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너무 매끄러운 시대에 살고 있다. 스마트폰 화면 위를 미끄러지는 손가락만큼이나, 우리가 소비하는 글들 또한 막힘없이 매끈하다. 세련된 비유, 정갈한 문법, 그리고 보기 좋게 포장된 위로들. 하지만 그 유려한 문장들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종종 기이한 허기를 느낀다. 영혼의 허기를 채워줄 ‘진짜’의 냄새가 그리운 것이다. 그러다 문득 모옌의 수필집 《강풍에도 쓰러지지 않는다》를 펼쳤을 때, 나는 마치 비 온 뒤의 거친 황토밭에 얼굴을 처박은 듯한 강렬한 현기증을 느꼈다. 그리고 읽는 내내 주문처럼 이 말을 되뇌지 않을 수 없었다.
“모름지기 글이란, 이래야 한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라는 거창한 수식어는 잠시 접어두어도 좋다. 이 책은 한 거장의 고결한 철학 강의가 아니라, 평생을 흙과 바람, 그리고 굶주림 속에서 버텨온 한 사내가 온몸으로 길어 올린 ‘생존의 기록’이다. 모옌은 이 수필집을 통해 문학이 도달해야 할 가장 낮고도 뜨거운 곳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그것은 화려한 수사학의 정점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닌 비루함과 숭고함이 맞닿는 지점, 즉 ‘진실’의 자리다.
글이 가진 힘은 어디서 오는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정제된 언어는 결코 독자의 심장에 생채기를 내지 못한다. 모옌의 글에는 지독한 흙내음과 땀 냄새, 그리고 가난의 비린내가 배어 있다. 그는 자신의 유년 시절을 지배했던 석탄처럼 검은 고독과, 할아버지의 구부정한 등 근육에 새겨진 풍파를 날것 그대로 드러낸다. 그 투박하고도 단단한 문장들은 세련된 문명에 길들여진 우리의 감각을 거칠게 흔들어 깨운다.
이 글은 단순히 한 권의 수필집을 소개하는 서평이 아니다. 모옌이 던진 그 뜨겁고 묵직한 돌덩이가 나의 내면에서 어떤 파동을 일으켰는지, 그리고 왜 이 시대에 우리가 다시 ‘강풍’ 앞에 서 있는 할아버지의 손을 잡아야 하는지에 대한 처절한 추적이다. 이제부터 나는 모옌이 안내하는 가오미현의 붉은 수수밭으로, 그리고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불어닥치는 저마다의 강풍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보려 한다. 글이 삶이 되고, 삶이 비로소 글이 되는 그 경이로운 순간을 톺아보기 위해서 말이다.
모옌의 문학을 지탱하는 가장 거대한 기둥은 역설적이게도 '텅 비어 있음'이다. 그의 수필 곳곳에는 유년 시절의 지독한 가난과 굶주림이 화석처럼 박혀 있다. 19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초반, 산둥성 가오미현의 황량한 대지는 소년 모옌에게 따뜻한 품이 아니라 넘어서야 할 거대한 장벽이었다. 그는 글 속에서 당시의 허기를 단순히 '배가 고팠다'는 추상적인 단어로 치명하지 않는다. 대신 "위장이 비명을 지르고,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물이 식재료로 변하던" 그 감각의 전이를 묘사한다.
그가 묘사하는 굶주림은 생존의 공포를 넘어선 일종의 종교적 체험에 가깝다. 학교 운동장에 쏟아진 석탄 더미를 보고 그것이 맛있는 떡처럼 보여 입안에 넣고 씹던 소년의 모습은, 비참함을 넘어선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욕망을 건드린다. "석탄을 씹을 때 이 사이에서 나던 그 사각거리는 소리"는 그에게 고통인 동시에 세상을 감각하는 방식이었다. 모름지기 글이란 이래야 한다. 고통을 멀리서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의 한복판에서 사각거리는 질감을 독자의 입안에까지 전달하는 것. 모옌의 '글음'은 바로 그 척박한 황무지에서 흙을 씹으며 자라났다.
