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첼 카슨과 로버트 팩스턴을 읽고
20세기의 두 위대한 저작,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Silent Spring)과 로버트 팩스턴의 《파시즘》(The Anatomy of Fascism)은 서로 전혀 다른 주제를 다루는 듯 보이지만, 그 심층에 도달하면 놀라울 정도로 닮은 구조를 품고 있다. 전자는 자연 생태계의 파괴라는 환경적 위협을, 후자는 민주주의의 붕괴라는 정치적 위협을 다룬다. 겉으로는 생물과 생명의 문제, 정치와 이념의 문제로 갈라져 있는 듯하지만, 이 두 책은 모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사회를 좀먹고 파괴하는 시스템적 위험”을 통찰하며, 그것이 어떻게 일상의 정상성 속에 감춰져 있는지를 날카롭게 해부한다.
《침묵의 봄》은 미국의 어느 마을을 상상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햇살이 쏟아지는 평화로운 들판, 바람에 나부끼는 들꽃, 생명을 노래하는 새들의 지저귐. 그러나 곧 이 모든 것이 사라진다. 소리 없는 봄. 새는 죽고, 벌은 사라지며, 아이들은 병들어간다. 이 장면은 허구지만, 카슨이 보여주고자 한 현실은 결코 허구가 아니었다. 인간이 무분별하게 살포한 농약, 특히 DDT는 생명의 연쇄 고리를 끊어내며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 그것은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정당화되었고, 사람들은 그 피해를 인지하지 못하거나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한편, 《파시즘》은 특정한 이념을 중심으로 구성된 정치 체계가 아니라, 감정의 동원과 폭력의 합리화, 그리고 ‘우리’와 ‘그들’을 구분지으려는 집단적 광기의 정치적 양태를 추적한다. 팩스턴에 따르면, 파시즘은 공통된 철학이 없다. 오히려 그것은 행동하고, 선동하고, 조직하는 방식에서 그 본질을 드러낸다. 이는 특히 경제적·사회적 위기 속에서 대중의 불안을 하나의 적으로 전가하며 집단적 분노를 결집하는 정치적 전략이기도 하다. 겉으로는 '국민', '질서', '안보', '전통'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 말들 뒤에 숨겨진 배제, 폭력, 혐오, 그리고 권력의 집중이 그 진실이다.
이처럼 두 저작은 각기 다른 언어, 다른 문맥 속에서 쓰였지만,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무엇을 침묵시키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무엇에 의해 동원되고 있는가?”
카슨의 침묵은 생명의 침묵이다. 말할 수 없는 것들, 소리를 잃은 자연의 목소리, 멸종한 새들과 중독된 아이들. 그녀는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려 들면서 오히려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는 모순을 고발했다. 이 침묵은 ‘죽음’의 은유인 동시에, 인간의 무지와 오만이 빚어낸 비극의 예고편이었다. 과학과 기술, 그리고 그 뒤에 숨어 있는 경제적 이해관계가 어떻게 인간의 감각과 판단력을 마비시키는지를, 카슨은 집요하게 파헤쳤다.
반대로 팩스턴의 침묵은 이성의 침묵이다. 감정이 동원되고, 대중이 하나의 적을 향해 분노할 때, 이성은 뒷전으로 밀린다. 파시즘은 논리가 아니라 열광으로 움직인다. 이성보다는 공포, 토론보다는 함성, 연대보다는 배제. 팩스턴은 이 감정적 정치의 뿌리를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찾았지만, 그것은 결코 과거의 유물로만 남아 있지 않다. 현대의 포퓰리즘, 혐오 정치, 반지성주의적 흐름 속에서 파시즘적 요소는 끊임없이 되살아나고 있으며, 그들은 여전히 인간의 불안을 먹고 자란다.
