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거스미스』, 거짓의 무늬로 수놓은 사랑

기만과 욕망, 그리고 진실을 찾아가는 두 여성의 미로 같은 여정

by 안녕 콩코드


프롤로그 – 어둠의 길목에서 시작된 이야기

한 권의 소설, 그것도 500쪽이 훌쩍 넘는 두터운 장편이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순간도 독자의 손을 놓지 않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세라 워터스의 『핑거스미스』는 그 어려운 일을 능란하게 해낸다. 이 작품은 빅토리아 시대의 음습한 공기를 고전적인 문체로 되살려내면서도, 단순한 플롯의 반전이나 범죄 서사의 흥미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 안에는 사랑과 기만, 정체성과 욕망, 계급과 억압이라는 근본적인 인간의 이야기가 겹겹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그 복잡한 서사의 중심에는, 서로 다른 세계에서 태어나 서로의 거울이 되어가는 두 소녀가 있다.


줄거리 – 한 편의 미로처럼

『핑거스미스』는 첫 장부터 독자의 시선을 단단히 붙잡는다. 런던 빈민가에서 태어나 도둑과 사기꾼들 틈에서 자란 소녀 수 트린더는, '젠틀먼'이라 불리는 매혹적인 사기꾼의 계략에 휘말리게 된다. 그의 계획은 단순하면서도 교묘하다. 귀족 아가씨 모드 릴리를 유혹해 결혼하게 만든 뒤, 그녀를 정신병원에 가두고 유산을 가로채려는 것이다. 수는 그 작전에 협력하면 후한 보상을 약속받는다. 그러나 모드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수는 예상치 못한 감정에 휘말리고, 그것은 차츰 사랑으로 번져간다.


여기까지는 금지된 사랑과 배신의 이야기로 보인다. 하지만 이 소설의 진짜 시작은 그 지점에서부터다. 책의 중반, 시점은 돌연 모드로 전환되며, 이전까지 알고 있던 사실들이 하나둘씩 무너져 내린다. 수의 시선으로 보았던 사건들은 전혀 다른 빛을 띠며 재구성되고, 독자는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누가 누구를 속였는지, 진짜 사기꾼은 누구였는지, 사랑이라 믿었던 감정은 과연 진실이었는지—이 모든 질문이 독자의 발목을 붙든다.


『핑거스미스』는 정교하게 설계된 미로 같다.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어려운 그 미로 속에서, 독자는 계속해서 자신의 판단과 감정을 의심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세라 워터스가 독자에게 선사하는 가장 치명적인 기만이자 마법이다.


인물 – 정체성의 감옥 속에서

『핑거스미스』가 독자의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중심인물들의 심리 묘사가 놀라울 만큼 치밀하고 설득력 있기 때문이다. 수 트린더는 거리의 냄새와 말투, 생존의 기술을 본능처럼 체득한 인물이다. 그녀의 몸에는 빈민가의 삶이 새겨져 있고, 세상을 향한 의심과 민첩함이 언제나 깨어 있다. 반면, 모드 릴리는 귀족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안에는 억눌린 욕망과 감정, 남성 중심의 세계 속에서 강요된 순응의 껍질이 켜켜이 쌓여 있다. 그녀는 단정하고 조용한 얼굴 뒤에, 폭발 직전의 내면을 숨기고 살아간다.


이 두 인물이 서로의 삶에 깊이 스며들며, 각자의 세계는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한다. 수는 사기극의 도구로 접근했지만, 점차 모드를 통해 자신이 지녀온 삶의 정의와 감정의 진실에 의문을 품게 된다. 모드는 수를 통해 세상의 잣대와 자신이 내면에 품어왔던 모순을 마주하고, 처음으로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에 눈을 뜬다.


이 작품에서 정체성은 단순한 배경이 아닌, 끊임없는 싸움의 장이다. 수는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 속하는가”를 반복해서 자문하고, 모드는 귀족이라는 이름 아래 감춰진 또 다른 감옥에서 신음한다. 이들은 단순한 범죄 서사의 희생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사회의 폭력적 구조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굴해 내고, 진정한 자아로 거듭나려는 고통스러운 여정을 걷는 존재다.



배경 – 빅토리아 시대, 억압과 위선의 그림자

세라 워터스는 빅토리아 시대를 단순한 시간적 배경으로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녀에게 이 시대는 하나의 인격을 지닌 존재, 즉 소설의 제3의 주인공으로 기능한다. 어두운 런던의 뒷골목, 광기로 가득한 정신병원, 웅장하되 냉기 어린 시골 저택—이 모든 공간은 등장인물들의 감정과 욕망을 억누르며, 때로는 그들을 질식시키고 무너뜨리는 압력으로 작용한다. 그 속에서 인물들은 감추고 감춰야 하는 자신을 품은 채 살아가며, 점차 자신의 껍질을 깨는 법을 배워간다.