하지만 이 결핍의 연대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가난 그 자체보다 그가 고립된 시간 속에서 길러낸 '내면의 근육'이다. 모옌은 학교를 그만두고 가축을 돌보며 들판에서 홀로 보낸 긴 시간을 회상한다. 친구들과 어울려 뛰놀아야 할 나이에 그가 마주한 것은 끝없이 펼쳐진 수수밭과 지루하게 흐르는 강물, 그리고 말을 걸어오지 않는 짐승들이었다. 이 지독한 고독은 소년에게 관찰의 눈을 선물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풀잎의 미세한 흔들림, 소의 눈동자에 비친 노을의 색깔, 바람이 불어올 때 대기가 내뱉는 낮은 신음소리. 그는 침묵의 시간 동안 세상의 미세한 결을 손으로 만지듯 기억에 새겼다. 모옌은 말한다. "고독은 나를 생각하게 만들었고, 그 생각들은 훗날 내 소설 속의 수많은 인물이 되었다."고. 결핍은 그에게 채워지지 않는 구멍이 아니라, 온갖 상상력과 서사가 쏟아져 나오는 화수분이었던 셈이다.
대중적인 문체로 풀어낸 그의 고백은 우리에게 서늘한 질문을 던진다. 풍요의 시대, 모든 것이 과잉된 오늘날의 글들이 왜 그토록 힘이 없는지 말이다. 모옌의 문장이 지닌 야생적인 생명력은 결핍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훈장이다. 그는 비참한 현실을 미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비참함의 밑바닥을 더 깊게 파헤친다. 그 깊이가 깊을수록, 거기서 솟아오르는 문학적 치유의 힘 또한 강력해진다는 사실을 그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소년 모옌이 겪은 황무지는 단지 지리적인 공간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상태의 '욕망'과 '생존'이 맞부딪치는 전쟁터였다. 그곳에서 살아남아 기록된 문장들이기에, 우리는 그의 글을 읽으며 흙냄새를 맡고, 피 냄새를 느끼며, 끝내는 그 거친 손길에 위로받게 된다. "모름지기 글은 이래야 한다"는 감각은, 이처럼 삶의 가장 밑바닥에서 길어 올린 진실이 독자의 안온한 일상을 헤집어 놓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이 수필집의 백미이자, 모옌이라는 작가의 정신적 뿌리를 단 한 장면으로 응축한다면 그것은 단연 표제작인 〈큰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다〉의 한 장면일 것이다. 어린 모옌이 할아버지와 함께 수레를 끌고 들판으로 나갔다가 맞닥뜨린 거대한 폭풍우. 그 대목에서 모옌의 문장은 마치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긴장감으로 가득 차오른다. 여기서의 ‘글음’은 단순한 서사를 넘어, 자연의 거대한 위력 앞에 선 인간의 미약함과 그 미약함을 넘어서는 숭고한 의지를 독자의 피부 위로 직접 이식한다.
하늘이 노랗게 변하고, 대기가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강풍은 재앙 그 자체였다. 사람도 짐승도 몸을 숨기기에 급급한 그 절체절명의 순간, 노인은 도망치는 대신 수레의 손잡이를 가슴팍으로 꽉 눌러 잡는다. 모옌은 이 사투를 묘사하며 화려한 미사여구를 동원하지 않는다. 대신 할아버지의 발가락이 흙바닥을 파고드는 모습, 팽팽하게 불거진 팔의 힘줄, 그리고 바람에 꺾이지 않으려 낮게 깔리는 호흡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할아버지는 수레 손잡이를 꽉 붙잡고 활시위가 팽팽히 당겨진 활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두 다리는 떨렸고 홑저고리는 바람에 찟겨 나가 양쪽 소매만 어깨에 걸려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 거센 바람에 맞서고 있었다. 수레는 한 뼘도 나아가지 못했지만 반 발짝도 뒤로 밀리지 않았다."
이 대목에서 독자는 전율한다. 글이 가진 진정한 힘은 보이지 않는 의지를 눈에 보이는 근육의 떨림으로 치환할 때 발생한다는 것을 모옌은 증명한다. 결국 바람이 지나간 뒤, 수레에 가득 실었던 풀들은 반절 이상이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린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것은 패배다. 수고로운 노동의 결과물이 허공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옌의 시선은 그 상실이 아니라,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도 여전히 수레 손잡이를 움켜쥔 채 서 있는 할아버지의 ‘존재’에 머문다.