흥미롭게도 두 책은 모두 ‘위험’의 초기 징후에 주목한다. 카슨은 생태계의 붕괴가 곧장 눈에 띄는 것이 아니라, 물 밑에서 서서히 진행되며 어느 날 갑자기 전면화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팩스턴도 마찬가지로, 파시즘이 하루아침에 권력을 잡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타협과 침묵, 무관심과 묵인이 축적되며 제도적 문을 열고 들어온다고 말한다.
이러한 유사성은 두 저작의 사상적 깊이를 뛰어넘어,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을 비추는 하나의 거울로 기능한다. 환경의 위기와 민주주의의 위기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모두 공적 책임의 소멸과 감각의 마비라는 동일한 구조 속에서 발생한다. 무언가를 외면하거나 외면당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 가장 약한 존재들이 침묵 속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두 저작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절박한 경고다.
결국 《침묵의 봄》과 《파시즘》은 “말하지 않는 자”와 “말할 수 없게 된 자”의 세계에 대해 말한다. 전자는 자연, 후자는 시민. 침묵은 언제나 권력이 만든다. 때로는 과학의 이름으로, 때로는 조국과 국민의 이름으로. 그러나 그 침묵이 쌓이면, 봄은 더 이상 찾아오지 않고, 광장은 다시는 열리지 않는다.
우리는 그 두 개의 어둠 앞에 서 있다. 하나는 생명의 침묵, 다른 하나는 자유의 침묵이다. 그리고 이 두 어둠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같은 속도로 우리 곁을 잠식해 오고 있다. 그리하여 질문은 남는다.
우리는 얼마나 더 오래 침묵할 수 있을까? 아니, 우리는 지금, 어떤 방식으로 침묵당하고 있는가?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1962)은 단순한 환경 보고서나 생태 고발서가 아니다. 이 책은 인간 중심의 과학이 어떻게 세계를 침묵시키는가를 섬세하게 보여주는, 윤리적 사유의 서사시다. 그녀는 생태계의 비명을 과학적 언어로 해석하는 동시에, 그 언어의 한계를 문학적 감수성으로 보완하며 독자에게 경각심을 일깨운다. 그 점에서 《침묵의 봄》은 ‘글’로 쓰인 환경운동이자, ‘언어’로 피운 저항의 생태학이라 말할 수 있다.
▍자연의 목소리를 지우는 과학
카슨이 경고한 중심 주제는 단 하나다. 우리는 과학의 이름으로 자연을 죽이고 있으며, 그 죽음은 우리의 생존과도 직결된다. 그녀가 집중한 사례는 당대 미국에서 대대적으로 사용되던 농약, 특히 DDT였다. 원래 군사적 목적으로 개발된 이 화학물질은 전쟁이 끝난 뒤 해충 박멸이라는 명목으로 민간에 도입되었다. 식량 증산, 병충해 방지, 위생 향상 등 그럴듯한 명분과 함께. 그러나 이 무차별적 살포는 곧 생태계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조용하고 은밀하게 생명들을 파괴해갔다.
카슨은 이 과정을 극적인 장면으로 압축해 제시한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봄.” 새는 울지 않고, 벌은 날지 않으며, 아이들의 웃음도 사라진 마을. 침묵은 곧 죽음의 형상화다. 이것은 단지 문학적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 활동이 중단된 순간에만 가능해지는 정적이며, 동시에 우리가 감각적으로 그리기 힘든 ‘보이지 않는 죽음’의 형태다. 죽음이 폭력이 아니라, ‘정상성’ 속에 스며들 때 우리는 그것을 인식조차 하지 못한 채 넘긴다. 카슨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들며, 과학이 어떻게 감각을 무디게 만들고, 어떻게 인간이 만든 ‘지식의 도구’가 자연의 침묵을 강요하는가를 질문한다.
