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 이후의 인간 이해
4장. 기억, 용서, 그리고 사회적 망각
프랭클: 사회적 치유와 희망의 길
빅터 프랭클의 사유는 단순한 개인의 고통을 넘어서, 그 고통이 사회 전체의 치유와 희망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에 깊이 주목한다. 그는 ‘의미치료’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이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행위가 단순한 심리적 회복을 넘어 정신의 자유를 획득하는 근본적인 과정임을 보여주었다. 이 자유는 곧 개인만의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희망의 씨앗이 된다. 그래서 프랭클에게 기억은 과거의 무거운 짐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발걸음을 안내하는 교훈이자 희망의 원천이었다.
전쟁과 강제수용소라는 극한의 경험을 거치면서, 프랭클은 사회가 집단적으로 고통을 공유하고 그 기억을 치유의 도구로 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그는 고통을 ‘극복 가능한 과제’로 규정하며, 집단의 기억 속에서 과거의 상처를 ‘의미 있는 이야기’로 재구성할 때, 비로소 용서와 화해, 그리고 공동체의 회복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이 과정은 단순한 과거 청산을 넘어, 공동체가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새로운 시작’이었다.
그의 사유에서 용서는 그저 관대한 마음이나 무조건적 이해를 뜻하지 않는다. 용서는 고통의 굴레를 끊고, 인간 내면에 숨겨진 자유를 회복하는 윤리적 행위였다. 더 나아가 사회적 평화와 지속 가능한 공존을 위한 필수적인 덕목이었다. 프랭클은 개인과 사회 모두가 이 용서를 통해 폭력과 고통의 역사에서 벗어나고, 희망을 품고 나아갈 수 있다고 확신했다.
아메리: 용서 부정과 집단적 망각에 대한 경고
장 아메리는 프랭클의 낙관적인 사회적 치유와 용서의 서사에 대해 깊은 회의와 비판을 제기한다. 『죄와 속죄의 저편』에서 그는,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경험한 극단적 폭력과 고통의 기억은 결코 ‘화해’나 ‘용서’로 쉽게 치환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아메리에게 용서는 피해자의 고통을 희석하거나 가해자의 책임을 흐리게 하는 위험한 행위이며, 때로는 피해자에게 또 다른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는 용서가 오히려 고통의 무게를 경감시키려는 시도에 불과하다고 경계한다.
아메리는 현대 사회가 고통과 폭력의 기억을 ‘사회적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현실을 비판한다. 고통의 기억이 상품화되고, 감정적 소비의 한 형태로 전락하는 상황은 그 진정성과 무게를 훼손한다. 피해자의 목소리는 점차 희미해지고, 기억은 가벼운 문화적 이벤트로 소비되어 버린다. 이러한 ‘기억의 소비’는 고통의 본질을 왜곡하고 역사적 정의를 무력화하는 심각한 문제로 인식된다.
더 나아가 아메리는 집단적 망각과 사회적 무관심에 대해 강력한 경고를 보낸다. 사회가 과거의 폭력과 고통을 잊거나 외면하는 순간, 그 상처는 치유되지 않고 반복될 위험이 크다고 보았다. 기억은 단순한 과거의 사실 기록을 넘어, 끊임없이 ‘증언’되고 ‘반성’되어야 하는 윤리적 의무이다. 아메리가 강조하는 ‘원한의 윤리’는 피해자의 권리와 역사적 정의를 지키는 강력한 윤리적 무기로, 용서가 아닌 분노와 기억의 지속이 피해자의 존엄을 수호하는 길임을 역설한다.
대중적 수용과 난해한 존재: 프랭클과 아메리의 차이
빅터 프랭클과 장 아메리, 이 두 사유자는 인간 고통과 기억에 관한 사유에서 본질적인 차이를 보일 뿐 아니라, 그들의 사상이 대중에게 수용되는 방식에서도 확연한 대비를 이룬다. 프랭클의 ‘의미치료’와 ‘희망’의 메시지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고 폭넓게 수용되었다. 특히 그의 대표작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전 세계적으로 많은 독자들에게 읽히며, 고통을 극복하는 인간 정신의 힘과 가능성을 보여 주는 상징적 교본이 되었다. 프랭클의 메시지는 희망과 용서라는 보편적 가치에 기반하여, 개인과 사회 모두에게 위로와 치유의 길을 제시하며, 심리학과 자기 계발 분야에서 중요한 위치를 확립했다. 이처럼 그의 사유는 대중의 마음에 쉽게 닿아, 고통 속에서도 의미를 찾고 삶을 회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 주었다.