비록 거의 빈 수레일지언정, 할아버지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는 바람에 졌지만, 바람에 굴복하지는 않았다. 이것이 바로 모옌이 평생을 걸쳐 문학으로 형상화하고자 했던 인간의 얼굴이다. 우리는 흔히 승패의 결과로 삶을 규정하려 들지만, 모옌의 글은 결과 너머의 ‘태도’를 말한다. 강풍이라는 거대한 운명, 혹은 시대적 비극 앞에 선 단독자가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존엄은 바로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는 것 자체라는 서늘한 가르침이다.
대중적인 문체란 이토록 심오한 철학을 할아버지의 억센 손마디라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통해 전달하는 힘이다. 모옌은 독자에게 "용기를 내라"고 훈계하지 않는다. 대신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흙먼지를 뒤집어쓴 노인의 뒷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그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독자는 자신의 삶에 불어닥친 강풍을 떠올리며 마른침을 삼키게 된다.
"글은 이래야 한다"는 감탄은 아마도 이 지점에서 정점을 찍었을 것이다. 고통을 전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고통을 견뎌내는 인간의 척추를 이토록 단단하게 세워 올리는 글. 모옌의 문장은 그 자체로 하나의 '수레 손잡이'가 되어, 삶이라는 폭풍우 속에서 휘청이는 우리의 손에 쥐여진다. 우리는 그의 글을 읽으며 비로소 깨닫는다. 내 삶의 풀들이 다 날아가 버릴지라도, 내가 이 수레를 놓지 않는 한 나의 항전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만약 모옌의 글이 시련과 극복이라는 엄숙한 서사로만 점철되었다면, 우리는 그를 존경할 수는 있어도 이토록 친근하게 사랑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모옌의 ‘글음’이 지닌 독보적인 매력은 지독한 비극의 한복판에서 기어이 ‘웃음’을 길어 올리는 해학에 있다. 그는 고통을 신성시하거나 박제하지 않는다. 대신 그 고통을 비틀고, 풍자하며, 때로는 능청스럽게 희화화함으로써 비극이 삶을 완전히 집어삼키지 못하도록 방어막을 친다.
그의 수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결핍투성이다. 굶주림에 눈이 멀어 엉뚱한 짓을 저지르는 이웃, 가난 속에서도 허세를 부리는 친척, 시대의 광기 속에서 우스꽝스러운 비극을 연출하는 사람들까지. 모옌은 이들을 차가운 시선으로 비판하거나 값싼 동정으로 감싸지 않는다. 대신 그들의 지질하고도 인간적인 면모를 생생한 입담으로 풀어낸다. 이것이 바로 모옌식 리얼리즘의 정수다. 현실이 가혹할수록 그 현실을 견뎌내는 인간의 무기는 비장미가 아니라 어처구니없는 웃음일 때가 많다는 사실을 그는 꿰뚫고 있다.
예를 들어, 그가 묘사하는 어린 시절의 배고픔은 슬프지만 동시에 기묘하게 웃기다. 먹을 것이 없어 온갖 풀과 나무껍질을 연구하는 소년들의 진지함은 흡사 연금술사의 그것과 닮아 있고, 먹지 못하는 것을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며 벌어지는 소동들은 독자로 하여금 눈물을 머금은 채 실소를 터뜨리게 만든다. 모옌은 말한다. "문학은 고통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사람이 어떻게 웃으며 살아가는지를 기록하는 것"이라고.
이러한 해학적 접근은 대중적인 문체로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어려운 문학적 담론이나 이데올로기 대신, 시장바닥의 떠들썩한 대화처럼 생동감 넘치는 어휘들을 배치함으로써 독자와의 심리적 거리를 좁힌다. "글은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는 감각은 여기서 다시 한번 증명된다. 좋은 글은 독자를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대신 독자의 옆구리를 툭 치며 "거봐, 사는 게 다 이런 거 아니겠어?"라고 말을 건네며, 삶의 비릿한 냄새조차 웃음으로 소화할 수 있게 도와준다.
