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Original Mind] 배수아, 언어의

숲에서 길을 잃다 — 서사를 배반하는 유령의 문법

by 안녕 콩코드

​프롤로그: 번역된 적 없는 감각의 미로

​배수아를 만나러 가는 길은 물리적인 거리가 아니라, 내가 알고 있던 모든 언어적 약속을 폐기하는 과정이었다. 그녀의 문학은 박완서의 정직함이나 김훈의 명징함과는 정반대의 지점에 서 있다. 오히려 이승우의 형이상학적 고뇌가 형체를 잃고 안개처럼 흩어진 상태, 혹은 한강의 고통이 비명 대신 서늘한 몽환의 음악으로 변주된 형태에 가깝다.


​그녀와 마주 앉았을 때, 방 안의 공기는 마치 다른 시차를 사는 공간처럼 이질적이었다. 배수아는 작가라기보다 고독한 번역가, 혹은 모국어라는 감옥을 탈출하려는 영원한 이방인 같았다. 그녀는 한국어로 글을 쓰지만, 그 문장들은 끊임없이 한국어로부터 멀어지려 한다. 와크텔이 인터뷰를 '존재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열쇠'라 했다면, 배수아와의 대화는 '존재라는 단어 자체가 해체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목격'이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보았다. 그것은 사물을 응시하는 눈이 아니라, 사물 사이의 텅 빈 공간, 혹은 언어로 이름 붙여지지 않은 미세한 진동을 포착하려는 눈이었다. 나는 이 낯선 숲의 입구에서, 왜 그녀가 그토록 견고한 '서사'의 성채를 허물어뜨리는지 묻기 위해 첫 질문을 던졌다.


​서사의 해체: 줄거리가 사라진 자리의 풍경

​배수아의 소설에는 '사건'이 없다. 대신 '상태'와 '이미지'가 있다. 『독학자』나 『알라나구아』 같은 작품들에서 독자는 인과관계의 사슬을 놓치고 길을 잃는다. 그녀에게 소설이란 일어난 일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없는 순간의 정취를 언어로 박제하는 작업이다.


질문: “작가님의 작품을 읽는 것은 안개 속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줄거리를 따라가려 하면 문장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오직 기묘한 분위기만 남습니다. 왜 당신은 독자들에게 친절한 길잡이가 되어주기를 거부하고, 서사라는 뼈대를 지워버리는 것입니까?”


​배수아는 자신의 손등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마치 그 위에 적힌 보이지 않는 텍스트를 읽는 것처럼.


​“줄거리는 삶을 너무 단순하게 만듭니다.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다는 믿음은 인간이 만든 가련한 환상일 뿐이죠. 진짜 삶은 인과관계 밖에서, 이름 붙일 수 없는 찰나의 감각들 속에서 일어납니다. 저는 사건을 전달하는 기자가 아니라, 그 사건이 훑고 지나간 자리의 잔상을 기록하는 사람입니다. 서사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서사가 담을 수 없는 진짜 '존재의 상태'를 드러내고 싶을 뿐입니다. 제 소설에서 길을 잃는다면, 그것이 바로 당신이 삶의 진실에 가까워졌다는 증거입니다.”


​언어의 망명: 모국어라는 감옥을 탈출하는 법

​배수아는 독일어 번역가이기도 하다. 그녀의 문장은 한국어 특유의 정서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다. 가끔은 번역투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그 낯선 문법은, 역설적으로 한국어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전위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녀는 모국어 안에서 망명 생활을 자처하는 작가다.


질문: “작가님의 문장은 마치 외국어를 한국어로 갓 옮겨놓은 듯한 낯섦을 줍니다. 의도적으로 모국어의 익숙한 리듬을 파괴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당신에게 언어란 소통의 도구입니까, 아니면 투쟁의 대상입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몽환적이었지만, 논리는 서늘했다.


