팥죽의 붉은 위로, 사라지지 않는 맛

by 안녕 콩코드

길을 잃은 기억, 그리고 붉은 팥의 계절

​오늘은 동지(冬至)였다. 창밖 세상은 겨울비가 내리는 스산한 날씨였고, 나는 작은 유리창 너머로 회색빛 하늘만 바라보이는 요양원의 좁은 면회실에 앉아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둡고 차가운 밤이 시작되는 날, 나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했던 사람을 마주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창가 옆 휠체어에 앉아 계셨다. 눈빛은 맑고 평온했지만, 그 속에 나를 비추는 '기억의 초점'은 없었다. 나는 손을 잡았지만, 할머니의 손은 내 손을 그저 따뜻한 물건처럼 느낄 뿐이었다.


​"할머니, 저 왔어요."


​"아... 오셨구려." 할머니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셨지만, 그 미소는 손녀인 나에게 향하는 것이 아니라, 허공에 떠도는 어떤 낯선 친절과 같았다. 내 이름도, 내가 누구인지도 할머니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부서진 파편이 된 지 오래였다.


​나는 애써 밝은 목소리를 유지하며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때, 복도 저편에서 식사 카트가 밀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보다 먼저, 묵직하고 구수한 냄새가 요양원의 정적을 깨고 퍼지기 시작했다.


​팥죽 냄새.


​달지 않고, 짠맛과 씁쓸함이 묘하게 섞인, 투박하면서도 깊은 팥 특유의 향이었다. 이 냄새는 계절의 냄새이자, 할머니의 냄새였다. 동짓날이면 할머니는 팥죽을 쑤어 집안의 모든 귀신과 나쁜 기운을 쫓아내야 한다고 믿으셨다. 팥의 붉은색은 잡귀를 막아주는 사랑과 보호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내 옆의 할머니는 그 냄새에 아무런 반응이 없으셨다. 팥죽 그릇을 건네받아 할머니 앞에 놓았지만, 할머니의 눈은 여전히 텅 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할머니에게는 이제 팥죽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음식이 아니라, 그저 오늘 점심 식사일 뿐이었다.


​"할머니, 오늘 동지예요. 할머니가 끓여주시던 팥죽... 기억나세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할머니는 고개를 갸웃거리셨다. "팥죽이... 맛있겠구려." 그 반응은 너무나 무심했다.


​나는 애써 감정을 숨기며 팥죽을 한 숟가락 떠서 식히기 시작했다. 붉은 팥이 쑤어지며 걸쭉해진 그 죽의 묵직한 점성은, 과거 할머니가 우리 가족을 위해 평생 감당하셨던 삶의 무게처럼 느껴졌다. 그 묵직함 속에서 나는 갑작스러운 상실감에 압도되었다.


​할머니는 나를 잊었지만, 내가 할머니를 잊을 수 없게 만드는 이 팥죽의 냄새와 맛은 너무나 생생했다. 이 냄새는 나를 지금 당장이라도 과거의 따뜻했던 부엌으로 데려갈 기세였다. 그러나 나는 숟가락을 든 채 멈춰 섰다. 팥죽을 떠먹여 드린다 한들, 할머니는 그것을 단지 낯선 사람이 주는 달콤한 무언가로 받아들이실 뿐일 터였다.


​나는 붉은 팥죽을 바라보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길을 잃은 기억 속에서, 나는 팥죽에 얽힌 가장 오래되고 따뜻한 순간으로 침잠하기 시작했다.


팥죽의 묵직함, 삶의 노동과 희생

​나에게 팥죽은 그냥 음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할머니의 희생과 노동이 응축된 시간의 증거였다. 특히 동지가 가까워지면 할머니의 부엌은 하나의 거대한 의식(儀式) 장소로 변했다.


​기억 속의 할머니는 늘 새벽같이 일어나 찬물에 팥을 불리셨다. 팥을 삶을 때, 첫물은 반드시 버려야 잡내가 없어진다며 그 붉고 뜨거운 물을 망설임 없이 쏟아내시던 모습. 그리고 마침내 푹 삶아진 팥을 무쇠 솥에서 꺼내 체에 거르는 과정이야말로 팥죽의 핵심이었다.


