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뒤에 숨은 자기 존중의 비밀
잊히지 않는 '자기 존중'의 서명
아주 오래전 기억 하나가 불쑥 떠오릅니다. 당시 책과 방송을 오가며 지적인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한 교수ㅡ유감스럽게도 그분의 이름은 잊었지만ㅡ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가 매년 자신에게 고급 만년필을 선물한다는 말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1년 동안 수고한 자신에게 주는 보상이라고요.
당시 제 마음을 움직였던 것은 만년필의 가격이나 브랜드가 아니었습니다. 선물의 다과(多寡)는 별개의 문제였습니다. 그 행위 자체가 담고 있는 깊은 자기 존중(Self-Respect)의 태도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스스로에게 "나는 지난 1년간의 노고에 대해 이 정도의 가치를 부여할 만한 사람이다"라고 선언하는 엄숙하고도 따뜻한 내면의 서명처럼 느껴졌습니다.
타인의 시선에서 나 자신의 가치로
그 교수의 만년필 선물은 단순히 물건을 소유하는 행위를 넘어, 자신을 향한 경건한 의식(Ritual)이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인정에 길들여져 삽니다. 외부의 명성과 성취에 몰두하며, 정작 그 모든 것을 이루어낸 '나'라는 주체의 노고에는 무심해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 교수는 외부의 박수와 별개로, 매년 자신의 내면적 성실함과 성장에 대해 '내부의 보상'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나도 그래야겠다'고 철석같이 다짐했습니다. 바쁜 삶 속에서도 나를 돌보고 존중하는 의식을 꼭 만들겠노라고 말입니다.
일상에 휩쓸려 잊은 '하루의 틈'
그러나 돌아보니 그 다짐은 늘 일상의 파도에 휩쓸려 잊히곤 했습니다.
우리는 연말마다 타인을 위한 선물 목록은 꼼꼼히 채우면서도, 정작 '나'라는 주체가 지내온 1년의 고독한 분투와 성취를 기리는 일에는 인색해집니다. 삶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우리에게는 스스로를 인정하는 '틈'과 '자리'가 사라집니다.
그 교수의 만년필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의미를 가집니다. 만년필을 고르고, 잉크를 채우고, 펜 끝을 종이에 대는 느린 행위는 디지털 시대의 '속도'와 대비되는 '사유의 느림'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숨 가쁜 일상에 의도적으로 만드는 '하루의 틈'이며, 그곳에 오롯이 '생각이 머무는 자리'를 마련해 주는 물리적인 매개체입니다. 만년필의 묵직한 무게는, 비로소 내 삶의 주인으로 다시 선 '나'의 존재감을 확인시켜 줍니다.
다시, 나를 위한 존중의 의식을 시작하며
오늘, 저는 오래전 그 교수의 기억을 다시 꺼내며 잊었던 다짐을 새롭게 시작하려 합니다.
만년필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그것이 묵직한 명품이든, 아니면 오롯이 나만을 위한 사색의 시간을 예약하는 작은 티켓이든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행위 자체가 타인의 평가와 무관하게, '내가 나를 인정하고 축복한다'는 내면의 엄중한 약속이라는 사실입니다.
스스로에게 합당한 값을 매기고 존중하는 의식을 시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내 삶의 진정한 주인으로 다시 서게 됩니다. 아마 올해의 저는 펜 끝에서 잉크가 스며 나오듯, 새로운 사유와 성장의 흔적을 남겨줄 만년필 한 자루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될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당신의 1년을 치하할 만한 '당신만의 만년필'이 어떤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