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소란이 떠난 자리의 적막
화려한 만찬이 휩쓸고 간 식탁 위는 전쟁터와 같다. 기름진 양념의 잔해들, 날카로운 금속 수저들이 부딪히며 냈던 소음, 그리고 각자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쏟아냈던 분주한 대화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 그곳에는 기분 좋은 포만감보다 어딘지 모를 공허함이 먼저 내려앉는다. 자극은 늘 강렬한 뒤끝을 남기고, 우리는 그 맛의 잔상에 휘둘리며 입안의 텁텁함을 지우지 못한 채 헛기침을 내뱉곤 한다. 그때, 식탁 저편에서 김을 모락모락 피우며 묵묵히 제 차례를 기다리던 투박한 사발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숭늉'이다.
숭늉은 결코 식탁의 주인공인 적이 없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이나 코끝을 찌르는 찌개에 가려져, 늘 식사가 끝나갈 무렵에야 겨우 제 존재를 드러낸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숭늉만큼 지극한 예의를 갖춘 음식도 드물다. 그것은 앞서 지나간 모든 자극적인 맛들을 너그럽게 포용하고, 뜨겁게 달궈진 입안의 열기를 다독이며, 비로소 한 끼의 식사가 '완성'되었음을 알리는 부드러운 마침표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시작'과 '절정'에 열광한다. 새로운 일을 벌이고, 가장 화려한 성과를 내는 순간에만 온 신경을 집중한다. 하지만 정작 그 모든 소란이 끝난 뒤의 뒷모습을 어떻게 갈무리하느냐에 대해서는 무심하기 십상이다. 자극적인 성취 뒤에 찾아오는 식탁의 얼룩 같은 허탈함을 우리는 무엇으로 씻어내고 있는가. 나는 오늘, 그 식어버린 숭늉 한 사발이 건네는 낮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려 한다. 그것은 삶의 뒷모습을 정갈하게 가꾸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평온에 대한 이야기다.
누룽지의 희생이 빚어낸 맑은 위로
숭늉의 태생은 고독하다. 그것은 무쇠솥 바닥에서 뜨거운 불길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자신을 태워버린 누룽지로부터 시작된다. 하얀 쌀알이 제 몸을 눌러 붙여 딱딱한 황금빛으로 변해가는 과정은 일종의 수행과 같다. 부드러움을 포기하고 단단해진 누룽지는, 역설적으로 물을 만나 다시 풀어질 때 가장 깊은 고소함을 뿜어낸다. 고통의 시간을 통과한 존재만이 가질 수 있는 너그러움이 그 맑은 물속에 녹아드는 것이다.
어머니는 밥을 푸고 난 뒤, 솥 바닥에 눌어붙은 누룽지를 억지로 긁어내지 않으셨다. 대신 그 위에 깨끗한 물을 붓고 다시 한번 은근한 불을 지피셨다.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소리가 아니라, '소근소근' 물속에서 누룽지가 몸을 불리는 소리가 들려올 때쯤 부엌의 공기는 한층 정갈해졌다. 숭늉은 스스로를 뽐내지 않는다. 보리의 거친 맛도, 옥수수의 구수함도 아닌, 오직 제 몸을 태운 쌀알이 물속에서 제 살을 다 풀어헤친 뒤에야 나오는 가장 본연의 담백함이다.
이 담백함은 힘이 세다. 기름진 고기 요리나 매콤한 비빔밥으로 점철된 식탁의 불협화음을 숭늉은 단 한 모금으로 잠재운다. 혀 위에 남은 자극적인 집착들을 씻어내고, 오직 '먹었다'는 안도감만을 남긴다. 이것은 배려다. 앞서 나갔던 화려한 요리들을 비난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이 남긴 혼란을 조용히 수습하는 숭늉의 태도는 어른의 품격을 닮아 있다. 성취에 취해 교만해지기 쉬운 우리에게, 가장 낮은 곳에서 우러난 숭늉의 물줄기는 말한다. 진정한 승리는 마지막에 웃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정갈함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우리의 인생도 숭늉을 끓이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젊은 날의 뜨거운 열정이 우리를 솥 바닥처럼 뜨겁게 달구고, 때로는 예기치 못한 실패로 마음이 까맣게 눌어붙기도 한다. 하지만 그 상처 입은 자리에 '이해'와 '시간'이라는 물을 붓고 다시 뭉근하게 끓여낼 수 있다면, 우리는 인생의 후반전에서 가장 고소한 숭늉 같은 인간이 될 수 있다. 날카로운 지성보다 부드러운 감성이, 화려한 언변보다 깊은 경청이 숭늉처럼 우리를 적셔줄 때, 비로소 삶의 예의는 완성된다.