반면 장 아메리는 그의 무겁고 불편한 진실성 때문에 대중적으로 ‘난해한 존재’로 인식된다. 아메리의 글은 고통과 폭력의 무의미함, 용서 불가능성, 그리고 기억의 윤리적 무게를 직시하도록 독자들을 강하게 압박한다. 그는 고통을 감정적으로 치유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고통이 남긴 분노와 상처를 지우지 않는 ‘원한의 윤리’를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단순한 위로나 희망을 넘어선, 때로는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성찰을 요구한다. 결과적으로 아메리의 사상은 대중적 공감보다는 학문적·윤리적 논의 속에서 더 활발하게 탐구되고 있으며, 그의 메시지는 쉽게 소비되는 위안이나 희망이 아니라 깊은 질문과 지속적 기억을 강제하는 도전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메리의 존재와 목소리는 오늘날 사회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는 집단적 망각, 역사 부정주의, 그리고 과거 폭력과 고통의 왜곡이라는 심각한 현실 문제에 대해 날카로운 경고를 던지며, 진실과 정의를 위해 끝까지 기억하고 증언할 것을 촉구한다. 사회가 과거의 고통을 가볍게 넘기거나 쉽게 잊으려 할 때, 아메리의 목소리는 그 불편한 진실을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그의 사유는 단순히 난해함에 머무르지 않고, 역사적 책임과 윤리적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결국 프랭클과 아메리의 차이는 인간 고통을 대하는 태도뿐 아니라, 그들의 사상이 사회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고 확산되는지를 보여 준다. 프랭클은 대중의 마음에 희망과 치유를 전하는 ‘빛나는 등불’인 반면, 아메리는 고통의 어두운 심연을 응시하며 진실을 고수하는 ‘불편한 거울’인 셈이다. 두 사유자의 상이한 위치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고통과 기억, 그리고 용서와 망각 사이에서 균형 잡힌 성찰을 이어가야 할 필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기억의 소비’와 고통의 대상화에 대한 입장 차이
현대 사회에서 ‘기억’은 점차 문화적 상품화와 미디어를 통한 대중적 소비의 대상으로 자리 잡았다. 전쟁, 인권 침해, 집단 폭력 등의 사건들은 다큐멘터리, 영화, 전시회, 기념행사, 심지어 관광 산업의 일부로까지 재현되고 소비된다. 이처럼 ‘기억’이 문화적 콘텐츠로 재구성되는 과정은 과거의 고통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고,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키는 긍정적 역할을 하는 동시에, 진실한 증언과 고통의 본질이 왜곡될 위험이라는 복잡한 긴장 관계를 낳는다.
빅터 프랭클은 이러한 사회적 기억의 재구성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사회가 고통의 기억을 공유하고 문화적으로 재현하는 일이, 고통을 새로운 의미로 전환시키고, 용서와 화해, 나아가 사회적 치유를 가능하게 하는 밑거름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프랭클에게 기억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로 이어지는 희망의 씨앗이며, 공동체가 고통을 넘어서 성장할 수 있는 힘이다. 따라서 대중문화와 공공 영역에서의 ‘기억의 공유’는 고통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여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반면 장 아메리는 ‘기억의 소비’ 현상에 대해 매우 경계심을 드러낸다. 그는 기억이 단순히 ‘문화적 상품’으로 전락할 때, 고통의 진실이 훼손되고 피해자가 또 다른 고통—재피해(secondary victimization)—를 입을 위험이 크다고 경고한다. 아메리는 기억의 상품화가 고통의 본질을 희석시키고, 역사적 진실과 윤리적 책임을 가리며, 심지어 ‘위선’과 ‘망각’을 동반할 수 있음을 강력히 지적했다. 즉, 기억이 소비되고 ‘소모’되는 과정에서 피해자의 목소리가 약화되고, 역사적 폭력에 대한 사회적 반성은 무력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기억이 단지 대중의 감정적 소비 대상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엄중한 ‘증언’과 ‘반성’의 윤리적 행위로써 다뤄져야 함을 주장한다.
