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내일과 초라한 오늘 사이
내일이면 나는 한 여자의 남편이 된다. 집안 가득 놓인 축하 화환의 리본들과 정성껏 다려진 턱시도, 그리고 거실 한구석을 차지한 신혼살림의 박스들이 비현실적인 광경처럼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화려하고 북적여야 할 전야(前夜), 하지만 정작 내 가슴 속은 텅 빈 운동장처럼 서늘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결혼 준비라는 거대한 태풍이 지나간 자리, 부모님은 내일의 행사를 위해 일찌감치 잠자리에 드셨고 친구들의 축하 전화도 잦아든 깊은 밤. 나는 왠지 모를 허기에 이끌려 집 근처 24시 국수집으로 향했다. 화려한 예식장의 코스 요리가 아닌, 투박한 양은 냄비에 담긴 멸치 국물 냄새가 사무치게 그리웠기 때문이다.
"잔치국수 하나 주세요."
주인아주머니의 무심한 대답과 함께 가스레인지 위에서 물이 끓기 시작했다. 식당 안은 한산했다. 구석에서 밤을 지새우는 택시 기사님과 취기가 가시지 않은 취객 한 명뿐. 내일 예식장에서 주인공으로 서게 될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나는 지금 이 공간의 풍경 속에 지극히 평범하고 초라하게 녹아들어 있었다.
잔치국수. 이름 그대로 잔칫날 빠지지 않는 길조의 음식이다. 길게 뻗은 국수 가락처럼 무병장수하고 복을 누리라는 의미가 담긴 그 음식을,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내 인생의 가장 큰 잔치를 코앞에 두고 홀로 마주하고 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총각'으로서 먹는 마지막 식사가 될 것이다. 내일부터는 '나'라는 개인보다는 '우리'라는 이름으로 묶인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 거대한 변화에 앞서 나는 지금껏 살아온 나의 과거들과 조용히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뜨겁게 사랑했고, 치열하게 방황했으며, 때로는 비겁하게 도망쳤던 그 수많은 '나'와의 작별 말이다.
이윽고 뽀얀 국물에 정갈하게 말린 소면, 그 위에 얹어진 호박 고명과 김 가루가 담긴 잔치국수가 내 앞에 놓였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그릇 안에는 단순히 면과 국물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난 30여 년간 내가 먹어온 수많은 한 끼의 마침표이자, 내일이라는 새로운 문장을 쓰기 위한 쉼표처럼 보였다. 나는 젓가락을 들어 조심스럽게 국수 가락을 흐트러뜨렸다. 마치 엉켜있던 지난 기억의 타래를 하나씩 풀어내듯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긴 세월의 가닥
뜨거운 국물을 한 모금 들이키자 멸치 육수의 진한 감칠맛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던 가슴을 적셨다. 이 담백하고 정직한 맛. 화려한 소스나 자극적인 향신료 없이 오직 시간과 정성으로 우려낸 이 국물은, 마치 나를 키워낸 부모님의 세월과 닮아 있었다.
어린 시절, 운동회가 끝나거나 비가 오는 날이면 어머니는 양은 냄비 가득 소면을 삶아 잔치국수를 내어주셨다. 그때는 그저 배를 채우는 맛있는 간식일 뿐이었던 국수 한 그릇이, 내일 결혼을 앞둔 지금은 왜 이토록 묵직한 가르침처럼 다가오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식 하나를 온전한 성인으로 길러내어 누군가의 남편으로 보내기까지, 부모님은 얼마나 많은 국수 가락 같은 나날들을 인내하며 끓여내셨을까.
면발을 크게 들어 올려 입안에 넣었다. 부드럽게 감기는 소면의 식감 사이로 문득 지나간 인연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뜨겁게 불타올랐으나 결국 식어버렸던 첫사랑, 밤새 소주잔을 기울이며 미래를 고민하던 친구들, 그리고 혼자 옥탑방에서 국수를 삶아 먹으며 외로움을 견디던 사회 초년생 시절의 나. 그 수많은 가닥들이 얽히고설켜 지금의 나라는 사람을 만들었다.
하지만 내일부터는 그 모든 '혼자만의 기억'들을 뒤로하고, 한 사람과 나란히 걸어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젓가락으로 면을 휘저을 때마다 이름 모를 두려움이 밀려왔다. 내가 과연 한 가정을 지탱하는 든든한 대들보가 될 수 있을까. 내일 내가 맞이할 그녀는 지금쯤 어떤 생각을 하며 밤을 보내고 있을까.
문득 고개를 들어 식당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며칠 전 맞춘 예복 셔츠를 입고 국수 그릇에 얼굴을 묻고 있는 사내. 예비 신랑이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떼어내고 나면, 그저 삶의 무게에 어깨가 조금은 무거워진 평범한 인간일 뿐이었다.