​할머니는 쪼그리고 앉아 팥을 힘껏 으깨어 고운 앙금만 걸러내셨다. 그 팥을 으깨는 묵직하고 끈기 있는 동작은, 마치 할머니가 평생 가족의 모진 풍파를 삭히고 걸러내셨던 삶의 방식과 같았다. 고된 노동으로 할머니의 얇은 손목은 늘 시뻘겋게 부어 있었고,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이 팥죽은 그냥 먹는 게 아이다. 이걸 묵어야 나쁜 기운이 발도 못 붙인다. 너희들이 이 묵직한 팥을 먹고 단단하게 커야지."


​할머니의 말씀은 늘 같았다. 그 팥죽의 묵직함은 곧 '삶을 지탱하는 무게'였고, 붉은색은 우리를 지키는 '사랑의 방패'였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크게 아파서 며칠 밤낮을 앓아누웠을 때도 할머니는 팥죽을 쑤셨다. 밥 한 술 뜨지 못하던 내 입에 할머니는 죽을 조심스레 넣어주셨다. 짭조름하면서도 구수하고,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걸쭉하고 따뜻한 그 감촉. 그것은 단순한 영양분 이상의 '영혼의 부적'이었다. 나는 그 팥죽 한 그릇을 먹고서야 비로소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팥죽은 나에게 언제나 불안과 고통을 쫓아내는 절대적인 위로였다.


​하지만, 그 완벽했던 레시피에도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치매 초기 증상을 보이셨던 해의 동짓날이었다. 그날도 할머니는 팥죽을 쑤셨는데, 앙금 냄새를 맡으며 나는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맛을 본 나는 깜짝 놀랐다. 팥의 씁쓸한 기운이 너무 강했고, 소금이 너무 많이 들어가 짜기까지 했다.


​"할머니, 팥 첫물 안 버리셨어요?"


​할머니는 손녀의 물음에 당황하셨다. "버렸을 텐데? 아, 아니, 벌써 끓이고 있었나?" 혼란스러운 눈빛. 늘 정확했던 '팥죽의 레시피'가 할머니의 머릿속에서 '소금처럼' 녹아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의 나는 그저 '할머니가 늙으셨구나'라고만 생각했다. 나는 그 짜고 씁쓸한 팥죽을 억지로 한 그릇 비웠다. 그것이 할머니의 기억이 점차 사라지는 것을 알리는, 가장 씁쓸한 첫 경고였다는 것을 그때는 왜 알지 못했을까.


​나는 지금 이 순간, 요양원에서 팥죽을 거부하는 할머니의 앙상한 손을 바라본다. 그때 내가 억지로라도 할머니 옆에 앉아 팥을 으깨는 법, 소금의 양을 가늠하는 법을 '마음으로 외워두지 못한 것'이 너무나 애통하다. 그 레시피는 단순한 조리법이 아니라, 할머니의 '사랑이 농축된 유산'이었는데.


​나는 할머니가 드시지 않는 팥죽 그릇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깊은 후회에 빠졌다. 할머니의 기억은 이제 길을 잃었지만, 이 팥죽만이 유일하게 남아 과거와 현재를 잇는 붉은 끈처럼 느껴졌다.


몸이 기억하는 맛의 기적

​할머니는 팥죽을 거부하고 있었다. 숟가락이 입가에 닿을 때마다 고개를 돌리시거나, 무의식중에 손을 휘저으셨다. 화자는 더 이상 할머니의 기억을 되찾으려 애쓰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았다. 기억은 이미 부서져 사라진 유리 조각이었다.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팥죽이 담긴 작은 플라스틱 그릇을 조심스럽게 할머니의 마른 손에 쥐여 드렸다.


​"할머니, 그냥 만져보세요. 따뜻해요."


​할머니의 손에 전해지는 팥죽 그릇의 미지근한 무게감과 도톰한 곡선. 그리고 그릇의 겉면에 맺힌 따뜻한 습기가 할머니의 쭈글쭈글한 손바닥에 스며들었다. 할머니의 눈빛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지만, 손을 쥐고 있는 촉각은 미세하게 반응했다.


​할머니는 묵직한 그릇을 들고 잠시 멈춰 계셨다. 그때였다. 숟가락을 놓으며 내 손가락에 묻었던 팥죽의 잔여물이, 할머니의 엄지손가락 끝에 살짝 묻어 있었다. 할머니는 그 팥죽 자국을 멍하니 바라보시더니, 아주 느리고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엄지손가락을 입술에 가져가 살짝 핥으셨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할머니의 눈빛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얼굴 근육이, 입가의 주름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팥의 짠맛과 구수함이 할머니의 혀끝에 닿자, 할머니의 얼굴에 화자가 10년 동안 잊고 살았던, 지극히 익숙하고 평화로운 표정이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갔다. 마치 꿈결처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화자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 표정은 '아, 이 맛'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것은 기억의 회복이 아니었다. 그것은 몸의 회복이었다. 할머니의 뇌가 손녀를 잊고, 레시피를 잊었을지라도, 수백 번 팥을 으깨고 소금의 양을 가늠했던 손의 감각과, 숱한 세월 동안 팥죽을 먹고 자라난 혀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할머니의 영혼이 '이것은 너를 보호했던 맛이다'라고 반응하는 듯했다.