▍과학의 중립성이라는 환상
《침묵의 봄》이 당대에 미친 충격은 단순히 DDT의 위험성을 고발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카슨은 더욱 근본적인 문제, 즉 과학의 윤리와 책임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과학은 그 자체로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라는 통념이 있었지만, 그녀는 이 과학이 어떤 이해관계에 봉사하는가를 문제삼았다. 특히 대기업과 정부 기관이 결탁하여 ‘객관적 연구’라는 이름 아래 위험을 은폐하고, 독성 물질의 사용을 정당화하는 과정을 철저히 비판했다. 과학의 언어는 중립적인 듯 보이지만, 그것이 권력과 자본의 손에 쥐어질 때는 침묵을 강요하는 언어로 변질된다.
“누가 말할 수 있는가, 그리고 누가 듣지 않는가?”
카슨은 이 질문을 되묻는다. 시민은 농약의 성분을 모른다. 농부는 사용을 강요당한다. 의사는 결과를 치료하지만, 원인을 제거하지 못한다. 전문가의 권위는 시민의 감각을 억누르며, 자연의 신호는 ‘과학적 증거’가 아니므로 무시된다. 이때 침묵은 곧 억압이며, 카슨이 보여준 침묵은 단순한 음향의 부재가 아니라 사회적 침묵, 감각의 침묵, 책임의 침묵이다.
▍문학적 언어로 되살린 생명의 감각
《침묵의 봄》이 위대한 고전으로 남은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과학적 언어만으로 쓰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슨은 해양생물학자로서 충분한 학술적 자격을 갖춘 전문가였지만, 그녀의 문장은 언제나 감성에 호소하는 시적 울림을 지녔다. 침묵의 봄을 묘사하는 문장은 단순한 관측이 아니라, 상실에 대한 애도였고, 생명의 연결성에 대한 감각의 복원이었다.
예를 들어, 그녀는 농약이 토양 속 박테리아의 균형을 파괴하고, 이는 결국 곤충, 새, 동물, 인간에 이르기까지 연결된 생태계 전체를 교란시킨다고 설명한다. 여기에는 단순한 생물학적 인과관계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는 사유가 깔려 있다. 그녀가 비판한 것은 단지 농약이라는 화학물질이 아니라, 자연을 파편화하고 관리 가능한 대상으로 환원시킨 근대의 사유 방식이었다.
따라서 《침묵의 봄》은 과학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인간 중심주의에 대한 윤리적 도전이기도 했다. 자연을 정복의 대상이 아닌 관계의 존재, 다시 말해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보는 전환의 시도를, 그녀는 과학자의 필체로, 동시에 시인의 문장으로 수행했다.
▍지식인의 양심, 시민의 각성
레이첼 카슨은 《침묵의 봄》을 통해 과학과 기술의 남용에 맞서 싸운 최초의 지식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생태계의 파괴가 단지 생물학적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문제임을 분명히 했다. 그녀가 직면한 것은 단지 농약의 위험성만이 아니라, 그것을 묵인하고 합리화하는 사회 전체의 구조였다. 특히 기업의 반발과 언론의 공격, 심지어 ‘감성적 여성’이라는 비하까지 받으면서도 그녀는 끝까지 자연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책임을 포기하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진실은 언제나 외면당하기 쉽다. 특히 그것이 기존의 권력 구조와 경제 질서에 불편함을 줄 때 더욱 그렇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는 자의 목소리가 사라진다면, 그다음에는 자연이, 생명이, 인간이 순서대로 침묵하게 된다. 카슨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그 목소리를 지키기 위한 지식인의 윤리, 그리고 시민 각자의 감각을 회복하라는 촉구다.
그녀는 결코 영웅적인 인물로 자처하지 않았다. 오히려 평범한 과학자의 자리에서, 그러나 누구보다 감각이 깨어 있었던 이로서, 우리가 무엇을 외면하고 있는지, 어떤 소리를 듣지 않으려 하는지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이 점에서 그녀는 단순한 환경운동가가 아니라, 감각을 정치화한 작가이자, 공적 침묵에 맞서 싸운 고요한 혁명가였다.