또한 그의 리얼리즘은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교묘하게 허문다. 지극히 현실적인 빈곤의 묘사 사이로 스며드는 기괴한 환영이나 민담 같은 이야기들은, 글에 입체적인 탄력을 부여한다. 고통이 너무 깊어 현실이 현실 같지 않게 느껴지는 그 찰나의 순간을 모옌은 해학이라는 렌즈로 포착해낸다. 그리하여 그의 문장은 무겁지만 경쾌하고, 슬프지만 따뜻하다.
우리가 모옌의 수필을 읽으며 위로받는 이유는 그가 "다 잘 될 거야"라는 빈말을 건네서가 아니다. 오히려 "인생은 원래 이렇게 엉망진창이고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이 정도 웃음거리는 있지 않으냐"는 그의 정직한 냉소와 유머에 안도하는 것이다. 비극을 해학으로 승화시키는 그의 필력은, 강풍 앞에 서서 허허롭게 웃어젖히는 할아버지의 주름진 얼굴을 닮았다. 그 웃음이야말로 어떤 풍파에도 꺾이지 않는 인간의 가장 강력한 저항이자, 모옌이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단단한 위로다.
글이 나아가야 할 길: 진실이라는 무기
우리가 흔히 접하는 '거장'의 수필은 종종 자기방어와 미화의 덫에 빠지곤 한다. 쌓아온 명성에 흠집이 나지 않도록 고결한 인격을 연기하거나, 자신의 과거를 교훈적인 서사로 재포장하려는 유혹 때문이다. 그러나 모옌의 《강풍에도 쓰러지지 않는다》가 지닌 압도적인 '글음'은 그 모든 위선을 걷어낸 '벌거벗은 진실'에서 기인한다. 그는 이 책을 통해 글이 나아가야 할 유일한 길은 정직이라는 무기를 들고 자기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것임을 몸소 보여준다.
모옌은 자신의 부끄러운 밑바닥을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어린 시절 타인의 행운을 시기했던 비좁은 마음, 배고픔 앞에서 도덕보다 본능이 앞섰던 순간들, 그리고 작가로 성공한 뒤에도 여전히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는 비겁함과 공포를 그는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서늘하게 기록한다. "글은 이래야 한다"는 우리의 확신은 바로 이 지점에서 증폭된다. 독자는 작가의 화려한 이력이 아니라, 그가 고백하는 '인간적인 흠결'에서 비로소 진정한 연결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직함은 문장의 질감마저 바꾼다. 그의 문장은 매끈하게 가공된 실크라기보다는, 거친 올이 그대로 살아있는 삼베나 투박한 무명천에 가깝다. 손으로 만지면 지문이 걸릴 것 같은 그 거친 질감은, 작가가 자신의 영혼을 있는 그대로 종이 위에 문질러 놓았기에 가능하다. 그는 독자를 현혹하기 위해 단어를 고르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겪은 고통의 무게를 가장 정확하게 지탱할 수 있는, 뼈대가 굵은 단어들을 골라 배치한다.
대중적인 문체로 풀어낸 그의 진실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는 글쓰기를 "자신의 상처를 헤집어 그 안에서 진주를 찾는 행위"가 아니라, "상처가 덧나더라도 그 고름을 짜내어 정직한 흉터를 남기는 과정"으로 정의하는 듯하다. 이처럼 처절한 자기 객관화는 독자에게 묘한 해방감을 선사한다. 거장조차 저토록 흔들리고 부끄러워하는데, 하물며 평범한 우리의 삶이 흔들리는 것은 얼마나 당연한 일인가 하는 안도감이 찾아오는 것이다.
결국 모옌이 생각하는 좋은 글이란 '아름다운 글'이 아니라 '필요한 글'이다. 누군가의 고통에 동참하고, 누군가의 어둠에 촛불 하나를 켜주는 글. 그러기 위해서 작가는 가장 먼저 자신에게 정직해져야 한다는 준엄한 원칙을 그는 지키고 있다. 그가 휘두르는 '진실'이라는 무기는 타인을 공격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가식과 허영의 껍데기를 깨부수기 위해 존재한다.