이처럼 프랭클과 아메리는 ‘기억’과 ‘용서’, ‘망각’에 관한 서로 다른 윤리적 입장과 사회적 전망을 제시한다. 프랭클은 기억과 용서를 치유와 희망의 동력으로 강조하며, 고통을 의미 있는 이야기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화해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반면 아메리는 기억의 지속적 증언과 용서 불가능성에 기초한 윤리적 경계를 고수하며, 기억의 상품화와 망각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에 대해 끊임없이 경계할 것을 요구한다.
결국 두 사유자의 차이는 기억과 고통을 대하는 인간 태도의 근본적인 긴장과 다층적 의미를 보여 준다. 한편으로는 희망과 치유를 위한 ‘기억의 공유’를 지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기억이 퇴색되고 왜곡될 가능성을 경계하는, 이중적이고 복합적인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들의 대화는 오늘날 우리가 기억과 역사를 다루는 방식에 깊은 성찰을 요구하며, 진실과 정의, 그리고 공존의 윤리를 모색하는 데 중요한 길잡이가 된다.
종합적 성찰: 기억과 용서, 그리고 사회의 책임
이 장에서 우리는 빅터 프랭클과 장 아메리 두 사유자를 통해 기억과 용서, 그리고 사회적 망각이라는 주제를 깊이 사유해 보았다. 프랭클의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기억론과 아메리의 비판적이고 경계적인 기억론은 단순한 대립을 넘어서, 인간의 고통과 역사적 책임을 이해하는 데 서로를 보완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사회가 과거의 폭력과 고통을 기억하는 방식은 단순한 역사 기록을 넘어, 공동체의 정체성과 윤리적 책임을 형성하는 근간이 된다. 기억은 치유와 화해, 그리고 정의 실현의 중요한 자원이면서도, 동시에 망각과 타협에 대한 경계이자 저항의 도구이다. 이처럼 기억과 망각의 관계는 고통의 무게와 사회적 회복력 사이에서 신중하고 섬세하게 조율되어야 한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 사회는 고통의 기억을 단순히 문화적 소비나 용서로 환원하지 않고, 그 복합적이고 무거운 의미를 온전히 인정해야 한다. 아울러 기억의 진실성과 윤리성을 지키면서도, 프랭클이 강조한 희망과 화해의 가능성 역시 열린 자세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다층적이고 균형 잡힌 기억 문화는 개인과 집단이 역사와 고통을 마주하는 데 필수적인 윤리적 태도이며, 나아가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사회 공동체를 유지하는 핵심 동력이 될 것이다.
결국 기억과 용서, 그리고 망각에 대한 성찰은 단지 과거를 되돌아보는 행위에 그치지 않고, 현재와 미래의 공동체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어떤 윤리적 책임을 지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프랭클과 아메리의 사유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고통을 잊지 않되, 그 무게에 짓눌리지 말고, 동시에 현실적이고 책임 있는 태도로 용서와 화해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바로 그 균형이 우리 사회가 향해야 할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5장. 수용소 이후의 언어: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테오도어 아도르노의 이 언명은 20세기 후반 사상계에 커다란 충격을 던졌다. 그는 인간성이 철저히 파괴된 강제수용소의 경험 이후, 예술과 언어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 말은 단지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말과 표현 자체가 가진 윤리적 한계를 날카롭게 지적한 급진적 문제제기였다. 인간을 산업적으로 살해한 그 참혹한 현실 앞에서, 인간의 감정과 진실을 표현해 온 시(詩)는 과연 여전히 가능한가? 언어는 그러한 고통을 감당할 수 있는 수단인가?
이 물음은 빅터 프랭클과 장 아메리의 사유에서도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두 사람 모두 나치 강제수용소를 경험한 생존자로서, 그 고통을 언어로 남기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이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 그리고 언어에 부여한 의미는 극명하게 달랐다. 프랭클에게 언어는 상처를 넘어 회복과 희망으로 나아가는 통로였지만, 아메리에게 언어는 상처를 반복적으로 되살리고, 그 안에서 저항을 이어가는 현장이었다. 이처럼 그들의 언어는 고통 이후의 인간이 어떻게 말하고, 기억하며, 살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반된 대답이다.