국수 위에 얹어진 노란 계란 지단과 초록색 호박 고명이 국물 속에 섞여 조화를 이루는 것을 본다. 결혼도 이와 같을 것이다. 서로 다른 색깔로 살아온 두 사람이 한 그릇의 국물 안에 담겨 서로의 맛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깊은 풍미를 만들어가는 과정. 나는 젓가락질을 멈추고 잠시 그 정갈한 조화를 응시했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국수 가닥들이 마치 "이제 정말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나직이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그릇 바닥에 남은 마지막 고독과 결심
그릇 바닥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식당의 낡은 라디오에서는 오래된 유행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면은 어느덧 몇 가닥 남지 않았고, 맑았던 국물은 고명으로 얹어진 양념장이 풀어져 불그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 변화가 마치 순수했던 소년의 시절을 지나, 세상의 풍파에 몸을 섞으며 자라온 내 삶의 궤적 같아 한참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남은 면발을 천천히 씹으며 마음속에 흩어져 있던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둘 정리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지독히 원망했던 밤, 스스로가 초라해 견딜 수 없었던 새벽, 그리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성취감에 홀로 술잔을 기울이던 날들. 그 모든 고독한 순간이 지금 이 그릇 바닥에 남은 마지막 국물처럼 느껴졌다. 이제 이 국물을 다 마시고 나면, 나는 '혼자'라는 단어가 주는 안락한 방패를 내려놓아야 한다.
"후우-"
뜨거운 숨을 내뱉자 안경에 다시 한번 서리가 끼었다. 하얗게 가려진 시야 너머로 내가 가야 할 새로운 길, 내일 예식장에서 나를 기다릴 그녀의 환한 미소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나를 믿고 자신의 생을 내어준 사람.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지금까지 내가 지켜온 작은 자존심이나 고집쯤은 이 국물과 함께 삼켜버려도 좋겠다는 결연함이 차올랐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은 멸치 육수보다 진하게 내 가슴을 압박해왔지만, 그것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의 삶을 온전히 껴안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성숙의 무게였다.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그릇을 양손으로 받쳐 들었다. 남은 국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목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뜨거운 액체는 내 안의 마지막 망설임까지 깨끗하게 씻어내는 정화의 의식과도 같았다.
빈 그릇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엉켜있던 고민도, 과거에 대한 미련도, 홀로라는 사실에서 오는 쓸쓸함도 모두 비워졌다. 그릇 바닥을 긁는 쇳소리가 적막한 식당 안에 작게 울려 퍼졌다. 그것은 과거와의 작별을 고하는 종소리이자, 내일이라는 새로운 무대로 나아가는 서막의 신호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턱시도 셔츠의 깃을 정갈하게 바로잡았다. 식당 문을 열고 나가면 차가운 새벽 공기가 기다리겠지만, 내 몸 안에는 방금 비워낸 잔치국수의 온기가 든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이, 비워진 그릇만큼이나 커다란 확신으로 나를 채우고 있었다.
푸른 새벽을 가르는 가장의 첫걸음
식당 유리문을 밀고 나오자, 차갑고 투명한 새벽 공기가 기다렸다는 듯 뺨을 스쳤다. 하지만 아까 들어갈 때의 시린 한기와는 달랐다. 뱃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잔치국수의 온기가 온몸의 혈관을 타고 손끝, 발끝까지 뻗어 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음식의 열기가 아니라, 한 시대를 마무리하고 다음 시대로 넘어가는 자가 얻은 '확신의 온기'였다.
텅 빈 골목길을 걷는 내 구두 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울렸다. 가로등 아래를 지날 때마다 길게 늘어졌다 짧아지는 내 그림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오랫동안 혼자였던 저 그림자 곁에, 내일부터는 또 하나의 그림자가 나란히 겹쳐질 것이다. 서로의 보폭을 맞추고, 비 오는 날엔 우산을 기울여주고, 지친 날엔 서로의 어깨를 내어주는 삶. 그 당연하고도 경이로운 일상이 이제 몇 시간 뒤면 시작된다.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보았다. 짙푸른 어둠이 걷히며 수평선 너머로 희미한 여명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저 빛이 완전히 세상을 밝히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턱시도를 입고 그녀 앞에 설 것이다.
'잘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은 이제 '잘해내고 싶다'는 갈망으로 변해 있었다. 잔치국수 한 그릇을 비우며 나는 어설펐던 청춘의 잔재들을 그 식탁 위에 두고 왔다. 방황하던 마음, 누군가에게 기대고만 싶었던 나약함, 그리고 홀로 남겨지는 것에 대한 막연한 공포까지. 그 비워진 자리에 이제는 한 사람을 온전히 책임지고 보호하겠다는 단단한 결심이 차곡차곡 쌓였다.
집 앞 골목 입구에 다다랐을 때, 나는 잠시 멈춰 서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새벽 공기 냄새 속에는 여전히 희미한 멸치 육수의 향이 섞여 있는 듯했다. 그 소박하고 따뜻한 냄새는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갈 가정의 냄새이기도 할 것이다. 화려하진 않아도 깊은 맛이 나고, 언제든 돌아오면 속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 있는 그런 삶 말이다.
아파트 단지 내부는 고요했다. 내일의 잔치를 위해 세상이 잠시 숨을 죽이고 있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내 눈동자는 아까보다 훨씬 맑고 단단해져 있었다. 국수 한 가닥 한 가닥이 내 몸의 에너지가 되었듯, 지금까지 내가 겪어온 모든 기쁨과 슬픔의 가닥들이 오늘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되어주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자 은은한 신혼집의 나무 냄새가 나를 반겼다. 내일이면 이곳은 그녀의 웃음소리와 우리의 대화로 가득 찰 것이다. 나는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내일 입을 턱시도를 한 번 더 매만졌다. 창밖으론 이제 완전히 푸른 빛을 띤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과거와는 작별했다. 그리고 새로운 시작이 문을 두드리고 있다. 잔치국수 한 그릇이 남긴 그 든든한 마음을 품은 채, 나는 생애 가장 찬란한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 짧지만 깊은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