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霧津)이라는 안개에 갇힌 채, 우리는 모두 ‘김승옥’이라는 고향을 앓는다
김승옥이라는 이름 석 자를 입안에 머금으면, 오래된 우물물 같은 서늘함과 비릿한 안개 냄새가 동시에 느껴집니다. 그가 쓴 문장들은 단순히 종이 위에 박힌 활자가 아니라, 혈관을 타고 흐르는 액체 같습니다. 조금만 방심해도 감각의 가장 깊은 곳까지 침투해 들어오지요. 그가 구축한 문학적 세계는 '피안(彼岸)'입니다. 현실의 소란함이 일절 닿지 않는 저 너머의 땅, 그러나 물러나 앉으면 세상 어디보다 포근하게 나를 감싸는 유일한 도피처입니다.
벼려진 칼날 위에 핀 꽃, 넘사벽의 미학
그의 글은 묘합니다. 분명 '넘사벽'이라 칭송받는 기교의 정점에 서 있는데, 정작 그 문장 사이에 몸을 뉘어보면 이보다 편안할 수가 없습니다. 1960년대, 모두가 거친 투쟁의 언어를 내뱉을 때 그는 홀로 '개인의 고독'을 세공했습니다. 그가 길어 올린 단어들은 마치 차가운 대리석을 깎아 만든 조각상처럼 매끄럽지만, 그 속에는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듯한 뜨거운 심장이 맥질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감수성'을 이야기하지만, 제가 주목하는 것은 그 문장의 '결'입니다. <무진기행>의 첫 문장을 읽을 때의 그 전율을 기억하시나요? 안개가 진주를 키우는 조개의 살처럼 찐득하게 몸에 감겨오는 그 기분. 그는 언어로 풍경을 묘사하는 게 아니라, 독자의 감각 자체를 그 풍경 속으로 강제 이주 시킵니다. 그런 압도적인 미감(美感) 앞에서 우리는 무장해제된 채 그저 그가 차려놓은 서정의 성찬을 탐닉하게 됩니다.
타오르는 갈증 끝에 만나는 시골의 원형
세상은 갈수록 매끈하고 빨라집니다. 초음속의 속도로 변해가는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의 형체는 자꾸만 흐릿해집니다. 갈증이 턱밑까지 차올라 영혼이 바싹 말라버릴 때, 저는 습관처럼 그를 꺼내 듭니다. 그에게는 우리가 잃어버린 '원형(Archetype)'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묘사하는 세계는 투박한 시골의 정서와 세련된 도시의 허무가 기묘하게 뒤섞여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최첨단 빌딩 숲 한복판에 숨겨진 낡은 한옥 뒷마당 같습니다. 비릿한 흙내음과 정겨운 사투리, 그리고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는 곳. 그곳에 깃들면 비로소 숨이 쉬어집니다. 김승옥의 문장은 메마른 가슴에 들이붓는 냉수 한 사발입니다. 그 물 한 잔에 타오르던 조급함은 가라앉고, 우리는 다시 '나의 속도'를 회복할 힘을 얻습니다.
비겁해서 더 인간적인, 우리들의 '무진'
우리는 살아가며 얼마나 많은 '무진'을 지나쳐왔을까요. 책임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고 싶어 발버둥 치다가도, 결국 다시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싣는 그 비겁한 뒷모습들. 김승옥은 그 비겁함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굴욕과 자기모멸이야말로 우리가 살아있다는 지독한 증거라고 툭, 어깨를 두드려줍니다.
그의 글이 수십 번을 읽어도 식상하지 않은 이유는, 그 속에 담긴 고독이 박제된 감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움직이는, 우리 모두의 공유지입니다. 펴면 편안하고 덮으면 아련한 그 묘한 감각. 그는 세상을 아름답게 미화하기보다, 그 추하고 부끄러운 이면을 눈부시게 아름다운 문체로 폭로합니다. 그 역설적인 아름다움이야말로 독자들을 무한 공감과 과몰입의 늪으로 밀어 넣는 강력한 힘입니다.
행간에 머무는 깊은 울림
에세이를 쓴다는 것은 결국 작가의 영혼을 문장이라는 그릇에 담아 독자에게 건네는 일입니다. 김승옥에 관한 글을 다시 쓰는 행위는, 제게 있어 가장 순수한 형태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의 행간을 걷다 보면, 제가 쓴 글들이 얼마나 부끄러운지도 깨닫게 되지만, 동시에 다시 펜을 쥘 용기를 얻기도 합니다.
그의 문학은 영원히 늙지 않는 청년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시대가 변하고 강산이 바뀌어도, 인간의 본질적인 외로움과 구원에 대한 갈망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오늘 밤, 당신의 서가에서 먼지 쌓인 그의 책을 다시 꺼내 보시길 권합니다. 안개처럼 밀려오는 그의 문장들이 당신의 메마른 일상을 적시고, 마침내 당신만의 '피안'에 다다르게 해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