프랭클: 언어를 통한 회복과 의미의 재구성
빅터 프랭클에게 언어는 단순한 표현의 도구를 넘어, 인간 내면의 자유를 지키고 삶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통로였다. 그의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단순한 고통의 기록을 넘어서, 철학적이고 심리학적인 언어로 절망 속에서도 인간 존재의 가능성을 말하고자 한 시도였다. 프랭클은 언어를 통해 고통을 하나의 ‘경험’으로 전환하고, 그것을 초월 가능한 의미로 끌어올리려 했다. 그의 글에는 죽음을 마주한 순간에도 삶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 믿음과, 인간의 존엄을 향한 적극적인 태도가 녹아 있다.
프랭클은 언어를 인간 정신의 연장선에 두었다. 수용소에서 모든 것이 박탈당한 상황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자신의 고통에 대한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리고 그 자유를 실현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식이 바로 ‘말함’이다. 침묵하거나, 혹은 말하거나—그 선택은 인간의 내면을 지키는 윤리적 행위이자, 존엄의 마지막 경계였다. 프랭클에게 언어는 단지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절망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되찾기 위한 능동적 행위였다.
그의 글은 고통을 부정하거나 희석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의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도, 그 안에서 인간 존재의 의미를 추출해 내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프랭클에게 수용소 이후의 언어란 절망의 언저리에서 다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재건의 언어’였다. 그는 아도르노의 언명에 정면으로 응답하듯,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시를 써야 한다”고 말한 이들 중 하나였다. 침묵은 생존자에게 또 다른 형태의 억압일 수 있으며, 말함은 고통을 견디는 방식이자 세상을 향한 윤리적 응답이기 때문이다.
아메리: 언어를 통한 저항과 상처의 반복
장 아메리는 프랭클과는 전혀 다른 궤도로 언어를 사유한다. 그의 글에서 언어는 ‘회복’의 통로가 아니라, ‘저항’의 수단이자 ‘상처의 반복’을 감내하는 장치이다. 『죄와 속죄의 저편』에서 아메리는 고통을 말로 해결하거나 정화하려는 모든 시도를 단호히 거부한다. 그는 언어가 고통을 의미화하는 순간, 고통은 추상으로 희석되며, 실제의 감각과 윤리적 긴장감이 사라질 위험이 있다고 본다.
아메리에게 언어는 고통을 견디는 방식이면서, 동시에 그 고통을 끊임없이 되살리는 행위다. 그는 수용소에서의 고문 경험을 “언어가 닿지 못하는 곳에서의 사건”이라 칭하며, 어떤 말도 그 감각의 고유성과 잔혹함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고 토로한다. 하지만 그는 침묵을 택하지 않는다. 침묵은 망각이고, 망각은 곧 가해자에 대한 암묵적 용인이다. 아메리는 언어를 통해 상처를 증언하며, 그 고통이 역사와 윤리 속에서 결코 지워져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의지를 드러낸다.
그러나 그의 언어는 독자를 위로하지 않는다. 아메리의 글은 말의 외피를 벗기고, 고통의 본질을 차갑고 맨몸으로 드러낸다. 언어는 상처가 봉합되는 치유의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그 상처가 벌어진 채로 존재하는 현장이 된다. 그의 독자는 그 고통을 ‘공감’이라는 편안한 감정이 아니라, ‘응시’와 ‘직면’의 태도로 감내해야 한다. 프랭클이 언어를 회복의 발판으로 삼았다면, 아메리는 언어를 고통의 지속, 다시 말해 잊히지 않도록 하기 위한 윤리적 고집으로 삼는다.
고통은 말해질 수 있는가? – 언어의 한계와 가능성
프랭클과 아메리의 입장은 결국 하나의 근본적인 질문으로 수렴된다. 고통은 말해질 수 있는가? 특히 아우슈비츠와 같은 극단적 폭력의 경험은 그것을 겪지 않은 이들에게 온전히 전달될 수 있는가? 언어는 그 감각과 파괴, 절망과 모멸의 본질을 과연 담아낼 수 있는가?
프랭클은 언어의 가능성을 믿었다. 그는 고통을 단지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야기’로 구성하는 과정 속에서 인간의 존엄이 회복된다고 보았다. 고통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의미화될 수 있는 인간 경험의 일부이며, 이를 언어로 서술하는 일은 치유와 성장, 그리고 사회적 연대를 위한 윤리적 실천이라는 것이다. 그의 글은 절망 속에서도 삶을 긍정하는 어조로 이어지며, 언어를 인간 정신의 복원력으로 간주한다.