특히 주목할 만한 상징은 ‘책’이라는 매개다. 모드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외설 문학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일을 맡고 있는데, 이 설정은 단순히 고전적 배경 장치로만 읽히지 않는다. 여성이 문자를 다룬다는 행위, 더구나 그것이 성적인 텍스트와 연결된다는 사실은 지식과 욕망, 억압과 해방이라는 이중적 층위를 드러낸다. 책 속 문장과 페이지를 넘기는 그녀의 손끝에는, 시대가 강요한 순결과 침묵에 대한 은밀한 저항이 깃들어 있다.


이처럼 『핑거스미스』는 단지 사기극이나 로맨스를 넘어, 시대가 품은 위선과 억압을 직조해 낸 정교한 문학적 구조물이다. 세라 워터스는 역사라는 육중한 무대를 배경으로, 인간 본성의 갈등과 열망을 치밀하게 끌어올린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결국, 시대의 그림자를 배경 삼아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깊은 거울이 된다.


주제 – 기만, 욕망, 자유를 향한 투쟁

『핑거스미스』는 단순히 놀라운 반전으로만 기억될 작품이 아니다. 이 소설의 진정한 중심에는 기만과 진실, 욕망과 죄책감 사이에서 흔들리는 감정의 복잡한 결이 놓여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두 여성의 고독하고 치열한 여정이 있다. 서로를 속이면서도 사랑하게 되는 아이러니, 서로를 의심하면서도 결국은 의지하게 되는 그 역설 속에서, 우리는 ‘신뢰’라는 감정이 얼마나 취약하고도 절실한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세라 워터스는 동성애라는 주제를 다루면서도 그것을 도드라지게 부각하지 않는다. 그녀의 인물들은 그저 사랑하고, 상처받고, 갈등하고, 선택할 뿐이다. 그 감정들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너무도 인간적이다. 이 점이 오히려 독자에게 더 깊은 감정의 울림을 남긴다. 두 주인공이 나누는 사랑은 단순한 애정의 감정을 넘어, 사회가 부여한 정체성과 경계를 넘어서는 시도이며, 억압과 위선으로 가득한 세계에 대한 조용한 반항이기도 하다.


결국 『핑거스미스』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자, 속임수와 진실이 교차하는 세계에서 어떻게 인간이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선택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를 묻는 서사다. 그것은 여성들의 이야기이자, 인간 모두의 이야기다.


문체 – 디킨스를 닮은 현대의 고전

세라 워터스의 문장은 고전적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단 한순간도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다. 그녀는 찰스 디킨스를 비롯한 19세기 영국 고전 작가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밝혔으며, 그 영향은 문체의 호흡, 사건 전개의 정교함, 그리고 사회를 바라보는 비판적 시선 속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그녀는 단순히 과거를 답습하지 않는다. 그녀의 문장은 섬세하면서도 감각적이고, 무엇보다 감정의 결을 따라 흐른다. 때로는 고전적인 수사보다도 등장인물의 미세한 떨림을 포착하는 데 집중하며, 문장은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독자의 감각을 자극한다.


특히 이 작품에서 시점 전환이 만들어내는 서사적 반전은 문학적 기교의 정점이라 할 만하다. 사건의 중반부, 모드의 시점으로 재구성되는 이야기는 단순한 반전 이상의 효과를 낳는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장면들이 전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며, 독자는 불가피하게 다시 앞부분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책장을 덮는 순간, 처음부터 다시 읽고 싶다는 충동이 밀려든다.


그러한 점에서 『핑거스미스』는 단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넘어, 다시 읽을수록 더 많은 층위가 드러나는 현대의 고전이라 불릴 만하다. 과거의 언어를 빌려와 현재의 감각으로 빚어낸 이 서사는, 세라 워터스가 얼마나 탁월한 이야기꾼이자 정교한 문장 장인이며, 무엇보다 깊은 감정의 탐구자임을 증명한다.



감상 – 잊히지 않는 문장, 오래 남는 여운

책장을 덮은 뒤에도 한동안 수와 모드의 얼굴이 마음속을 떠돌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의 눈빛이. 사랑을 두려워하면서도 피하지 않았던 그 눈빛, 기만과 혼란 속에서도 끝내 서로를 향했던 확신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핑거스미스』는 단순히 흥미로운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우리가 믿어온 관계와 기억, 사랑은 과연 ‘진짜’일까? 혹은 그것들 또한 누군가가 의도한 이야기 속 조각은 아닐까? 진실이란 과연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감정에서 비롯한 일시적 선택일 뿐인 것은 아닐까?