미지근함이 주는 완전한 평온
숭늉이 가장 맛있는 순간은 펄펄 끓을 때가 아니다. 김이 한풀 꺾이고, 사발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을 때 기분 좋은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심장으로 전달되는 바로 그 지점이다. 사람들은 흔히 '화끈함'에 열광하지만, 정작 우리를 치유하는 것은 이토록 사소하고 미지근한 온기다. 숭늉의 온도는 투쟁적이지 않다. 그것은 입안의 점막을 공격하지 않으면서도, 장부 깊숙한 곳까지 침투하여 팽팽하게 부풀었던 긴장의 끈을 부드럽게 녹여버린다.
사발을 들어 한 모금 크게 들이켜 본다. 첫 모금이 목을 타고 넘어갈 때, 비로소 깨닫게 된다.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맛'의 과잉 속에서 허덕여 왔는지를. 맵고, 짜고, 달았던 그 수많은 자극은 사실 미각을 마비시키는 소음이었다. 숭늉은 그 모든 소음을 단숨에 소거한다. 숭늉이 지나간 자리에는 오직 '물'과 '곡물'이라는 가장 근원적인 만남만이 남는다. 이것은 미각의 회복이자, 동시에 정신의 세정(洗淨)이다.
진정한 절정은 쾌락의 정점이 아니라, 모든 자극이 사라진 뒤에 찾아오는 이 정갈한 평화에 있다. 우리는 더 많이 채우기 위해, 더 높은 온도로 타오르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하지만 숭늉 한 사발은 속삭인다. 비워내야 비로소 보인다고. 솥 바닥을 박박 긁어 얻어낸 누룽지의 살점들이 물속에서 제 형체를 잃고 흐물흐물해질 때, 그 비어버린 틈새로 가장 깊은 고소함이 새어 나온다. 나를 고집하지 않고 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비움'의 자세, 그것이 숭늉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절정의 순간이다.
입안에 남은 밥알 몇 개를 천천히 씹어본다. 그것은 식사의 잔재가 아니라, 한 끼의 노동을 갈무리하는 의식과 같다. 거친 식감 속에 숨겨진 은근한 단맛은, 인생의 쓴맛을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은밀한 위로다. 숭늉은 서두르지 말라고, 이미 충분하다고, 네가 지나온 그 뜨거운 시간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듯하다. 이 미지근한 평온 속에서 나는 비로소 완전해진다.
삶의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
숭늉 사발의 바닥이 보일 때쯤, 식탁 위는 신기할 정도로 평온해져 있다. 지저분하던 접시들은 이제 더 이상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 숭늉 한 사발이 내면의 질서를 바로잡아준 덕분이다. 식사의 예의란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빈 그릇을 마주했을 때, 그 음식을 내어준 불과 물과 바람, 그리고 사람의 수고를 숭늉처럼 따뜻하게 갈무리하는 것까지가 진정한 예의다.
나는 어떤 글을 쓰는 작가인가. 독자들에게 화려한 성찬을 차려내어 감각을 마비시키는 작가인가, 아니면 그 모든 소란이 끝난 뒤에 찾아와 마음의 갈증을 씻어주는 숭늉 같은 작가인가. 시즌 2를 연재하며 나는 후자가 되기로 다시 한번 다짐한다. 첫 문장에서 자극적인 향기로 독자를 유혹하기보다,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난 뒤 입안에 구수한 여운이 남아 한참 동안 사유의 바다를 유영하게 만드는 그런 글. 한 문장마다 수 천 자의 정성을 꾹꾹 눌러 담는 이유는, 바로 그 정갈한 '뒷맛'을 완성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누구나 삶의 뒷모습을 남긴다. 누군가 떠난 자리가 숭늉 한 사발을 마신 듯 개운하고 따뜻하다면, 그는 참으로 잘 산 사람일 것이다. 나의 문장들도 당신의 하루 끝에서 그런 숭늉의 역할을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지친 일상의 소음들을 씻어내고, 본연의 평온을 되찾아주는 미지근하지만 단단한 위로.
사발을 내려놓고 행주를 들어 식탁을 닦는다. 얼룩이 지워진 자리에 창밖의 달빛이 내려앉는다. 숭늉 한 사발로 몸을 데운 덕분에 오늘 밤의 잠자리는 유난히 포근할 것 같다. 다음 화에서는 또 어떤 삶의 사물을 꺼내어 당신과 나 사이의 온도를 맞춰볼까. 숭늉의 고소한 향기가 코끝에 머무는 이 밤, 나는 벌써 다음의 정갈한 만남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