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소스 위에 띄운 무모한 승부수
"진짜 여기예요? 와, 이런 데가 있었네."
내 뒤를 따라 좁고 가파른 지하 계단을 내려오던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나는 애써 여유로운 척 웃어 보였지만, 사실 손바닥엔 땀이 배어 있었다. 첫 데이트 아닌 데이트. 근사한 파스타 집이나 분위기 좋은 일식집을 예약할까 수백 번 고민했지만, 결국 내가 선택한 곳은 중학교 때부터 단골이었던 이 낡은 즉석 떡볶이집이었다.
'너무 성의 없어 보이면 어쩌지?'라는 불안감과 '나만의 아지트를 공유하고 싶다'는 욕심 사이에서 고민하다 던진 무모한 승부수였다. 다행히 그녀의 목소리에 거부감은 없었지만, 좁은 식당 안을 가득 채운 매콤하고 진득한 고추장 냄새가 오늘따라 유난히 공격적으로 느껴졌다.
우리는 벽면에 수많은 낙서와 세월의 흔적이 묻은 구석 자리에 마주 앉았다. 평소 친구들과 올 때는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아줌마, 여기 3인분에 쫄면 사리 추가요!"라고 외쳤겠지만, 지금 내 앞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잘 보이고 싶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나는 메뉴판을 집어 든 손가락 끝에 힘을 주며 최대한 신중하게 물었다.
"여기 매운맛 조절이 되는데... 잘 드시는 편이에요? 제가 너무 제 취향대로 온 건 아니죠?"
그녀는 "아니요, 저 떡볶이 완전 좋아해요! 매운 것도 어느 정도는 잘 먹고요"라며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 한 번에 뱃속을 꽉 채우고 있던 긴장이 버터처럼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안도하며 떡볶이 2인분에 만두와 김말이, 그리고 그녀가 좋아한다는 치즈 사리까지 추가했다.
주문을 마치고 음식을 기다리는 짧은 시간, 우리는 평소보다 더 많은 말을 쏟아냈다. 침묵이 흐르면 혹시나 그녀가 이 장소를 지루해할까 봐, 혹은 우리 사이의 공기가 어색해질까 봐 나는 쉴 새 없이 화제를 찾아 헤맸다. 그녀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이 쑥스러워 자꾸만 젓가락을 만지작거리거나 물컵을 채워주었다.
이윽고 철판 가득 담긴 떡볶이가 우리 앞에 놓였다. 선홍빛 국물 위로 하얀 치즈가 눈처럼 녹아내리는 모습은 꽤 먹음직스러웠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벌써 '전술'로 가득 찼다. 국물이 튀지 않게 조심스럽게 앞접시에 덜어줘야 하고, 그녀가 매워하면 바로 쿨피스를 대령해야 하며, 무엇보다 이 투박한 음식을 먹으면서도 내가 꽤 괜찮은 대화 상대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빨갛게 끓어오르는 국물은 마치 내 속마음 같았다. 뜨겁고, 강렬하며, 숨길 수 없이 선명한 색깔. 나는 젓가락을 들어 조심스럽게 떡 하나를 집어 올렸다. 이제 막 시작되려는 이 미묘한 관계의 온도가 이 떡볶이만큼만 뜨거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그녀에게 첫 접시를 건넸다.
그녀의 앞접시를 채우는 진심
그녀가 떡볶이를 한 입 베어 물고는 "음!" 하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 매운가? 아니면 입맛에 안 맞나?' 하는 걱정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이내 그녀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진짜 맛있네요! 딱 제가 좋아하는 적당한 매콤함이에요." 그 한마디에 나는 전쟁터에서 승전보를 들은 장수처럼 남몰래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나는 그때부터 본격적인 '서포터' 모드로 돌입했다. 그녀의 앞접시가 비어가는 속도를 체크하며, 국물이 잘 배어든 밀떡과 야끼만두를 적절한 타이밍에 옮겨주었다. 평소 친구들과 먹을 때는 젓가락 싸움을 하며 뺏어 먹기 바빴던 내가, 소중한 만두 하나를 온전하게 그녀에게 양보하는 모습이 스스로도 낯설면서도 묘하게 뿌듯했다.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챙겨주는 일이 이토록 즐거운 일이었던가.
"천천히 먹어요. 여기 쫄면 사리는 나중에 먹어야 더 맛있거든요."