우리가 이 책을 읽으며 느꼈던 그 뜨거운 감각의 실체는 바로 이것이다. 글은 모름지기 읽는 이의 영혼에 생채기를 낼 만큼 날카로워야 하며, 동시에 그 상처를 어루만질 만큼 따뜻한 진심을 품고 있어야 한다는 것. 모옌은 노벨상이라는 거창한 훈장 뒤로 숨지 않고, 여전히 들판의 소년처럼 정직하게 소리 지르고 있다. 그 정직한 외침이 담긴 문장들이야말로 시대를 불문하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글음'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책장을 덮는 순간, 방 안을 가득 채우던 가오미현의 흙먼지는 서서히 잦아들지만 마음속에 박힌 묵직한 돌덩이는 여전하다. 모옌의 《강풍에도 쓰러지지 않는다》는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만을 남긴다. "지금 당신의 삶에 불어닥치는 그 강풍 앞에서, 당신은 무엇을 움켜쥐고 있는가?" 작가는 자신의 전 생애를 전시하며 답했다. 움켜쥐어야 할 것은 화려한 성취나 보상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나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존엄의 손잡이'라고 말이다.
우리가 서론에서부터 되뇌었던 "모름지기 글은 이래야 한다"는 말은, 사실 "모름지기 삶은 이래야 한다"는 깨달음의 다른 이름이었을지도 모른다. 좋은 글은 독자를 현실로부터 도망치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독자의 등을 떠밀어 자신이 처한 척박한 현실의 한복판으로 돌려보낸다. 모옌의 문장들이 그러했다. 그의 글을 읽고 나면, 내가 처한 남루한 일상이 조금은 다르게 보인다. 굶주림과 고립, 그리고 실패마저도 내 삶을 구성하는 단단한 뿌리가 될 수 있다는 용기를 얻기 때문이다.
2026년의 우리 또한 저마다의 강풍을 맞으며 살아간다. 그것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공포일 수도, 무너진 인간관계에 대한 상실감일 수도, 혹은 스스로에 대한 깊은 불신일 수도 있다. 모옌은 말한다.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바람에 휩쓸려 나를 잃어버리지 않을 자유는 우리에게 있다고. 비록 수레에 실었던 소중한 것들이 바람에 날아가 버릴지라도, 끝까지 수레 손잡이를 놓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 것이 아니다. 그 버팀의 시간 자체가 바로 승리다.
이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얻은 '글음'의 감각을 일상의 '삶의 진실함'으로 치환해야 한다. 매끈하고 화려한 삶에 현혹되지 않고, 나의 상처와 결핍을 정직하게 대면하는 것. 고통 속에서도 옆 사람에게 농담 한마디 건넬 수 있는 해학을 잃지 않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쓰러뜨리려는 세상의 풍파에 맞서 두 발을 땅에 굳건히 딛고 서는 것. 모옌의 투박한 문장들이 우리 영혼에 새겨놓은 이 단단한 약속들은, 우리가 다시 세상으로 나아갈 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다.
강풍은 지금 이 순간에도 불고 있다. 하지만 두렵지 않다. 우리에겐 모옌이 보여준 할아버지의 억센 손마디가 있고, 어떤 가뭄에도 말라 죽지 않는 붉은 수수밭의 생명력이 문장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글이 삶이 되고, 그 삶이 다시 누군가에게 강풍을 견딜 힘이 되는 경이로운 순환. 《강풍에도 쓰러지지 않는다》를 읽는 내내 우리가 느꼈던 그 뜨거운 전율은, 이제 책 밖의 세상에서 우리의 삶으로 증명될 차례다.
[미주] ‘글음’에 대하여
본문에서 사용한 ‘글음’은 “글은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는 작가적 확신을 담아 명명한 조어(造語)로, 세 가지 층위의 의미를 갖는다.
글의 음(音): 문장의 목소리. 눈으로 읽기 전에 거친 강풍과 굶주린 소년의 비명처럼 삶의 현장이 청각적으로 살아 있는 문장의 생동감을 뜻한다.
글의 음(陰): 삶의 그늘. 고통, 가난, 시기심 등 인생의 비루한 이면을 피하지 않고 정직하게 직시할 때 비로소 발현되는 문장의 깊이와 음영이다.
글의 다움: 본질의 기개. ‘사람다움’처럼 기교나 장식을 걷어내고 읽는 이의 영혼에 생채기를 내어 끝내 새살을 돋게 하는 글쓰기 본연의 숭고한 가치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