로버트 팩스턴의 《파시즘》(The Anatomy of Fascism)은 20세기 초 유럽을 휩쓴 가장 파괴적인 정치 현상을 단순한 ‘극우 이념’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행동과 감정의 연쇄로 구성된 정치적 실천으로 파악한다. 그는 파시즘을 고정된 교의나 이론 체계로 정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위기의 순간, 대중이 동원되는 특정한 방식이며, 감정이 이성을 압도하고,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집단적 상상의 기제가 된다.
팩스턴은 말한다. “파시즘은 말보다 행위에, 이념보다 감정에 의존한다.” 이 짧은 문장은 파시즘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이다. 파시즘은 철학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이념적 교리가 아니라, 두려움, 분노, 상실감과 같은 집단적 정서에 반응하는 정치적 행위의 총합이다. 따라서 파시즘은 사유보다 빠르며, 말보다 먼저 몸으로 움직인다. 이것이야말로 파시즘이 민주주의 사회 안에서도 언제든 스며들 수 있는 이유다.
▍민주주의의 균열 위에 피어난 감정의 정치
팩스턴이 주장하는 바는 명확하다. 파시즘은 민주주의의 외부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내부의 취약점, 특히 경제적·사회적 위기의 시기에 드러나는 균열에서 탄생한다. 20세기 초,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파시즘이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단순히 이념적 선동이 아니라, 체제의 무능과 대중의 좌절,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가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팩스턴은 파시즘의 성장을 다섯 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그 과정은 놀라울 만큼 점진적이고, 일상적인 정치 과정 속에 위장되어 있다. 첫 번째는 지적 전조다. 즉, 파시즘적 감정—민족적 자부심, 타인에 대한 혐오, 과거에 대한 미화—이 문화 담론에 스며들기 시작한다. 두 번째는 조직화 단계, 극우 세력이 정치세력화되고 상징과 구호를 통해 대중의 시선을 끌기 시작한다. 이후에는 정당의 연합과 권력 진입, 체제 장악, 급진화로 이어진다. 모든 과정이 정당하고 합법적인 절차로 이루어진다는 점이 핵심이다.
이 흐름은 경고한다. 우리는 파시즘을 극단의 외부가 아니라, 일상 내부의 익숙함 속에서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깃발과 군화의 이미지로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공공의 질서’, ‘전통의 회복’, ‘국가적 자긍심’이라는 익숙한 말들 속에 포장되어 침투한다. 이처럼 파시즘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달라지는 변형 가능성을 지녔기에, 더욱 경계의 대상이 된다.
▍말할 수 없는 분노와 적의 창조
팩스턴의 이론에서 핵심적인 통찰은 다음과 같다. 파시즘은 공동의 적을 상상함으로써 대중의 혼란을 결집시킨다. 경제 위기, 정치적 무능, 사회적 변화 등 복잡한 불안을 하나의 적(이민자, 좌파, 유대인, 언론, 지식인 등)에게 전가함으로써, 그 분노는 방향을 얻는다. 이때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감정이 흘러갈 수 있는 통로다. 그리고 그 통로를 만든 정치 세력이 곧 파시즘적 권력을 얻는다.
이와 같은 감정의 정치는 이성을 침묵시킨다. 사실보다 선동이, 숙고보다 구호가 우선된다. 따라서 파시즘은 말할 수 없는 분노, 발화되지 못한 불안을 적대감으로 번역하는 체계라 할 수 있다. 팩스턴은 이것을 ‘정체성의 마취제’라고 보았다. 파시즘은 대중에게 고통을 성찰할 필요 없는 이유, 불행을 타자 탓으로 돌릴 수 있는 구도를 제공함으로써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 즉, 파시즘은 희망이 아니라, 분노의 위장된 안정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팩스턴이 파시즘을 단순한 독재 체제가 아니라, 대중의 동의와 참여에 기반한 정치적 운동으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히틀러나 무솔리니는 단독으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대중이 원했기에 등장했다. 다시 말해, 파시즘은 늘 ‘우리’ 안에 존재하며, 특정한 순간에 그것을 지지하고 욕망하는 군중의 얼굴로 모습을 드러낸다.