반면, 아메리는 고통을 언어로 재현하는 시도 자체에 근본적인 회의를 던진다. 그는 말이 고통을 설명하는 순간, 고통은 그 날것의 진실성을 잃고 추상화된다고 경고한다. 아메리에게 고통은 이해되거나 초월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지속되고 응시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 언어는 고통을 가두는 틀이 아니라, 때로는 그 본질을 배반하는 장치가 된다. 그의 글은 정제된 문학이 아니라, 문장과 문장 사이의 파열과 균열 속에서 고통을 밀어낸다.
이처럼 두 사유자는 언어가 고통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를 두고 극단적으로 다른 신념을 견지한다. 프랭클은 언어를 통해 인간이 다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고, 아메리는 언어가 고통의 진실을 지우는 위험을 경계하며 끝까지 말할 수 없는 어떤 ‘여백’을 응시한다. 하나는 말하기를 믿고, 다른 하나는 침묵에의 저항으로서 말하기를 택한다. 이 차이는 단순한 표현 방식의 차원이 아니라, 인간 존재와 윤리, 그리고 기억의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철학의 갈림길이다.
언어 이후,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프랭클과 아메리는 모두 언어의 근본적 한계를 직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한계 앞에서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프랭클은 언어의 가능성에 기대어 무너진 인간성과 삶의 의미를 다시 세우고자 했다. 반면 아메리는 언어의 불완전성과 상처를 드러내며, 고통을 결코 봉합되지 않는 상처로 증언했다. 하나는 말함으로써 구원을 추구했고, 다른 하나는 말함으로써 저항을 선택했다.
이 두 입장은 고통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에 대한 중요한 윤리적 질문을 우리 앞에 남긴다. 고통은 어떤 방식으로 말해져야 하는가? 우리는 타인의 고통 앞에서 어떤 언어를 사용할 수 있으며, 또 어떤 침묵을 지켜야 하는가? 언어는 위로의 수단인가, 아니면 상처의 흔적을 되새기는 증언인가?
이 물음은 단지 과거의 아우슈비츠만을 향한 것이 아니다. 전쟁, 재난, 차별, 상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은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고통과 마주하고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언어는 결코 완전하지 않다. 말은 고통을 온전히 담을 수 없고, 때로는 그것을 왜곡하거나 소멸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침묵은 더 큰 야만을 불러올 수 있다. 침묵은 망각의 다른 이름이자, 때로는 가해자의 편에 서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말해야 한다. 그러나 그 말은 쉬운 위로나 낙관의 언어가 아니라, 상처의 무게를 인식하고 그것을 존중하는 언어여야 한다. 말해지지 않는 고통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곁에 머무는 언어. 그것은 공감의 언어가 아니라, 응시하고 책임지는 언어일 것이다.
프랭클과 아메리, 그 극과 극의 목소리 사이에서 우리는 질문을 되새긴다. 고통은 무엇인가? 말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인간은 그 언어 이후,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을 놓지 않는 일. 바로 거기서부터 윤리와 기억, 그리고 인간다움이 다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결론: 우리는 누구의 목소리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희망은 대중적이지만, 분노는 철학적이다.” 이 문장은 프랭클과 아메리의 언어를 이해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희망은 많은 이들의 귀를 열게 하는 목소리다. 그것은 치유와 회복, 용서와 미래에 대해 말한다. 반면 분노는 불편하고 때로는 무겁다. 기억을 멈추지 말 것을, 용서를 미루며, 고통과 직면할 것을 요구한다. 프랭클과 아메리는 이처럼 서로 다른 언어의 끝자락에서 목소리를 냈지만, 두 사람 모두 인간 고통의 깊은 진실에 다가서려 했다는 점에서 서로를 부정하지 않는다.
프랭클은 고통의 경험을 삶의 의미와 책임으로 전환시키려 했다. 그는 희망을 단순한 회피나 망각이 아니라, 고통을 똑바로 직시한 끝에 도달하는 ‘존엄의 언어’로 보았다. 그에게 말하기란 고통을 삶의 일부로 끌어안는 행위였고, 그 언어는 인간 정신의 복원력을 상징했다. 많은 이들이 프랭클의 언어에 공명하는 이유는, 그가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틀과 감정의 안전한 공간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 했으며, 그 말이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음을 믿었다.
