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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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거의 사라진 말, 만화방.
하지만 내게 그 이름은
한 시대의 공기였고,
마음이 조용히 숨을 쉬던 작은 방이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책가방을 옆으로 메고,
운동장 모래를 잔뜩 뒤집어쓴 운동화를 끌며
동네 골목길을 따라 걷곤 했다.
골목 어귀를 돌아 담벼락을 지나면
‘만화 대여’라고 손글씨로 쓴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페인트가 벗겨진 나무 문,
창살 없는 작은 창문.
밖에서는 안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궁금했고, 이상하게 더 안심이 됐다.
문을 열면,
먼저 곰팡이 섞인 눅눅한 공기가 잠기듯 밀려왔다.
뒤이어 쾨쾨한 책냄새,
그리고 희미하게 흘러나오던 라디오 소리.
“여기는 TBC입니다. 지금은 오후 5시 정각입니다.”
책장에는 『로보트 태권V』, 『소년챔프』, 『번개슛 허리케인』,
그리고 가끔은 『은하철도 999』나 『요철발명왕』 같은
외국 만화도 꽂혀 있었다.
표지는 바래고 모서리는 닳아 있었지만,
그림은 여전히 강렬했다.
줄거리가 내 마음을 휘어잡았다.
주인공이 악당을 무찌르고,
친구를 구하고,
때로는 눈물을 머금고 이별하는 장면들.
나는 그 장면들을 몇 번이고 되돌려 보았다.
현실에선 감히 하지 못할 말들과
드러내지 못한 감정을
만화 속 주인공들이 대신 말해주었다.
친구 종수는 늘 『철인 28호』만 골랐다.
“이게 진짜 남자 만화야!”라며 으스댔지만,
사실 그는 겁도 많고, 눈물도 많은 아이였다.
어느 날, 종수는 아버지에게 크게 혼이 나고
만화방 구석에 앉아 조용히 울먹이며 책장을 넘겼다.
우리는 그 곁에 조용히 앉아,
그저 그의 어깨너머를 바라볼 뿐이었다.
누구도 위로의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저 라면 하나를 시켜 함께 나눠 먹었을 뿐이다.
다 끓지도 않은 라면을 후후 불어가며,
뜨거운 국물을 조심조심 입에 대던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말 대신 마음을 나누었다.
그 만화방 한켠엔 작은 흑백 TV도 놓여 있었다.
저녁 6시가 되면 ‘들장미 소녀 캔디’나 ‘은하철도 999’가 시작됐고,
우린 하나둘 의자를 끌어다 조용히 모여 앉았다.
그 짧은 시간만큼은
세상의 소란도, 어른들의 꾸지람도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먼 나라의 이야기 같았다.
TV 화면 속 밝은 눈망울과 날아가는 기차를 보며
우리는 말없이 웃고, 가끔은 눈시울을 훔쳤다.
그 공간은, 돌이켜보면
우리가 자라는 동안 조용히 숨을 쉴 수 있었던 틈이었다.
상상의 세계에 빠졌다가도
라면 냄새와 함께 다시 현실로 돌아오고,
현실이 무거워질 땐
언제든 다시 만화 속으로 숨어들 수 있었던,
우리만의 작은 쉼터였다.
지금 그 만화방 자리는
편의점이 들어섰고,
종수는 언제부턴가 연락이 끊겼다.
묘하게도, 나는 아직도
그 만화방의 내부 구조를 선명하게 기억한다.
왼쪽 벽엔 스포츠 만화가 빼곡했고,
오른쪽엔 무협지와 순정 만화가 섞여 있었으며,
가운데엔 낡고 푹 꺼진 소파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조용히 졸고 계시던
그 주인 아저씨의 단정한 옆모습까지.
지금도 오래된 책 냄새를 맡거나,
중고서점 한켠에서 『공포의 외인구단』 같은 책을 발견하면
나는 불쑥, 그 시절의 만화방으로 순간 이동하곤 한다.
마음이 조금 지칠 때면,
나도 모르게 그 구석진 소파에 앉아 있는
어린 내 모습을 떠올린다.
책을 읽는 건지, 꿈을 꾸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만화책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 공간과 그 안의 공기는
더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 속에 묻혀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조용한 만화방이 있었기에
나는 하루하루를 조금 더 견딜 수 있었고,
그 시절의 나를,
어느 정도는 지켜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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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 오랜만에 동네 만화방에 들렀다.
예전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카페처럼 꾸며진 내부, 향긋한 커피 냄새, 조용히 흐르는 음악,
푹신한 소파와 깔끔한 조명 아래의 책장은 너무도 낯설었지만
책을 펼치는 순간, 그 모든 생경함은 사라졌다.
나는 천천히 『배가본드』 마지막 두 권을 꺼내 들고 자리에 앉았다.
책장을 넘기며, 아주 오래 전의 기억들이 스르르 깨어났다.
골목 끝 만화방의 눅눅한 공기,
낡은 책장과 라디오 소리,
친구들과 어깨를 맞대고 앉았던 풍경이
장면처럼 떠올랐다.
문득, 그 시절이 다시 내 곁을 스쳤다.
책 속의 인물들이 걸어가던 길과
어느 오후, 만화방으로 향하던 내 발걸음이
겹쳐지는 기분이었다.
그 시절, 그 골목, 그 방.
모든 것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책을 덮고 나올 때, 마음 한쪽이 이상하리만치 따뜻했다.
시간은 흘렀고 공간은 바뀌었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은 여전히 같았다.
만화는 그때도, 지금도
내 마음이 가장 조용히 머무를 수 있는
작은 피난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