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히지 않는 명작, 혹은 오독된 신화

천명관 『고래』를 다시 읽는다

by 안녕 콩코드



“이야기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끝에 닿았는가.”


2004년, 천명관이라는 이름의 신예 작가가 『고래』라는 거대한 서사의 괴물을 이끌고 문단에 등장했을 때, 문학계는 그 압도적인 서사력과 자유분방한 상상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소설은 발표 직후 주요 문학상을 휩쓸었고, “신화적 상상력의 부활”이라는 찬사를 끌어냈다. 그러나 20년이 흐른 지금, 『고래』는 ‘읽힌 작품’이라기보다 ‘말해지는 작품’에 머문 듯하다. 책장에 꽂혀 있는 이 소설은 여전히 많은 이들의 목록 속에 있지만, 실제로 마지막 장을 덮은 독자는 생각보다 드물다. 무엇이 독자를 이 소설로부터 멀어지게 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지금 다시 『고래』를 읽어야 할까?


이야기의 과잉, 그러나 중심은 있다

『고래』는 문장보다 이야기가 앞서는 드문 소설이다. 설화와 민담, 근대사의 격랑과 가정폭력, 시장 경제와 남성 중심적 세계관, 장터의 소란과 싸움판의 에너지, 산속 여인과 신화 속 흰 고래까지—이 작품은 말 그대로 ‘이야기의 백화점’이라 불릴 만하다. 천명관은 한 사람의 삶을 따라가면서, 그 주변의 인물들, 마을과 지역, 시대적 정황과 상징까지 모두를 서사의 무대 위에 올려놓는다.


문제는 이 모든 것들이 일시에 쏟아질 때, 독자가 방향을 잃기 쉽다는 데 있다. 과잉된 정보와 인물, 중첩되는 장면은 마치 끝없이 열리는 러시아 인형처럼 독자를 서사의 미궁 속으로 끌어들인다. 어디서 멈춰야 할지, 어느 이야기가 중심인지 갈피를 잡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방대한 서사는 결국 하나의 축으로 수렴한다. 바로 ‘크고 위대한 삶에 대한 갈망’이다. 『고래』가 결국 몰락과 파멸의 이야기로 읽히면서도, 독자로 하여금 끝내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이유는 그 욕망의 크기와 결이 우리 모두의 것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삶을 꿈꾸다 미끄러지는 그 비극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그림자를 본다.


금복, 비극의 얼굴인가, 소비된 여성인가

『고래』의 서사 중심에는 금복이라는 인물이 자리한다. 그녀는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팔려나가고, 술집 작부가 되어 삶의 밑바닥을 거치며, 흰 고래를 보기 위해 산을 넘고, 끝내는 자신의 극장을 세운다. 분명 금복은 이 소설의 주인공이며, 격동의 시대를 건너는 여성이다. 그러나 그녀의 이야기는 능동적으로 쓰이지 않는다. 금복은 ‘행동하는 주체’라기보다는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존재’, 혹은 서사적 필요에 따라 배치된 ‘인물의 형상’에 더 가깝다.


이 지점에서 독자는 본질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천명관은 금복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가? 그녀는 시대의 희생자인가, 아니면 작가가 설정한 구조 속에서 기능하는 장치에 불과한가? 소설은 이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리지 않는다. 오히려 금복의 고통과 욕망, 무너짐의 순간들은 때로 과장되거나, 시적 이미지에 포획되어 모호하게 흐려진다.


결국 『고래』는 이 모순 위에 서 있다. 여성의 삶을 통해 시대와 욕망, 파국을 말하려 했지만, 정작 그 여성은 철저히 타자화되고 소비된다. 금복의 삶은 이야기의 진원지인 동시에, 가장 뚜렷하게 대상화된 흔적이기도 하다. 이 모순이 『고래』의 힘이자, 동시에 비판의 지점이 된다.