​나는 숨을 멈추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팥죽의 온기 같은 따뜻함과 안도감이 차올랐다.


​화자는 그 순간 깨달았다. 사랑은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할머니... 할머니의 사랑은 이 맛 속에 남아있었네요. 머리가 아니라, 할머니의 몸이 저를 기억하고 있었어요."


​할머니는 다시 멍한 표정으로 돌아오셨다. 하지만 그릇을 쥔 손에는 이제 억지로 쥐여 드렸을 때와 달리, 미세한 힘이 실려 있었다. 팥죽 그릇을 내려놓는 대신, 할머니는 그 그릇을 품에 안듯 안고 계셨다.


​화자는 더 이상 할머니의 이름을 부르거나 과거를 상기시키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팥죽 한 그릇이 할머니의 길 잃은 영혼에 가장 묵직하고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팥죽은 잡귀를 쫓는 부적이었지만, 이제는 기억 상실의 슬픔을 쫓아내는 따뜻한 부적이 되었다.


​할머니의 기억은 부서졌을지 몰라도, 할머니의 사랑은 그 팥죽의 묵직한 점성처럼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나와 연결되어 있음을, 이 겨울날의 팥죽 맛을 통해 확신했다.


붉은 팥의 영원한 수호

​할머니는 이내 다시 멍한 표정으로 돌아오셨다. 하지만 여전히 그릇을 품에 안듯 쥐고 계셨다. 나는 억지로 팥죽을 드시게 하려 하지 않았다. 팥죽 한 그릇이 짧은 순간 할머니에게 고향과 평화를 선물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나는 할머니의 곁에 앉아 잠시 침묵했다. 더 이상 애달픈 질문도, 슬픈 호소도 필요 없었다. 내 마음은 텅 빈 상실감 대신, 따뜻하고 묵직한 무엇인가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할머니의 기억은 사라졌다. 하지만 할머니가 평생 가족에게 쏟아부었던 사랑의 농도는 팥죽의 묵직한 점성처럼, 나의 삶과 영혼에 깊숙이 배어 있었다. 할머니가 팥죽을 쑤시며 쏟았던 노동과 희생, 그리고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자 했던 간절한 소망은, 레시피가 아닌 '이 맛을 아는 나의 몸' 속에 영원히 저장되어 있었다.


​나는 이제 할머니의 사라진 기억을 애도하는 대신, 그 기억이 남긴 '따뜻한 삶의 태도'를 계승하겠다고 다짐했다. 팥죽의 붉은색이 잡귀를 쫓았듯이, 할머니에게 받은 이 묵직하고 흔들림 없는 사랑의 힘으로 앞으로의 삶을 지켜나가야 했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팥죽 같은 위로를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나 할머니의 곁을 떠날 시간이었다. 나는 할머니가 쥐고 계신 팥죽 그릇을 건드리지 않고, 대신 할머니의 마른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잡았다.


​손에는 팥죽 그릇에서 옮겨온 미지근한 온기가 남아있었다. 그것은 차가운 겨울날, 손을 녹여주던 할머니의 따뜻한 체온과 같았다.


​"할머니, 다음에 올 때까지 이 팥죽의 온기를 꼭 안고 계세요."


​할머니는 여전히 나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내가 떠나는 것을 느끼셨는지 내 손을 잡은 채 고개를 살짝 끄덕이셨다. 그 끄덕임은 '그래, 잘 가거라. 너의 길을 가거라.' 라고 허락해 주는 듯했다.


​나는 요양원 문을 나섰다. 밖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고, 가장 추운 동지였다. 하지만 나는 코트 주머니 속에 할머니의 팥죽 그릇에서 얻은 온기를 품고 있었다.


​나의 할머니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셨지만, 할머니가 내게 주셨던 팥죽의 맛, 그 묵직한 사랑의 온기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붉은 팥처럼 따뜻하고 흔들림 없는 위로를 느꼈다. 이제 나는 이 팥죽의 힘으로 나쁜 기억과 슬픔을 쫓아내며 살아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