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생애에서 가장 서툴고도 찬란했던 페이지를 넘기라면, 그곳에는 어김없이 '첫사랑'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여름날의 소나기처럼 예고 없이 찾아와 온몸을 적시고는, 무지개 하나 남기지 못한 채 홀연히 떠나가 버린 어떤 계절과도 같습니다. 시간이 흘러 무뎌진 일상 속에서도 문득 스치는 비누 향기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전주 한 소절에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은 영화와 문학의 문장들을 빌려, 우리 각자의 마음속 깊은 곳에 봉인해 두었던 그 서투른 고백들을 다시 꺼내 보려 합니다.
잉크처럼 번져가는 시선: 찰나의 마법
첫사랑의 시작은 거창한 사건이 아닙니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 <러브레터> 속 소년 이츠키가 창가에서 책을 읽고, 바람에 흰 커튼이 흩날리며 그의 얼굴을 살짝 가리던 그 찰나의 정적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때, 세상의 소음이 소거되고 오직 그 사람의 움직임만이 프레임 단위로 쪼개져 망막에 새겨지는 경험을 합니다.
소설가 김연수는 그의 산문에서 "사랑은 흔히 '빠지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젖어 드는' 것에 가깝다"고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발목 정도만 적시던 감정이 어느새 무릎을 지나 심장까지 차오를 때, 우리는 비로소 깨닫습니다. 아, 내가 이 사람을 앓고 있구나. 그 시절의 우리는 상대의 뒷모습만으로도 한 권의 소설을 써 내려갈 수 있었고,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만으로도 심박수가 요동치던 '감각의 제국'에 살고 있었습니다.
번역되지 못한 마음: 서툰 언어들의 기록
첫사랑이 유독 아프게 기억되는 이유는 우리가 그 감정을 다루는 법을 몰랐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영화 <플립(Flipped)>에서 소년과 소녀는 같은 상황을 전혀 다르게 해석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일생을 건 헌신이었던 행동이, 상대에게는 당혹스러운 참견이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첫사랑은 '오독(誤讀)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파블로 네루다는 그의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사랑은 너무 짧고, 망각은 너무 길다." 그 짧은 사랑의 순간 동안 우리는 하고 싶은 말의 절반도 내뱉지 못합니다. "좋아해"라는 세 글자 대신 "내일 비가 온대"라거나 "이 노래 좋지 않니?"라는 주변부의 이야기만 맴돌다 끝이 납니다. 알랭 드 보통이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지적했듯, 우리는 상대방이라는 미지의 대륙을 탐험하면서 지도 한 장 없이 발을 내디뎠던 무모한 탐험가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길 위에서 흘린 눈물은 정제되지 않은 순수함을 지닙니다.
상실이 가르쳐준 성장의 문법
영화 <라라랜드>의 마지막 장면에서 세바스찬과 미아가 서로를 바라보며 짓는 미소는 첫사랑의 가장 완성된 형태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만약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라는 가정은 슬프지만, 그 가정이 존재하기에 현재의 내가 있음을 긍정하는 미소입니다. 첫사랑은 대개 실패로 끝나지만, 그 실패는 파멸이 아니라 '확장'입니다.
누군가를 지독하게 사랑해본 경험은 나라는 사람의 경계를 허물고 타인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통로가 됩니다. 황경신 작가의 문장처럼,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배경까지도 사랑하는 것"임을 배우는 과정인 셈입니다. 우리가 첫사랑을 그리워하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이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기꺼이 소모할 수 있었던 그때의 '나'와 재회하고 싶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당신의 첫사랑에게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에서 소년은 소녀가 남긴 얼룩진 옷을 보며 비로소 이별을 실감합니다. 하지만 그 얼룩은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 아니라, 소년의 유년기를 지켜준 소중한 훈장과도 같습니다. 여러분의 기억 속에 박제된 그 이름은 지금 어떤 모습인가요?
비록 지금은 이름조차 가물가물해진 인연일지라도, 혹은 여전히 가슴 한구석을 찌르는 가시 같은 존재일지라도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 서툴렀던 열병 덕분에 당신은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어른이 되었고, 사랑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 단단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첫사랑은 결코 과거형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현재의 당신이 누군가를 대하는 태도 속에, 타인을 배려하는 몸짓 속에, 그리고 깊은 밤 홀로 일기를 쓸 때 묻어 나오는 문체 속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그러니 가끔은 그 기억의 서랍을 열어 먼지를 털어주어도 좋습니다. 그곳엔 세상에서 가장 순수했던 당신의 조각이 여전히 빛나고 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