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생각보다 불편하다 5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는 방식
어느 날, 무심코 SNS 타임라인을 넘기다 영상 하나를 본다. 지하철에서 무시당하는 노인, 골목 어귀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이주 노동자, 교실 안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몰래 촬영한 영상. 그런 장면들이 화면에 흘러나온다. 우리는 멈춰 서서 보고, 듣고, 분노한다. 누군가는 댓글을 달고, 누군가는 공유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다. 감정은 순식간에 솟구치지만, 그만큼 빠르게 사라진다.
이제 타인의 고통은 더 이상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일상적인 콘텐츠가 되었다. 누군가의 아픔은 ‘소재’가 되고, 그에 대한 분노는 미디어를 소비하는 또 하나의 방식으로 작동한다. 진짜 문제는, 우리가 분노하면서도 그 고통을 만들어낸 구조나 맥락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감정을 한 번 분출하고 나면, 마치 제 할 일을 다 한 듯 마음은 가볍기만 하다.
우리는 어쩌면 고통에 ‘반응하는’ 것보다, 고통을 ‘소비하는’ 데 더 익숙해진 사회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감정은 플랫폼 안을 맴돌며 클릭 수를 늘릴 뿐, 현실을 바꾸는 힘으로는 좀처럼 확장되지 않는다. 고통은 콘텐츠가 되고, 분노는 그 콘텐츠를 유통시키는 촉매제로 기능한다. 몰입은 깊지만, 그 몰입은 오직 알고리즘 안에서만 반향을 일으킬 뿐이다.
‘좋아요’로 끝나는 분노
분노는 본래 부당함에 대한 본능적 반응이며, 행동을 이끄는 감정이다. 하지만 디지털 공간에서의 분노는 비물질적이고 단명하다. 몇 줄의 댓글, 이모티콘, 해시태그로 표현되고 곧 소진된다. ‘좋아요’ 하나, ‘공유’ 한 번만큼이나 가볍고 일시적인 감정의 소모에 그친다.
온라인에서의 분노는 클릭 한 번으로 ‘참여했다’는 착각을 준다. 해시태그 캠페인이나 온라인 서명 운동은 진입 장벽이 낮아 많은 이들의 참여를 이끌어내지만, 오히려 그 참여를 얕고 넓게 퍼뜨려 실질적 행동을 대체하는 경우가 많다. ‘감정을 표현했다’는 사실만으로 심리적 보상을 얻고, 그로 인해 현실에 대한 무력감은 점차 희미해진다. 행동 없는 분노, 말뿐인 연대, 반성 없는 공유. 이것이 오늘날 디지털 시대의 ‘저항’이다.
한때 “분노는 정의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분노는 정의를 실현하기보다는 플랫폼에 머무는 시간을 늘리는 데 더 효과적이다. 많은 미디어와 플랫폼은 분노를 자극하는 콘텐츠로 클릭률을 끌어올리고, 감정을 활용해 사용자 참여를 유도한다. 이제 분노는 현실을 바꾸는 도구가 아니라, 디지털 생태계를 움직이는 연료가 되어가고 있다.
클릭티비즘: 저항의 비즈니스화
‘클릭티비즘’(clicktivism)은 클릭과 행동주의(activism)를 결합한 말이다. 온라인 청원에 이름을 올리고, 해시태그를 퍼뜨리고, 이모티콘으로 지지를 표현하는 일련의 행위들은 얼핏 보면 ‘참여’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구조를 실질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한 채, 참여의 환상만을 남긴다.
이 현상은 플랫폼의 알고리즘과도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분노를 자극하는 콘텐츠일수록 더 널리 노출되고, 더 많은 광고 수익을 창출한다. 그렇게 분노는 점차 상업화되고, 저항은 자본의 일부로 흡수된다. 우리는 자극적인 콘텐츠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더 격렬한 감정을 쏟아내지만, 정작 현실을 바꾸기 위한 연대는 점점 희미해진다. 클릭 한 번으로 ‘참여했다’는 착각, 공유 한 번으로 ‘목소리를 냈다’는 자기 위안. 그 사이 구조적 문제는 더 깊고 은밀하게 자리를 잡는다.
슬라보예 지젝: 환상의 저항, 반복되는 현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오늘날 우리가 실천하는 대부분의 ‘저항’이 체제 안에서 허용된, 안전한 형태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저항하지만, 그 저항은 안전하다.” 우리는 실제로 변화를 갈망하기보다는, 변화에 참여하고 있다는 감정 자체를 욕망한다.
지젝은 이를 ‘환상의 저항’이라 부른다. 체제를 흔들지 않는 통제된 분노, 스스로 정의롭다고 느낄 수 있는 적당한 행동. 이러한 감정은 정서적 해소에 머무를 뿐, 구조를 바꾸는 힘은 되지 못한다. 그래서 현실은 언제나 제자리걸음이다. 문제는 반복되고, 분노는 분출되지만, 결과는 늘 변함없다.
진짜 저항은 불편함을 동반한다. 관계의 단절, 사회적 불이익, 심지어 법적 제재까지 감수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런 불편을 감내하기보다, 체제 안에서 가장 덜 불편한 방식으로 저항을 표현하며 스스로를 만족시킨다. 그렇게 저항은 체제에 흡수되고, 변화는 멈춰버린다.
우리는 왜 현실엔 침묵하는가
온라인에서는 누구나 쉽게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익명성과 간편한 접근성 덕분에 감정은 자유롭게 표출된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현실로 옮겨지지 못한다. 거리의 집회는 줄어들고, 투표율은 떨어지며, 지역 사회의 공론장은 점점 사라진다. 감정은 플랫폼에 갇히고, 행동은 오프라인에서 실종되고 있다.
분노의 언어는 날카로워졌지만, 실질적인 사회 참여는 오히려 위축되고 있다. 우리는 ‘공감’이라는 이름으로 정당성을 부여하지만, 그 공감은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결국 공감은 연대로 발전하지 못하고, 분노는 침묵 속으로 사라진다.
그 침묵은 외부의 강제보다 더 무서운 억압이다. 공론장에서 목소리가 빼앗긴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입을 닫은 것이다. 무관심은 더 이상 중립이 아니다. 그것은 현 체제를 유지하는 가장 강력한 기제다. 우리가 불의에 분노하면서도 삶의 방식과 구조를 바꾸지 않을 때, 그 분노는 결국 무관심으로 바뀌고 만다.
무관심의 시대를 넘어서기 위해
‘가짜 분노’는 일시적인 감정 표출에 그친다. 소비되고, 공유되고, 곧 잊힌다. 반면 ‘진짜 관심’은 불편을 감수하며 실천을 동반한다. 이제는 “분노했다”는 감정보다 “행동했다”는 현실이 더 중요하다. 변화는 공감에서 시작되지만, 연대로 이어질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저항은 플랫폼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현실로 확장되지 않는 저항은 결국 상품이 되고, 쇼가 되며,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 사라질 뿐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자극적인 분노가 아니라, 더 지속적인 실천이다. 고통을 단순한 콘텐츠로 소비하지 않고, 그 고통을 만들어낸 구조를 바꾸는 데 동참하는 것. 공감을 행동으로 전환하고, 침묵 대신 불편한 연대를 선택하는 것. 그것이 진짜 관심이며, 진짜 변화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