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霧津)이라는 안개에 갇힌 채, 우리는 모두

‘김승옥’이라는 고향을 앓는다

by 안녕 콩코드

​세상에는 읽을수록 거리가 느껴지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첫 문장을 읽자마자 영혼의 뒷덜미를 잡혀 끌려가게 되는 문장이 있습니다. 제게 김승옥은 후자입니다. 그것도 아주 지독하게 말이죠. 사람들은 그를 두고 '감수성의 혁명'이라느니 '전후 문학의 축복'이라느니 거창한 수식어를 붙이지만, 제게 김승옥이라는 이름은 훨씬 더 개인적이고 은밀한 의미입니다. 그는 내 영혼이 너무 뜨거워져서 당장이라도 타버릴 것 같을 때, 조용히 물러나 앉아 열기를 식힐 수 있는 '피안(彼岸)'입니다.


전설이 된 문장, 그러나 내 옆자리의 온기

​김승옥의 문학은 분명 '넘사벽'입니다. 1960년대에 쓰였다고는 믿기지 않는 그 세련된 문체, 도시적 허무와 고독을 투명하게 길어 올리는 감각은 지금의 독자들에게도 여전히 날이 서 있습니다. 하지만 신기한 점은 그 압도적인 성취가 우리를 위축시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의 글은 이상하리만치 편안합니다.


​그건 아마도 그가 '완벽한 영웅'이 아니라, '흔들리는 우리 자신'을 썼기 때문일 겁니다. 화려한 수사 뒤에 숨겨진 인간의 비겁함, 속물근성,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서글픈 연민. 우리는 그의 문장 속에서 자신의 부끄러운 민낯을 발견하고는 역설적으로 안도합니다. "아, 나만 이렇게 흔들리며 사는 게 아니었구나" 하는 동질감 말입니다.



갈증의 끝에서 만나는 시골 같은 원형

​일상이 팍팍해지고, 속도의 경쟁 속에서 숨이 가빠올 때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원형(Prototype)'을 찾습니다. 마치 고향 집 뒷마당의 흙냄새 같은 것, 혹은 아무런 조건 없이 나를 받아주던 할머니의 품 같은 것 말이죠. 제게 김승옥의 소설은 바로 그런 곳입니다.


​목이 타들어 가는 갈증이 턱밑까지 차오를 때, 그의 문장을 한 줄 베어 물면 비로소 숨이 쉬어집니다. 그것은 단지 문학적 유희를 넘어선, 일종의 정신적 귀향입니다. <무진기행>의 안개 속을 헤매고, <서울 1964년 겨울>의 선술집 평상에 걸터앉아 있으면, 복잡했던 세상의 소음은 어느덧 멀어지고 오로지 나의 내면과 마주하는 고요한 시간만이 남습니다.


'무진'이라는 이름의 영원한 도피처

​김승옥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무진'을 방문하는 일입니다. 그곳은 책임감과 의무로부터 잠시 도망칠 수 있는 곳이며,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온전히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섬입니다.


​그의 글이 식상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매번 다른 상처를 안고 그를 찾기 때문입니다. 20대의 내가 읽은 김승옥이 '세상에 대한 환멸'이었다면, 지금의 내가 만나는 김승옥은 '삶에 대한 지독한 애착'입니다. 묘하게도 그는 늘 그 자리에서 포근하게 우리를 기다립니다. 마치 한 번도 변한 적 없는 시골 풍경처럼 말이죠.


​문학이라는 거대한 바다에서 김승옥이라는 섬은 유독 푸르고 깊습니다. 오늘 밤, 세상의 속도에 지친 당신의 영혼을 잠시 그 섬에 내려놓아 보는 건 어떨까요? 그곳에선 조금 비겁해도 괜찮고, 조금 허무해도 괜찮습니다. 김승옥의 문장이 당신을 부드럽게 감싸 안아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