▍포퓰리즘과 현대의 파시즘적 잔재
팩스턴의 분석은 과거의 유럽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책 말미에서, 현대의 포퓰리즘 정치와 파시즘의 유사성을 지적한다. 오늘날에도 특정 정치 지도자들은 국가의 위기를 강조하며, 언론을 탄압하고, 소수자를 희생양 삼고, 법치를 무시하고, 대중의 감정을 선동한다.
이러한 흐름은 민주주의의 구조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 구조를 활용하여 비민주적 목적을 달성하는 전략이다. 선거, 의회, 언론 등 모든 민주적 장치를 포섭한 채 파시즘적 정치가 작동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더욱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 안에 있는가, 아니면 그것의 껍질을 쓰고 있는 또 다른 체제 안에 있는가?”
현대의 파시즘은 군복을 입지 않는다. 대신 데이터를 사용하고, SNS를 활용하며, 심리적 불안을 조장한다. 팩스턴의 통찰은 시대를 넘어 여전히 유효하다. 이성보다 감정을 앞세우는 정치가 횡행하고, 혐오와 분열이 일상의 언어로 스며드는 오늘, 우리는 다시 파시즘이라는 이름 없는 괴물의 발자국을 듣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성의 침묵에 맞서는 감각의 정치
《침묵의 봄》에서 카슨이 ‘자연의 침묵’을 통해 경고했다면, 《파시즘》에서 팩스턴은 ‘이성의 침묵’을 말한다. 이 둘은 다른 배경과 문맥에서 쓰였지만, 똑같이 감각을 마비시키는 체제에 대한 경고라는 점에서 서로 닿는다.
파시즘은 인간의 감정을 도구화한다. 분노는 동원이 되고, 불안은 정당성이 된다. 이때 개인은 더 이상 사유하지 않고, 전체의 흐름에 휩쓸린다. 공적 이성이 작동을 멈출 때, 민주주의는 외형을 유지한 채 속에서부터 무너진다. 팩스턴은 이를 ‘행동하는 감정의 정치’라 부르며, 현대사회의 취약한 감정구조를 꿰뚫어 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침묵에 맞설 수 있을까? 팩스턴은 명확한 처방을 내리기보다는, 경계의 감각을 유지하라고 말한다. 즉, 대중이 느끼는 분노가 어디서 기인하며, 그 분노가 누구에 의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감각적으로 알아차리는 것. 다시 말해, 파시즘에 대한 면역은 사유의 지속성과 감정의 자각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과 로버트 팩스턴의 《파시즘》은 서로 전혀 다른 시공간에서 쓰인 책이지만, 놀랍도록 유사한 구조를 품고 있다. 이 두 저작은 본질적으로 침묵시키는 자와 침묵당하는 자, 동원하는 자와 동원되는 자라는 구도를 중심축으로 삼는다. 그것은 생태적 파괴와 정치적 폭력이라는 외양을 하고 있으나, 그 안에는 동일한 권력의 메커니즘—무지와 무감각을 통해 작동하는 억압의 구조—가 자리한다.
카슨은 새들이 노래하던 봄의 정적 속에서, 생명의 언어가 사라져가는 광경을 문학적 감수성과 과학적 증거를 통해 드러냈다. 그리고 그 침묵의 원인을 산업사회의 오만과 과학의 편향성에서 찾았다. 이는 단순한 환경문제의 고발이 아니다. 그것은 진실이 은폐되고, 탐욕이 합리화되며, 소수의 이익이 다수의 생명을 침묵시키는 구조에 대한 전면적 비판이다. 이 구조 안에서 자연은 대상화되고, 과학은 정당화되고, 시민은 침묵하게 된다.