나는 짐짓 전문가라도 된 양 너스레를 떨며 그녀의 컵에 쿨피스를 채워주었다. 그녀가 매운 기운에 입술을 살짝 내밀며 "씁-" 하고 숨을 들이켜는 모습이 유난히 귀여워 보여 자꾸만 시선이 갔다. 평소엔 무심코 넘겼을 사소한 버릇들이 '썸'이라는 필터를 거치자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영상처럼 내 눈에 기록되고 있었다.
대화는 떡볶이 국물처럼 점점 진해졌다. 처음의 어색했던 탐색전은 사라지고, 우리는 서로의 학창 시절 단골집 이야기부터 시작해 못 먹는 음식, 그리고 의외의 취향들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떡볶이 국물에 튀김 가루를 비벼 먹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마치 엄청난 보물 지도를 발견한 것 같은 희열을 느꼈다. '나랑 정말 잘 통하는구나'라는 확신이 떡볶이의 열기보다 더 뜨겁게 내 가슴을 데웠다.
어느 순간, 그녀가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근데 왜 본인은 안 먹고 자꾸 저만 줘요? 저만 돼지 만들려나 봐요." 장난기 섞인 그녀의 핀잔에 나는 쑥스러워 헛기침을 했다. "아니, 맛있게 먹는 거 보니까 배가 불러서요." 낯간지러운 대사였지만 진심이었다.
좁은 테이블 덕분에 우리의 거리는 젓가락이 오가는 동선만큼이나 가까워져 있었다. 그녀가 떡볶이를 집으려다 실수로 내 손등을 살짝 건드렸을 때, 전기가 오른 듯 짜릿한 감각이 손끝에서부터 어깨까지 타고 올라왔다. 그녀는 "어머, 미안해요"라며 웃었지만, 나는 그 짧은 접촉이 남긴 온기 때문에 한동안 젓가락질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빨간 소스가 끓어오르는 소리가 마치 내 심장 소리처럼 커다랗게 들려오고 있었다.
볶음밥 하트 위에 얹은 고백
떡볶이 판이 바닥을 드러낼 무렵, 나는 승부수를 띄워야 할 타이밍임을 직감했다. "여기까지 와서 볶음밥 안 먹으면 반칙인 거 아시죠?" 내 제안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머니가 밥과 김 가루, 들기름을 듬뿍 가져와 철판 위에 부어주셨다.
주걱을 건네받은 나는 평소보다 훨씬 진지한 태도로 밥을 볶기 시작했다. 마치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이라도 앞둔 것처럼 신중하게 밥알을 펴 바르고, 누룽지가 적당히 생기도록 불 조절을 했다. 그녀는 턱을 괴고 내 손놀림을 구경하며 "오, 제법 전문가 포스인데요?"라고 추켜세워주었다. 그 칭찬 한 마디에 어깨가 으쓱해지면서도, 숟가락을 쥔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밥이 어느 정도 볶아졌을 때, 나는 장난기가 발동한 척 숟가락 끝으로 밥의 모양을 다듬었다. 둥근 원형이었던 밥을 조금씩 만져서 삐죽한 하트 모양으로 만들었다. 유치하다는 걸 알면서도, 지금 이 분위기가 아니라면 언제 이런 마음을 슬쩍 보여줄 수 있을까 싶었다.
"자, 이건 제 정성입니다."
하트 모양 볶음밥을 보고 그녀가 "푸하하!" 하며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뭐예요, 진짜!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니에요?" 그녀의 반응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떡볶이가 매워서인지, 아니면 내 마음을 들켜서인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나는 짐짓 뻔뻔하게 대꾸했다. "아니, 볶음밥은 원래 사랑으로 볶아야 맛있는 법이거든요."
말은 가볍게 내뱉었지만, 내 눈은 그녀의 표정을 집요하게 살피고 있었다. 다행히 그녀의 웃음 속에는 거부감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자기 숟가락으로 하트 한쪽을 살짝 떠먹으며 "진짜 사랑이 들어가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고소하네요"라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 순간, 우리 사이를 감돌던 어색한 긴장감은 완전히 휘발되고, 그 자리에 끈적하고 달콤한 무언가가 들어앉았다.
철판 위에서 밥알이 톡톡 터지는 소리가 들리고,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눈을 깊게 마주 보았다. 시끄러운 분식집의 소음, 옆 테이블 학생들의 웃음소리, 아주머니의 도마질 소리가 모두 배경음악처럼 멀어졌다. 오직 주황색 조명 아래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만이 세상의 중심인 것 같았다.
