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 에세이
1. 골목의 기억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번화한 거리도, 웅장한 건물도 아니다. 늘 그런 데를 걷다가도 이상하게 마음이 이끄는 곳은 좁고 오래된 골목길이다. 담벼락에 그림이 그려져 있거나, 작은 화분들이 옹기종기 놓인,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오지 않는, 조용한 골목.
그 골목을 걸을 때면, 마치 세상의 속도를 잠깐 멈출 수 있는 것 같다. 도심의 소음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내 발소리와 숨소리만이 벽돌 바닥에 가만히 내려앉는다. 그 길의 오래된 벽들은 나를 본 적도 없으면서, 나를 다 아는 듯이 받아준다.
어릴 적 살던 동네의 골목이 문득 떠오른다. 거기에는 골목 끝에 항상 노란 고무줄을 들고 서 있던 친구가 있었고, 부모님 몰래 사 먹던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었다.
문득 그 시절의 햇살과 바람, 냄새와 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그 장소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2. 마당의 시간
외할머니 댁 마당.
마당이라고 하기엔 너무 작고, 마당이라 부르기엔 너무 많은 기억이 쌓인 곳. 어릴 적 여름방학이면 나는 매번 그곳으로 향했다. 도시와 달리 벌레도 많고, 모래도 묻고, 뜨거운 햇살에 땀도 났지만 그런 것들을 한순간도 불편하다 생각한 적이 없었다.
마당 한쪽엔 늘 낡은 평상이 있었고, 할머니는 거기 앉아 깨를 털거나 콩을 말렸다. 나는 그 곁에서 쭈그려 앉아 손으로 흙을 파고, 나무젓가락으로 모래집을 지었다. 한참 그렇게 놀다가 눈을 들어보면, 할머니는 가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계셨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그 눈빛은 이 세상 어떤 말보다 따뜻했다.
이제 그 마당은 없다.
할머니도, 그 평상도, 그 여름의 볕도,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내 안엔 여전히 그 마당이 있다. 지칠 때면 나는 눈을 감고 그 마당을 떠올린다. 한 줄기 바람이 얼굴을 쓰다듬고, 햇살이 손등을 간질인다. 그곳은 여전히, 내 마음이 쉬어가는 집이다.
3. 벤치 하나
혼자 걸었던 공원의 오래된 벤치.
그곳은 특별하지 않다. 누군가는 지나치며 앉고, 누군가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자리. 하지만 내겐 아주 특별한 기억이 묻어 있다.
대학 시절, 힘든 일이 있을 때면 나는 늘 그 벤치로 향했다. 벚꽃이 피면 꽃잎이 팔 위에 내려앉았고, 가을이면 낙엽이 조용히 무릎 위에 쌓였다. 겨울에는 하얀 눈이 앉은 채로 나를 위로했다.
그 벤치에 앉아 있으면 묘하게도, 아무도 나를 모르는 느낌이 들면서 동시에, 세상이 나를 아주 조용히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의 말도, 조언도, 심지어 음악도 필요 없던 시간. 그냥 가만히 앉아 있고만 싶은 순간들.
그 벤치에선 울기도 했고, 웃기도 했고, 사랑도 했고, 이별도 겪었다. 시간이 지나 다시 그 벤치에 앉으면, 내 곁엔 아무도 없지만 그때의 나, 그 순간의 나들이 옆에 함께 앉아 있다.
4. 풍경이 내 마음을 닮은 날
어느 날은 집 앞에 있는 단풍나무가 유난히 붉게 보인다. 어느 날은 도서관 옆 카페의 창밖이 이유 없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장소는 변하지 않지만, 내가 그 장소를 바라보는 감정은 매일 다르다.
우리가 사랑하게 되는 장소는, 사실 그 풍경이 내 마음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외로울 땐 한적한 골목이 그립고, 위로가 필요할 땐 햇살 좋은 마당을 떠올린다.
무너지고 싶을 땐 아무도 없는 공원의 벤치가, 다시 일어서고 싶을 땐 바람이 부는 언덕이 필요하다.
어쩌면 그 모든 장소는 다 똑같은 공간이 아니라,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는 ‘마음의 쉼터’였는지도 모른다.
5. 마음의 집
사람에게는 저마다 ‘마음의 집’이 있다.
그건 실제 집이 아닐 수도 있다. 단골 빵집의 창가 자리일 수도 있고, 오래된 골목 끝의 벽일 수도 있다. 어린 시절 뛰놀던 놀이터, 고등학교 교실의 창가, 심지어 어느 여행지의 버스 정류장일 수도 있다.
그 장소에 발을 딛는 순간, 우리는
‘아, 여기면 괜찮아’
‘조금은 안심해도 되겠구나’ 하는 마음을 얻게 된다.
소울 플레이스란 결국 그런 것이다. 세상 어디에서도 나 자신으로 남기 힘들 때, 그 장소만큼은 나를 다치지 않게 품어주는 곳. 내가 나로 돌아가는 길목.
오늘 나는 그런 장소 하나를 다시 떠올리며 조용히 미소 짓는다. 아직 세상은 쉽지 않지만, 쉴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버틸 수 있는 날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