한편, 팩스턴은 정치적 열광과 동원의 이면을 파헤친다. 그는 인간의 감정을 자극해 이성을 마비시키는 파시즘의 서사를, 역사적 사례를 통해 세밀히 분석한다. 그의 작업은 단지 과거의 독재 정권을 되짚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팩스턴은 질문을 던진다. 왜 사람들은 스스로를 억압하는 권력을 지지하게 되는가? 왜 침묵하지 말아야 할 순간에 이성은 사라지고, 구호만이 울려 퍼지는가?
그가 제시하는 답은 정치적 선전이나 강제력이 아니라, 감정의 구조화에 있다. 파시즘은 분노와 좌절, 소외와 박탈의 감정을 정교하게 조직하여 하나의 '적'을 만들어낸다. 그 ‘적’은 실제 존재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대중이 ‘무엇’을 믿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느끼는가이다. 이러한 구조 안에서 시민은 동원된다. 팩스턴은 이를 “이념보다 감정에 의존하는 정치”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두 억압 구조의 공통점은 바로 ‘보이지 않는 위험’을 가시화했다는 점이다. 카슨은 자연을 죽이는 손길이 눈에 보이지 않도록 설계된 산업 시스템을 고발했고, 팩스턴은 이성을 마비시키는 정치 체계가 얼마나 쉽게 일상의 언어와 감정 속에 침투하는지를 드러냈다. 둘 모두 공통적으로 말한다. “당신이 보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침묵의 윤리: 무엇이 침묵하게 만드는가?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카슨은 그것을 누구보다 날카롭게 파헤쳤다.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자연에 대한 결정이 내려지고, ‘공익’이라는 미명 아래에서 생명에 대한 실험이 자행된다. 이때 일반 시민은 정보를 얻을 수도, 발언할 수도 없는 존재로 전락한다. 그 침묵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조작된 무지와 권위에 의해 구성된 침묵이다.
팩스턴에게 침묵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그것은 공포나 체념의 결과가 아니라, 열광과 충성심 속에 묻힌 이성의 실종이다. 즉, 파시즘 체제 하에서 침묵은 생각의 중지가 아니라, 특정한 감정만을 허용받는 공간이다. 이성은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되고, 의심은 배신으로 규정된다. 침묵이 미덕이 되고, 동의가 의무가 되는 그 순간, 사회는 이미 억압의 구조로 재편된다.
결국 이 두 침묵은 정보의 독점과 감정의 조작을 통해 유지된다. 산업사회가 생태계를 침묵시키는 방식과, 정치권력이 시민을 동원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그 둘은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지금 무엇에 침묵하고 있는가? 그리고 왜 그 침묵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가?”
▍동원의 윤리: 누구를 위해 움직이는가?
동원은 언제나 ‘정당한 이유’를 내세운다. 생태계를 파괴하는 기업도, 전쟁을 일으키는 국가도 그 나름의 명분을 갖춘다. 카슨은 농약 살포가 ‘생산성을 위한 선택’이라는 논리로 정당화되는 현실을 직시했다. 그러나 그 생산성은 인간 중심주의적 환상 위에 서 있으며, 그 선택의 이면에는 수많은 생명의 죽음이 있었다.
팩스턴의 경우, 동원은 훨씬 더 정교하고 내면화된 형태로 나타난다. 파시즘은 단지 외부 권력에 의해 강제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작동한다. 이것이 바로 파시즘의 무서운 점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타인의 감정에 조종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그들은 ‘공통의 적’에 분노하며, 그 분노가 자신들의 진실이라 믿는다. 이 감정의 동원은 이성의 판단을 압도하고, 공동체 전체를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든다.
동원은 생명을 죽이거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다. 그것은 중립적인 행위가 아니다. 따라서 동원에는 언제나 윤리적 질문이 따라야 한다. 누구를 위한 동원인가? 그 동원은 누구에게 침묵을 요구하는가? 카슨과 팩스턴 모두, 이 질문을 회피하지 않는다.
