 그가 헌신한 노력과 고뇌는 높이 평가하고 싶다. 그의 도전으로 인해 IT 한파가 몰아치는 현시점에 2십여 명이 한파를 피할 수 있는 커다란 지붕이 만들어지지 않았던가!


나는 주군이었던 그를 VP(Very important Person)라 불렀고, VP를 위해 '스타벅스 커피 쿠폰'을 대신해 지난 반년의 소소한 기록을 남겨본다. 그리고는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책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차용한 제목으로 짧지도 길지도 않은 이 글에 <VP를 위한 변명>이라 제목을 붙여 본다.

나의 주군 VP의 무한한 건승을 바라며.


2023.10.22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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