세라 워터스는 이런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않는다. 그녀는 명확한 해답을 주기보다, 독자의 마음속에 조용히 씨앗을 심는다. 사랑하되 속이지 말 것, 혹은 속였더라도 자신의 감정에는 정직할 것—이 고통스러운 진실을, 그녀는 우아하면서도 잔혹하게, 한 문장 한 문장에 새겨 넣는다.


『핑거스미스』는 읽는 동안의 몰입뿐 아니라, 읽고 난 후의 침묵까지도 이야기의 일부로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숨에 읽고도 오래도록 그 안에 머물게 한다. 그리고 그 여운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읽고 싶다는 충동과 함께, 서서히 다시 우리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당긴다.


에필로그 – 고전의 껍질 속에 숨겨진 날카로운 심장

『핑거스미스』는 장르적으로는 범죄와 미스터리, 퀴어 로맨스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속은 끝없이 문학적이고 치열하게 인간적이다. 고전의 문장을 빌려오되, 그 안에는 현대의 감수성과 날카로운 질문이 숨 쉬고 있다. 이 작품은 단지 ‘재미있는 소설’을 넘어서, 억압과 욕망, 사랑과 진실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 내면의 서사시로 남는다. 마치 고전의 껍질 안에 심장을 숨겨놓은 것처럼, 그것은 격식을 차리면서도 뜨겁고,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격렬하다.


여성 서사, 퀴어 문학, 시대극, 심리소설—이 중 어느 하나라도 당신의 관심을 끈다면, 『핑거스미스』는 반드시 읽어야 할 작품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진정한 힘은, 관심의 영역을 초월한 그 어딘가에 있다. 이야기의 반전보다 더 강렬한 것은, 그 반전 이후에도 멈추지 않는 정서의 파동이다.


책을 덮은 순간, 우리는 어쩌면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누군가를 속였던 기억, 사랑을 믿고 싶었던 순간, 나조차도 알지 못했던 나의 얼굴을 떠올리며. 왜냐하면 이 소설은, 독서를 마친 뒤에도 오랫동안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읽히는’ 이야기로 남기 때문이다.




『핑거스미스』를 감명 깊게 읽으신 분이라면, 그 여운을 이어갈 수 있는 아래의 작품들도 추천드립니다. 공통적으로 여성 서사, 정체성과 욕망, 사회적 억압, 미스터리한 구조, 그리고 문학적인 문체라는 키워드와 맞닿아 있습니다.


『핑거스미스』의 여운을 따라, 함께 읽으면 좋은 번역소설들


1. 《야경꾼》 – 세라 워터스 (열린책들)

- 전쟁의 폐허 속에서 서로를 지켜보는 여성들

2차 세계대전 후의 런던. 시간의 거꾸로 흐름 속에서 전쟁과 억압, 그리고 잊힌 사랑이 서서히 드러난다. 『핑거스미스』 이후 읽기에 가장 적절한 자매작.


2.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김영하 (문학동네)

- 삶과 죽음 사이, 정체성을 파괴하며 찾아가는 자아

도발적 제목처럼, 인간 존재의 허무와 위선, 도시의 냉기를 따라가며 그리는 감각적인 죽음의 초상.


3. 《작은 친구들》 – 도나 타트 (은행나무)

- 유년기의 상처를 끌어안고 진실을 추적하는 성장 서사

잃어버린 오빠의 기억, 거기서 시작된 소녀의 추적. 고요하고도 강렬한 문체로 그려낸 고통과 성장의 이야기.


4. 《올리브 키터리지》 –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문학동네)

- 평범한 삶 속 숨겨진 복잡한 감정의 풍경화

한 노년 여성의 삶을 통해 조망하는 작은 마을의 인간 군상. 『핑거스미스』가 인물의 내면을 정교하게 풀어냈다면, 이 작품은 ‘삶 전체’에 대한 시선.


5. 《레베카》 – 대프니 듀 모리에 (열린책들 외)

- 죽은 여인의 그림자가 드리운 저택에서 피어나는 고딕 서사

불안, 질투, 그리고 알 수 없는 과거의 흔적. 『핑거스미스』의 저택 배경과 정서적 유사성이 돋보이는 고전 미스터리의 대표작.


각 작품은 『핑거스미스』와 마찬가지로 한 번 빠지면 쉽게 헤어나올 수 없는 강렬한 정서와 문학적 깊이를 지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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