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생각보다 불편하다 4
‘노력’이라는 함정
한국 사회에서 ‘노력’은 거의 신성한 언어처럼 쓰인다. 드라마 〈스카이캐슬〉이 보여주었듯, 입시 경쟁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대학 진학 이후에도 취업, 승진, 부동산, 재테크 등 경쟁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사회는 말한다. “노력하면 보상받는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똑같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해도 결과는 천차만별이다. ‘노력’이라는 말은 이제 불공정한 구조를 은폐하는 가장 강력한 수사로 작용한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도덕적 비난은 오직 ‘노력하지 않는 사람’에게 돌아간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같은 출발선’에 서 본 적조차 없다.
어릴 적부터 가정의 경제력, 부모의 학력, 거주지, 사회적 네트워크 등은 출발선에 심대한 차이를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노력’을 요구하고, 결과를 개인 책임으로 귀속시키는 건 비정한 모순이다. 이것이 바로 ‘노력의 함정’이다. 노력만으로 계층 이동이 가능하다는 환상에 우리는 붙잡혀 있다.
능력주의 신화의 그늘
능력주의는 겉보기엔 실력으로 평가받는 공정한 시스템처럼 보인다. 태생적 조건이 아닌 개인의 능력과 성과에 따라 보상이 주어진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이 체계는 능력을 ‘개인의 고유 자질’로 오인하게 만든다. 그 결과, 불평등은 정당화되고 차별은 은폐된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는 양질의 교육과 안정된 환경, 다양한 기회를 누릴 수 있다. 그 아이가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진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출발점의 차이다. 하지만 능력주의는 이러한 차이를 무시한다.
마이클 샌델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능력주의의 오만함을 경고한다. “능력주의는 성공한 자에게는 오만을, 실패한 자에게는 굴욕감을 안긴다.” 성취를 ‘전적으로 내 능력’이라 믿는 순간,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눈을 감는다. 실패한 사람은 ‘능력이 부족해서’ 실패했다고 자책하게 된다. 사회는 그렇게 연대 대신 경쟁을, 공감 대신 냉소를 키워간다.
샌델의 질문: 진짜 공정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공정한 경쟁’, ‘기회의 평등’이라는 말을 너무나 자주 듣는다. 그러나 샌델은 하버드 학생들에게 반문한다. “복권으로 학생을 선발한다면 어떻겠는가?” 학생들은 격분하며 말한다. “우리는 노력했고, 자격이 있다!” 하지만 샌델은 되묻는다. “그렇다면 당신이 태어난 배경은 복권이 아니었는가?”
진정한 공정은 단순히 출발선의 평등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회 구조 전체가 만들어내는 격차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공정은 ‘기회의 균등’에 머물지 않고 ‘결과의 형평’, 그리고 ‘사회적 연대’로 이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불평등은 완화되고, 사회의 지속 가능성이 확보된다.
차별을 정당화하는 구조적 장치들
능력주의는 차별을 합리화하는 장치로도 작동한다. ‘능력 없는 자는 뒤처져도 마땅하다’는 믿음은 가난한 사람에게 ‘게으름’이라는 낙인을,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는 ‘무능력’이라는 편견을 씌운다. 문제는 구조의 문제임에도, 우리는 문제의 원인을 개인에게 전가한다.
사회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서열화하고, 누구나 눈에 보이지 않는 ‘능력의 사다리’ 위에 서 있다. 이 서열은 경제적 격차를 넘어 자존감, 사회적 관계, 정체성까지 침범한다. ‘능력’이 없는 사람은 존재 자체가 폄하된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다른 조건 속에서 태어나고 살아간다. 사회는 결코 단일한 능력으로 정의될 수 없다. 그럼에도 능력주의는 복잡한 불평등 구조를 감춘 채, 모든 것을 개인 책임으로 환원하는 무대장치를 작동시킨다. 이 무대 위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공정한 경쟁’을 강요받는다.
경쟁 피로와 불공정에 익숙해진 사람들
이제 사람들은 이 불공정에 익숙해졌다. 경쟁이 과도하고 불투명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경쟁에서 멈추면 더 큰 불안이 몰려온다. 불공정을 체감하면서도 그것을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더 많은 스펙을 쌓고, 더 나은 조건을 추구하며 ‘적응’하려 한다.
자녀에게는 더 많은 사교육을 시키고, 이직과 자기계발로 자신을 무장한다. 그 결과, 사회는 점점 신뢰를 잃고, 냉소와 피로가 일상이 된다. ‘공정’이라는 말은 그 진정성을 상실하고, 단지 사람들을 달래기 위한 정치적 수사로 전락한다.
경쟁은 탈락자를 낳고, 탈락자는 ‘노력 부족’이라는 이유로 배제된다. 그렇게 사회는 ‘피로사회’라는 병리 상태로 빠져들며, 공동체는 분열된다.
언어의 조작과 상대적 박탈감
정치권과 언론은 ‘공정’이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소비한다. ‘기회의 평등’을 외치며 정책을 포장하고, ‘능력 있는 자의 승리’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현실은 이상과 다르다. 언어의 조작은 오히려 분노와 박탈감을 확대시킨다.
특히 상대적 박탈감은 절대적 빈곤보다 더 강하게 작용한다. 주변 사람들과의 비교는 사회적 갈등의 불씨가 되며, 정치적 극단주의와 혐오를 부추긴다. ‘공정’이 갈등의 도구가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이유다. 우리는 ‘공정’을 외치면서도, 정작 무엇이 진짜 공정인지 묻지 않는다.
다시 묻는 공정
이제 우리는 ‘공정’이라는 말의 외피가 아닌, 그 본질을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 공정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어떤 조건에서 공정은 실현 가능한가? 공정은 말이 아니라, 제도와 구조로 구현되어야 한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는 ‘모두가 똑같이 경쟁하는’ 사회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다. 경쟁보다 협력, 능력보다 연대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출발점의 차이를 인정하고, 이를 보완할 제도와 문화가 마련되어야 한다.
교육의 공정성은 단지 시험 점수를 맞추는 데 그쳐선 안 된다. 평등한 교육 기회와 생활환경의 보장이 먼저다. 노동 시장은 능력 검증의 장이 아니라, 다양한 배경과 가능성이 공존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경제적 불평등은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 구조의 결과임을 인정해야 한다. 복지와 재분배는 최소한의 생계를 넘어,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시스템으로 정비되어야 한다.
진정한 공정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는 능력주의 신화를 넘어서야 한다. 차별을 감추는 언어를 걷어내고, 약자를 보호하며 연대하는 새로운 사회적 계약을 상상해야 한다. 그 길 끝에서야 우리는 더 나은 공동체, 더 건강한 민주주의, 더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