▍문명 내부의 파괴: ‘우리 안의 타자’를 직시하기
이 두 책의 궁극적 공통점은 문명 내부에서 자행되는 파괴를 고발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침입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도 일상적인, 우리 안의 타자성이다. 우리는 때로 자연을 통제할 수 있는 존재로 착각하고,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유롭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카슨은 우리가 자연에 대해 맹목적 권리를 주장할 때, 스스로 생명의 연결망을 훼손하고 있음을 보여주었고, 팩스턴은 우리가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이미 동원되고 있을 수 있음을 경고한다.
카슨의 문장은 말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너무 많이 행하고 있다.” 팩스턴은 그에 화답하듯, “이해보다 먼저 행동하고, 숙고보다 먼저 증오하는 정치”를 경계하자고 말한다. 이 두 목소리는 하나의 질문에 닿는다. “우리는 누구의 목소리를 지우며 살아가고 있는가?”
이 질문은 지금-여기에 가장 절실한 질문이기도 하다. 환경파괴와 기후위기, 혐오와 배제의 정치, 알고리즘으로 감정이 설계되는 시대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침묵하고 있으며, 얼마나 쉽게, 동원되고 있는가.
레이첼 카슨이 《침묵의 봄》에서 그려낸 세계는, 단순히 과거 산업사회의 일면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금 이곳에서 서서히 현실이 되어가는 미래의 풍경이기도 하다. 그녀가 남긴 ‘새들의 노래가 사라진 봄’은 상징이 아니라 예고다. 팩스턴 또한 파시즘을 역사적 사건으로 봉인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이 ‘언제든 다시 출현할 수 있는 감정 구조’임을 경고했고, 민주주의의 균열 속에서 그것이 자라난다고 보았다. 이 두 사람의 저작은 그래서 오늘, 더욱 강하게 우리를 부른다. 그것은 과거를 넘어서 현재를 해석하는 도구, 그리고 다가오는 미래를 경계하는 윤리로 작동한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
그들이 말한 파국은 이미 우리의 피부 아래에서 꿈틀대고 있다.
▍카슨 이후의 세계: 소리 없는 대멸종의 시대
카슨이 지적했던 생태계의 파괴는 이제 전 지구적 위기로 확장되었다. 기후변화, 생물 다양성의 급감, 토양 황폐화, 해양 산성화, 그리고 미세플라스틱과 화학물질로 오염된 몸. 이러한 현상은 더 이상 어떤 미래의 경고가 아니다. 과학자들은 현재를 ‘제6차 대멸종’의 시기로 정의하며, 인간의 활동이 수많은 종의 멸종을 가속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카슨이 우려했던 '침묵'은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숲은 점점 조용해지고, 꿀벌은 사라지며, 바다는 생명을 담기보다 쓰레기를 반사하는 거울이 되어간다.
놀라운 것은 이 침묵이 점점 ‘자연스러운 일’로 간주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 이상 시민들은 매일 새의 지저귐을 들으며 아침을 맞이하지 않고, 아이들은 벌을 무서워하지 않으며 자란다. 우리는 이미 ‘생명의 소음’을 상실한 문명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카슨은 말한다. 침묵은 단순한 부재가 아니다. 그것은 경고 없는 죽음의 시작이다. 우리가 더 이상 이 변화에 놀라지 않을 때, 비극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묻지 않으면 안 된다.
“과연 과학은 누구를 위해 작동하고 있는가?”
“우리는 얼마나 ‘전문가’의 언어에 익숙해진 나머지, 생명의 직감을 잃어버렸는가?”
카슨의 목소리는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오늘날에는 더 날카롭다. 특히 기후위기와 에너지 전환, 환경정책에 대한 결정이 점점 소수의 손에 집중되는 지금, 그녀가 제기했던 시민의 각성과 감성적 상상력은 이전보다 더 절실해졌다.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침묵은, 단지 소리의 부재가 아니라 상상력과 책임의 상실이다.
