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기가 사라진 거리, 풍경이 된 타인들에 관하여
어느 오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도심의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신호등의 숫자가 줄어들고 마침내 초록불이 켜지면,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발을 내딛는다. 어깨를 스치는 타인들의 온기, 바닥을 울리는 수많은 발소리, 그리고 건너편에서 다가오는 이들과의 무언의 질서. 그 속에 섞여 있을 때 나는 내가 이 거대한 유기체의 아주 작은 세포 하나로 기능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곤 했다. 이름 모를 이들과 같은 방향으로 걷고, 같은 신호를 기다리는 지극히 평범한 행위만으로도 얻을 수 있는, 낮고 고요한 연대감이었다.
그러나 마음속에 묵직한 삶의 파편들이 박힌 순간, 그 익숙한 연대감은 한순간에 휘발되어 버렸다.
내 삶의 치부를 아무렇지 않게 옮기며 그것을 유흥으로 삼는 이의 기괴한 처신을 목도했을 때의 참담함,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무너뜨린 것은 막역한 친구 자녀의 간석회화 판정 소식이었다. 악의를 반성하지 않는 인간의 추악함과, 아무런 잘못도 없는 어린 생명에게 들이닥친 가혹한 운명. 이 극단적인 대조가 만들어낸 혼란은 내 의식의 전면을 장악했고, 그 순간 세상은 그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질감으로 변모했다.
풍경으로부터의 이탈과 생경함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을 보며 문득 깨달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저들 중 한 명이었으나, 지금의 나는 저들을 지켜보는 철저한 '국외자'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생동감 있게 거리를 오가고, 누군가는 옆 사람과 웃으며 대화를 나누며, 누군가는 목적지를 향해 바쁜 걸음을 재촉한다. 그런데 그 모든 움직임이 어쩐지 비현실적이다. 마치 정교하게 연출된 영화의 한 장면처럼, 혹은 매끄러운 액정 화면 속에서 나와는 상관없이 재생되는 고화질 영상처럼 말이다.
나는 분명 물리적으로 그들 사이에 존재한다. 누군가 내 어깨를 치고 지나가면 몸이 흔들리고, 자동차의 경적 소리는 고막을 때린다. 하지만 심리적인 거리는 수천 킬로미터 밖으로 밀려나 있다. 그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생생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고, 나는 내 머릿속에 구축된 '배신과 비극의 미궁' 안에 갇혀 있다. 세상과 나 사이에는 두껍고 투명한 유리벽이 세워진 것만 같다. 그 벽 너머의 사람들은 나의 지옥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움직이고, 나 역시 그들의 세계에 개입하거나 닿을 힘을 잃어버린 채 그저 멍하니 그들을 응시할 뿐이다.
소리 없는 고립, 잃어버린 존재의 닻
우리가 평소에 누리던 연대감은 생각보다 섬세한 요소들의 총합이다. 그것은 우리가 타인과 깊은 대화를 나눠서 생기는 것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이 시간을 함께 통과하고 있다"는 공통된 감각, 즉 '동시대성'에서 기인한다. 비록 목적지는 다르더라도, 지금 이 순간 같은 공기를 마시고 같은 거리를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 닻을 내리고 산다.
하지만 삶의 비리가 나를 덮치면 이 닻이 통째로 뽑혀 나간다. 타인의 기괴한 악의와 친구의 슬픔은 내 시야를 바늘구멍처럼 좁게 만들고, 오직 '나의 고통'이라는 좁은 터널 속에 나를 유폐한다. 터널 밖은 여전히 눈부시게 밝고 활기차지만, 그 빛은 나를 비추지 못하고 미끄러진다. 타인들의 웃음소리는 의미 없는 소음으로 치부되고, 그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은 나와는 무관한 기계적인 운동으로 비친다.
화면 속 주인공들은 각자의 서사를 가지고 치열하게 움직이지만, 화면 밖의 관객은 그저 그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듯이, 나 또한 내 삶이라는 무대에서 객석으로 밀려난 기분을 느낀다. 이 고립감은 혼자 방안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수많은 인파 속에 섞여 있을 때 더욱 시리고 극명해진다.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분리됨'을 경험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소외의 진짜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화면 밖에서 다시 현실로 딛는 발걸음
이 생경한 감각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내면의 소음이 잦아들지 않는 한, 세상은 계속해서 평면적인 영상처럼 흐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소외의 감각'은 나에게 중요한 사실 하나를 일깨워준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타인이라는 배경에 기댄 채, 그들의 무심한 존재감을 지탱 삼아 내 존재의 무게를 유지해 왔는지를 말이다.
우리는 홀로 설 수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거리를 오가는 익명의 타인들이 만들어내는 그 막연한 활기와 무언의 질서에 기대어 하루를 버텨내고 있었다. 그들과의 정서적 연결이 끊어지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그 연약한 유대감을 소중히 여겼는지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화면 속에서 무심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다시 그 화면 안으로 뛰어들 준비를 한다. 내 안의 분노와 슬픔이 당장 마법처럼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저 투명한 유리벽을 손끝으로 더듬어보기로 한다. 옆 사람의 코트 깃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유심히 관찰하고,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는 그 짧은 찰나의 긴장감을 다시금 피부로 느껴보려 애쓴다.
결국 우리를 다시 현실로 불러오는 것은 대단한 철학적 깨달음이 아니라, 내 곁을 지나는 사람의 미미한 체온이나 우연히 눈이 마주친 타인의 무표정한 시선 같은 아주 작은 접점들이다. 그 찰나의 순간들이 모여 다시금 나를 세상이라는 커다란 톱니바퀴 사이에 끼워 넣어줄 것이다.
다시, 횡단보도 앞에서
다시 신호가 바뀐다. 사람들의 물결이 일렁인다.
여전히 머릿속 한구석은 해결되지 않은 분노와 안타까움으로 지끈거리고, 세상은 가끔 초점이 맞지 않는 렌즈처럼 흐릿하게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내가 느끼는 이 단절감이 사실은 다시 세상의 일부가 되고 싶다는 내 내면의 가장 강력한 갈망이라는 것을.
화면 속을 부유하던 내가 다시 거리의 소음 속으로 투박하게 발을 내디딘다. 누군가와 어깨를 스치고, 누군가의 뒤꿈치를 이정표 삼아 걷는다. 그 막연한 섞임이 다시 내 피부에 닿는 순간, 골칫거리는 여전히 그곳에 있을지언정 나는 더 이상 홀로 스크린 앞에 남겨진 관객이 아님을 느낀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지옥을 짊어진 채, 화면 밖으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서로의 존재를 배경 삼아 오늘이라는 긴 거리를 함께 건너고 있는 동료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