반면 아메리는 고통을 의미로 환원하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했다. 그는 의미가 때로 고통을 단순화하고 진실을 외면하게 만드는 가장 교묘한 방식일 수 있음을 경계했다. 그래서 그는 고통을 ‘치유’하기보다 ‘기억’하는 데 집중했다. 말하기란 상처를 봉합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 상처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드러내는 일이었다. 아메리의 언어는 분노와 저항의 언어였으며, 바로 그 점에서 윤리적이었다. 그는 침묵이 곧 망각과 면죄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고하며, 고통의 지속을 침묵 속에서도 감내하는 법을 말없이 전했다.
우리는 누구의 목소리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프랭클과 아메리 중 한쪽의 언어를 선택하라는 요구가 아니다. 오히려 두 사람의 목소리를 나란히 놓고, 그 사이에 놓인 균열과 긴장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는 것이야말로 고통에 대한 더 깊고 다층적인 이해로 나아가는 길이다. 희망은 우리의 감정을 흔들지만, 분노는 우리의 윤리를 시험한다. 프랭클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묻고, 아메리는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묻는다. 이 두 질문은 각각 삶의 지속과 기억의 지속이라는 축을 이루며, 인간 존재가 고통과 마주했을 때 어떤 선택과 태도를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기억의 윤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고통을 말할 때 우리가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가의 문제다. 치유를 이야기할 것인가, 아니면 분노를 기록할 것인가? 한쪽은 용서와 희망을 통해 고통을 넘어설 길을 모색하고, 다른 한쪽은 용서 불가능성과 기억의 지속을 통해 고통의 진실을 지키려 한다. 이 두 태도는 모두 필요하며, 서로를 보완한다. 고통의 언어는 결코 단순한 이분법으로 나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이 진실한가, 그 말이 피해자의 존재를 지우지 않는가, 그리고 그 말이 망각이 아니라 기억을 향하고 있는가이다.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고통의 현장 앞에 서 있다. 전쟁과 학살, 난민과 기후 재난, 차별과 배제의 현실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다시 묻는다. 이 고통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우리는 어떤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프랭클이 말했듯, 언어는 인간을 다시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아메리가 경고하듯, 언어는 때로 고통의 현실을 지우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말과 침묵 사이의 윤리, 기억과 망각 사이의 균열 위에서 끊임없이 사유해야 한다. 언어는 완전하지 않다. 그러나 그 불완전함 속에서 우리가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은, 고통 앞에서 진실한 태도로 머무르는 일이다.
결국, 고통을 말한다는 것은 단지 과거를 회상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고 책임질 것인가를 묻는 가장 근본적인 윤리의 행위이다. 우리는 지금, 누구의 목소리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함께 읽을 책
1. 테오도어 아도르노, 『부정변증법』
“전체는 거짓이다.”
아도르노의 비판은 총체적 서사에 대한 거부이며, 고통과 비극을 ‘하나의 의미’로 포섭하려는 시도에 대한 근본적 의심이다. 이 장에서 아도르노의 언명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는 프랭클과 아메리의 언어관을 나누는 출발점이다.
* 고통을 재현하려는 언어가 과연 피해자에게 윤리적인가?
2. 수잔 손택, 『타인의 고통』
“우리는 고통을 보는 이로서, 그 고통을 진정으로 알 수 있을까?”
손택은 고통의 이미지화, 그리고 그것이 대중에게 소비되는 방식에 비판적이다. 이는 아메리가 경계한 ‘기억의 소비’와 맞닿아 있으며, 고통이 어떻게 감상물로 전락하는지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 우리는 고통을 응시하는가, 소비하는가?
3. 임레 케르테스, 『운명』
“수용소의 고통은 문학이 될 수 있는가?”
수용소 생존자가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고통을 이야기하는 이 작품은 프랭클과 아메리의 언어 사이에 놓인 제3의 목소리다. 그는 문학적 서사 속에 고통의 단면을 담되, 감상적 위로나 도덕적 메시지를 경계한다.
* 고통을 이야기하기 위해 허구가 필요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