유희로서의 서사, 그 한계와 가능성

천명관의 문체는 경쾌하고 유연하다. 구술 문학에서 비롯된 리듬감, 재치 있는 전환, 시대적 풍자와 농담이 쉼 없이 이어진다. 마치 이야기꾼이 무대 위에 올라 관객을 향해 손짓하며 “이리 와서 들으라”고 외치는 듯한 생동감 있는 문장들이다. 이 유희의 서사는 분명 읽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터뜨리게도 하고, 문학의 경직된 틀을 흔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 경쾌함이 항상 독자를 환영하는 것은 아니다. 과도한 수사와 빈번한 전환은 때로 가독성을 해치고, 이야기의 긴장을 분산시킨다. 독자는 즐거움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장면으로 휩쓸리지만, 그만큼 피로감도 누적된다. 이야기를 따라간다는 느낌보다, 이야기의 소용돌이에 떠밀린다는 감각이 더 크게 다가올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스타일은 한국 문학에서 점점 희미해진 ‘이야기성’의 복원을 선언한다. 천명관은 정제된 문장과 이성적 구성을 넘어, 흘러넘치고 일그러지며 요동치는 서사의 힘을 믿는다. 『고래』는 그런 믿음이 낳은 결과물이다. 삶이란 본디 선형적이지 않고, 모순과 과잉, 우연과 비약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이 소설은 온몸으로 증명한다. 그 점에서 『고래』는 문학이 다시 ‘이야기’를 되찾아야 한다는 하나의 선언이며, 그 자체로 하나의 실험이자 가능성이다.


‘고래’는 무엇의 은유인가

소설의 제목이자 중심을 이루는 ‘고래’는 실체가 없는 존재다. 그것은 금복이 평생을 쫓는 환상이자, 그녀가 세운 극장이며, 끝내 도달하지 못할 욕망이자 파멸의 이름이다. 고래는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내내 어딘가에 존재하는 듯한 감각을 남긴다. 그 점에서 고래는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추구해 온 ‘근대화’의 환영과 닮아 있다.


근대화란 늘 어딘가를 건너고 넘어야만 도달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손에 쥘 수 없는 유령과 같은 것이었다. 금복이 자신의 몸을 내맡기고, 타인을 밟고 지나치며, 모든 것을 잃은 끝에 세운 ‘극장’은 그 유령이 남긴 허상이며, 동시에 그녀의 욕망이 남긴 폐허다. 고래는 끝내 떠오르지 않고, 금복은 광인의 얼굴로 서사의 끝에 남는다.


이 결말은 어떤 구원도, 성장의 서사도 허락하지 않는다. 『고래』는 현실이라는 물속에서 끝없이 흔들리다 가라앉은 한 인간의 형상을 통해 묻는다. 우리가 쫓았던 것, 우리가 믿어온 것—그 모든 것은 과연 실제했는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고래처럼, 그저 존재한다고 믿고 싶었던 환상이었는가.


문학의 이름으로 남겨진 고래

『고래』는 결코 친절한 소설이 아니다. 복잡하고, 무겁고, 방향을 잃기 쉽다. 그러나 그 복잡함의 심연에는 지금 우리가 마주해야 할 질문들이 숨 쉬고 있다. 인간의 욕망은 어디까지 뻗을 수 있는가. 우리가 꿈꾸는 ‘더 크고 위대한 삶’은 과연 도달 가능한 것인가. 문학은 바로 그 질문을 외면하지 않고 응시하는 예술이며, 『고래』는 그 응시의 치열한 흔적이다.


만약 지금 당신이 『고래』를 다시 펼친다면, 처음과는 전혀 다른 목소리들이 페이지 너머에서 말을 걸어올 것이다. 그것이 문학의 힘이다. 질문을 남기고, 침묵 속에서 다시 말을 시작하게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고래』가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있는 이유다.


『고래』는 독자를 불편하게 만들고, 때로는 길을 잃게 한다. 그러나 바로 그 불편함과 혼란 속에서 우리는 오래된 욕망의 윤곽, 지워진 목소리의 흔적, 그리고 이야기라는 존재가 품은 생명력을 마주하게 된다. 문학은 완성된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고 어긋난 삶을 감각하는 예술이다. 그래서 『고래』는 지금도, 조용히 당신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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