​“저에게 언어는 제가 갇혀 있는 방입니다. 우리는 언어가 허용하는 한계 안에서만 사고할 수 있죠. 그래서 저는 제 방의 벽을 긁어내고 구멍을 뚫으려 합니다. 익숙한 한국어의 리듬을 깨뜨릴 때, 그 틈새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감각이 들어옵니다. 번역은 저에게 창작과 다르지 않습니다. 타자의 언어를 통해 나의 언어를 객관화하고, 마침내 '무국적의 언어'에 도달하는 것. 그것이 제가 글을 쓰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저는 한국어를 쓰는 작가가 아니라, 한국어라는 재료를 가지고 이름 없는 감각을 조각하는 사람입니다.”



​고독의 고고학: 누구에게도 닿지 않는 편지

​그녀의 인물들은 대개 혼자다. 그들은 타인과 연결되기를 갈망하기보다 자신의 고독을 관찰하고, 그 안에서 침전한다. 『올빼미의 없음』 등에서 보여준 지독한 고립은, 황정은이 말한 '미미한 연대'조차 허락되지 않는 절대적인 단독자의 세계다.


질문: “작가님의 인물들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구원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독 속으로 자진해서 걸어 들어가죠. 당신에게 '타인'이란 존재는 어떤 의미입니까?”


​“타인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경이의 대상입니다. 우리는 결코 타인에게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거리를 인정할 때 비로소 타인을 존중할 수 있죠. 연대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묶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혼자 있는 인간이 뿜어내는 고유한 파동에 매혹됩니다. 누구에게도 전달되지 않을 편지를 쓰는 마음으로 글을 써요. 그 편지가 누군가에게 읽히는 건 기적 같은 우연일 뿐, 제 목적은 아닙니다. 고독은 형벌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가진 고유한 영토입니다.”


​시간의 뒤섞임: 어제와 오늘이 공존하는 꿈의 연대기

​배수아의 세계에서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식탁 위에 불쑥 나타나고, 미래의 예감이 어제의 꿈속으로 스며든다. 그녀는 시간을 해체함으로써 인간을 죽음과 소멸의 공포로부터 해방시키려 하는지도 모른다.


질문: “작가님의 소설을 읽다 보면 시간이 멈춘 것 같기도 하고, 수천 년이 한꺼번에 흐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런 비선형적인 시간 구성은 우리에게 어떤 진실을 말해주나요?”


​“시간은 시계 속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식 속에 있죠. 꿈속에서 우리는 어린 시절의 나와 늙은 나를 동시에 만납니다. 그것이 진짜 시간의 모습입니다. 소설은 그 뒤섞인 시간을 정직하게 복원해야 합니다. '어제 죽은 사람'과 '내일 태어날 아이'가 한 문장 안에서 어깨를 나란히 할 때, 우리는 비로소 죽음이라는 한계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제 소설은 시간의 감옥에 갇힌 인간들을 위한 짧은 탈옥 교본입니다.”


​에필로그: 낯선 숲의 입구에서 깨어나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온 거리는 여전히 명확한 인과관계와 속도의 문법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목적지를 향해 직선으로 걷고, 상점의 간판들은 선명한 의미를 내뿜었다. 하지만 내 안의 언어들은 배수아가 뿌려놓은 안개 속에서 자꾸만 형태를 잃고 흔들렸다.


​만약 엘리너 와크텔이 배수아를 만났다면, 그녀 역시 '모국어의 국경을 넘어 환상과 감각의 영토로 망명한 유령'의 얼굴을 보았을 것이다. 박완서가 세운 대지에서 시작해 이승우의 심연까지 닿았던 우리의 여정은, 배수아라는 숲에 이르러 그 모든 경계가 허물어지는 경험을 한다. 그녀의 글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스며드는 것이다. 젖어드는 것이고, 마침내 길을 잃는 것이다.


​그녀의 숲에는 표지판이 없다. 하지만 그 숲을 통과한 뒤에 마주하는 세상은 이전과 같을 수 없다. 익숙한 단어들이 낯설게 보이고, 당연했던 일상이 기묘한 연극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면 당신은 성공적으로 배수아의 마법에 걸린 것이다. 나는 이제 이 몽환의 숲을 빠져나와, 우리가 함께 걸어온 이 장대한 문학의 지도를 갈무리하려 한다. 그 마침표는 어떤 단어로 적어야 할까.



본 글은 엘리너 와크텔의 인터뷰 스타일을 차용하여 작가의 실제 인터뷰와 작품 세계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가상 인터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