▍팩스턴 이후의 정치: 감정의 정치, 혐오의 동원
반면, 팩스턴이 경고한 파시즘은 오늘날 새로운 얼굴로 복귀하고 있다. 그것은 제복을 입은 전체주의자의 행진이라기보다는, 인터넷 댓글 속 혐오의 언어, 소셜미디어 알고리즘을 통해 증폭되는 감정의 공명, 그리고 사회적 좌절감과 고립을 이용해 대중을 분열시키는 정서 정치로 나타난다.
팩스턴은 파시즘을 ‘감정적 충동의 정치’로 보았다. 그것은 논리나 정책보다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감정의 틀을 만들고, 적대와 분노를 한 방향으로 몰아가며 대중을 움직인다. 이러한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 분노의 대상이다. 민주주의가 더 이상 문제를 조정하고 협의하는 장이 아니라, 감정적 소속감을 확인하고 적을 배제하는 공간이 될 때, 파시즘은 더 이상 과거의 유령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 숨 쉬며, 우리 곁에 있다.
현대의 파시즘은 이전보다 더 교묘하다. 법을 어기지 않고도 혐오를 조장하고, 전통과 안보,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배제를 합리화한다. 포퓰리즘, 민족주의, 경계 짓기, 음모론은 이 시대의 언어가 되었고, 그 속에서 진실과 허위의 경계는 점점 모호해지고 있다. 팩스턴의 말을 다시 빌리자면, “파시즘은 말보다 행위에, 이념보다 감정에 의존한다.” 오늘날 우리는 바로 그 감정의 정치 속에 살아간다.
가장 무서운 것은, 이 동원이 자발적이라는 점이다. 대중은 자신이 선동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분노하고, 배척하고, 스스로를 정의 내린다. 이성이 침묵하고 감정이 지배할 때,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는다.
▍예언서로서의 고전: 카슨과 팩스턴의 현재성
《침묵의 봄》과 《파시즘》은 단지 시대를 반영한 책이 아니다. 그들은 예언서이자 윤리적 요청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지금 당장 보이지 않는 위험’에 둘러싸여 있다. 생태계의 비명이 무시되고, 다름에 대한 혐오가 정치화되며, 진실이 조롱받고, 감정이 이성을 압도하는 구조 속에서 우리는 서 있다.
이 책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놀랍도록 단순하다.
“침묵하지 말 것. 그리고 맹목적으로 동원되지 말 것.”
침묵은 언제나 강자의 언어를 정당화하고, 동원은 언제나 약자의 고통을 집단 속에 감춘다. 우리가 침묵할 때 생명은 죽고, 우리가 동원될 때 자유는 붕괴한다. 그 두 가지가 동시에 사라지는 순간, 문명은 더 이상 문명이 아니다. 그것은 질서의 탈을 쓴 파국일 뿐이다.
▍다시, 묻는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래서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우리는 과학기술과 정치제도가 전례 없이 고도화된 시대를 살고 있지만, 동시에 생명의 감수성과 이성의 윤리가 사라져가는 시대를 살고 있다. 공기의 온도는 오르는데 마음은 점점 무감각해지고, 혐오의 말은 넘쳐나는데 공감의 언어는 줄어들고 있다.
이는 문명의 위기가 아니라, 감각의 위기, 사유의 위기, 책임의 위기이다.
카슨과 팩스턴은 그 위기의 본질을 꿰뚫는다. 그들은 단지 문제를 지적한 것이 아니라, ‘보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자연을 단지 자원으로 보지 않고, 정치적 감정을 단지 개인적 성향으로 보지 않도록.
그것이 이 책들이 여전히 읽혀야 하는 이유이며, 고전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오늘, 우리는 다시 이 책들을 펴야 한다.
그리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침묵하지 않겠다. 우리는 맹목적으로 움직이지 않겠다.”
문명을 지키는 것은 언제나, 이 단순한 태도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