나는 이 짧은 식사가 끝나가는 것이 못내 아쉬워, 눌어붙은 밥알을 긁어내며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사실... 오늘 너무 긴장해서 떡볶이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몰랐어요. 근데 맛있게 먹어주니까 진짜 고맙네요." 내 솔직한 고백에 그녀의 눈빛이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저도 좋았어요. 근사한 곳보다 여기가 훨씬 더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그녀의 대답은 볶음밥 끝에 남은 바삭한 누룽지처럼 고소하고 선명했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빨간 떡볶이 국물이 우리 옷깃에만 스민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 깊숙한 곳까지 발갛게 물들여 놓았다는 것을. 우리는 비워진 철판을 사이에 두고, 다음엔 어떤 '맛'을 함께 나누게 될지 내심 기대하며 마지막 한 숟가락을 비워냈다.
주머니 속의 온기와 다음을 향한 예보
계산을 마치고 좁은 지하 계단을 올라오니 차가운 밤공기가 단숨에 폐부 깊숙이 박혔다. 뜨거운 철판 앞에 앉아 있던 탓에 달궈졌던 얼굴이 기분 좋게 식어갔다. 계단 끝에서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나를 보며 웃었다. 가로등 불빛이 그녀의 머리카락 끝에 걸려 반짝였고, 그 뒤로 보이는 밤거리는 아까보다 훨씬 더 선명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오늘 진짜 잘 먹었어요. 사실 저, 즉석 떡볶이 엄청 오랜만에 먹는 거였거든요."
그녀의 말에 나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대답했다. "다행이네요. 사실 스테이크 집 안 갔다고 실망하면 어쩌나 속으로 엄청 떨었거든요." 내 솔직한 고백에 그녀가 다시 한번 맑은 웃음소리를 냈다. "스테이크는 언제든 먹을 수 있잖아요. 근데 오늘 먹은 떡볶이는 왠지 딱 오늘만 느낄 수 있는 맛이었던 것 같아요."
'오늘만 느낄 수 있는 맛.' 그 문장이 내 가슴속으로 떡볶이 국물처럼 뜨겁게 스며들었다. 우리는 지하철역까지 이어지는 길을 천천히 걸었다. 아까 올 때는 그녀의 보폭에 맞추느라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는데, 이제는 나란히 걷는 이 리듬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음악처럼 느껴졌다.
손을 잡고 싶다는 충동이 몇 번이나 주머니 속 내 손가락을 움찔거리게 했다. 하지만 나는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오늘 우리가 나눈 떡볶이의 온기가 아직 우리 사이에 충분히 머물러 있었고, 억지로 손을 잡지 않아도 우리의 어깨가 스칠 때마다 전해지는 미세한 진동이 그보다 더 확실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 입구의 개찰구 앞에서 그녀가 멈춰 섰다. "여기서부터는 저 혼자 가도 돼요. 오늘 고마웠어요, 진짜로." 그녀의 인사가 끝나는 것이 아쉬워 나는 괜히 옷깃에 밴 떡볶이 냄새를 핑계 삼아 말을 붙였다. "아, 옷에 냄새 다 뱄을 텐데... 집에 가서 꼭 페브리즈 뿌려야 해요. 안 그러면 내일 아침까지 제가 생각날지도 몰라요."
내 실없는 농담에 그녀가 장난스럽게 눈을 흘기며 대꾸했다. "그럼 안 뿌려야겠네요. 계속 생각나게."
그 찰나의 대답이 내 심장을 멎게 만들었다. 그녀는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주머니 속의 손은 여전히 뜨거웠고, 입안에는 아직도 매콤하고 달콤한 떡볶이의 여운이 감돌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휴대폰을 꺼내 오늘 우리가 갔던 그 낡은 식당의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수많은 사람이 다녀간 평범한 분식집이었지만, 내게는 이제 그곳이 '우리가 처음으로 서로의 무장해제된 웃음을 확인한 장소'가 되었다.
코트 소매에서 배어 나오는 연한 고추장 냄새를 맡으며 나는 생각했다. 사랑은 때로 화려한 다이닝 테이블보다, 좁은 골목길 낡은 식탁 위에서 더 정직하게 싹튼다는 것을. 떡볶이의 매운맛은 우리의 방어벽을 무너뜨렸고, 그 달콤함은 우리가 서로에게 스며들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너무 즐거웠어요. 아, 그리고 아까 말했던 그 볶음밥 맛집... 이번 주 주말에 가볼래요?]
답장은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도착했다. 휴대폰 화면의 밝은 빛이 내 얼굴을 환하게 비췄고, 나는 밤거리를 가득 채운 찬 바람 속에서도 마치 봄날의 한복판을 걷는 듯한 온기를 느꼈다. 떡볶이로 시작된 우리의 계절은 이제 막 뜨거운 여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