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탈한 고통의 레버리지
우리는 종종 비극을 전시하며 그것을 ‘기억’이라 부른다. 찬란한 조명 아래 박제된 슬픔, 정갈하게 닦인 기념비, 그리고 매년 반복되는 엄숙한 추모사들. 그러나 그 거대한 애도의 물결 속에서 정작 숨을 쉬고 있는 피해자의 목소리는 자주 길을 잃는다. 데어라 혼(Dara Horn)이 던진 서늘한 냉소,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는 선언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든다. 죽어서 박제된 존재는 저항하지 않으며, 살아있는 자들의 입맛에 맞게 재해석되기 쉽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여성학자 정희진은 일본의 정치철학자 하시가와 분조의 논의를 빌려 더욱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댄다. 그것은 '죽은 아이'와 '아이의 죽음' 사이의 아득한 간극, 즉 구체적인 고통이 추상적인 정치적 자원으로 변질되는 비정한 메커니즘에 대한 폭로다.
고유한 슬픔과 추상적인 사건의 경계
하시가와 분조가 말한 '죽은 아이'는 부모에게 있어 대체 불가능한 고유한 존재다. 거기에는 아이가 생전에 좋아했던 사탕의 향기, 서툴게 휘둘렀던 손짓, 마지막 순간의 체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것은 '구체적인 슬픔'의 영역이다. 반면 '아이의 죽음'은 다르다.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며, 통계수치이고, 분석의 대상이다. 부모에게 죽은 아이는 여전히 '내 아이'이지만, 외부자들에게 아이의 죽음은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나 국가적 비극을 증명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된다.
비극은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구체적인 존재인 '죽은 아이'가 망각되고, 오직 '아이의 죽음'이라는 사건만이 사회적 담론의 전면에 나설 때, 죽음은 도구화되기 시작한다. 정희진은 이를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입한다. 피해 여성 개인이 겪은 삶의 궤적과 인권보다 '민족의 수치' 혹은 '국가적 자존심'이라는 민족주의적 프레임이 우선시될 때, 그들의 고통은 특정 세력의 정치적 '레버리지(leverage)'로 전락한다. 살아있는 피해자가 내뱉는 불편한 진술보다, 침묵하는 죽은 자의 이미지가 지배 세력에게는 훨씬 다루기 쉬운 자원이 되는 것이다.
왜 세상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하는가
데어라 혼의 통찰처럼 세상이 죽은 유대인을 사랑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재의 우리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며, 우리의 도덕적 결함을 지적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그들의 죽음을 박물관에 가두고 슬퍼함으로써, 스스로를 '비극에 공감할 줄 아는 선량한 시민'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도덕적 면죄부'다.
그러나 살아있는 피해자는 다르다. 살아있는 유대인은 보상을 요구하고, 여전히 존재하는 차별에 항거하며, 때로는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복잡한 현실의 문제를 끄집어낸다. 살아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민족주의적 영웅 서사에 부합하지 않는 발언을 하거나, 개인의 권리를 주장할 때 대중이 보이는 당혹감과 냉소는 이를 방증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신념 체계 안에서 '완벽한 피해자'로 박제된 존재만을 사랑한다. '~주의'라는 거대 담론에 이용하기 좋은 죽은 자들은 성역에 모셔지지만, 그 성역 밖에서 숨 쉬는 산 자들은 끊임없이 검열당하고 유배된다.
정치적 자원이 된 고통의 민낯
고통이 정치적 자원이 되는 순간, 고통의 서사는 오염된다. 특정 지배 세력은 약자의 죽음을 발판 삼아 자신들의 정당성을 획득한다. 그들에게 비극은 해결해야 할 과제가 아니라, 유지하고 전시해야 할 동력이다. "살아 있는 피해자의 인권보다 죽은 피해자가 더 중요하다"는 정희진의 일갈은, 우리가 비극을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기만적인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민족'이나 '국가', 혹은 '정의'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개인의 얼굴을 지워왔는가. 거대 담론의 용광로 속에서 개인의 구체적인 슬픔은 증발하고, 오직 투쟁의 구호만이 남는다. '죽은 아이'를 잃은 부모의 단장(斷腸)의 미아리는 들리지 않고, '아이의 죽음'을 성토하는 광장의 확성기 소리만 커지는 형국이다. 이것은 진정한 애도가 아니라, 타인의 죽음을 소비하는 고도의 정치적 연극에 가깝다.
초음속의 세계에서 '나의 속도'로 비극을 대면하기
우리는 모든 것이 빠르게 휘발되고 알고리즘에 의해 분류되는 '초음속의 시대'를 산다. 비극마저도 '좋아요'와 '공유'를 위한 콘텐츠가 되고, 정치적 진영 논리에 따라 순식간에 재단된다. 이러한 세계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구체성'에 대한 감각이다.
죽은 자를 사랑하는 세상의 위선에 맞서기 위해서는, 박제된 이미지를 거부하고 살아있는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비극을 거대 담론의 레버리지로 사용하려는 모든 유혹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일이다. 추상적인 '아이의 죽음'이 아니라, 누군가의 전부였던 '죽은 아이'의 이름을 불러주는 일이다.
결국 에세이를 쓴다는 것, 기록한다는 것은 세상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고 멈춰 서서 그 구체적인 얼굴들을 응시하는 작업이다.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는 말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이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인가, 아니면 그 사람의 죽음이 당신에게 주는 도덕적 우월감인가. 정희진이 부연한 하시가와 분조의 논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의 이정표가 된다. 이제 우리는 성역에서 죽은 자들을 끄집어내어 그들의 삶을 복원하고, 산 자들의 곁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그것만이 비극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는 비정한 세계에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다.
[노트]
이 글은 거대 서사에 가려진 개인의 구체적인 고통을 복원하고자 하는 의도로 작성되었습니다. 하시가와 분조의 개념적 대비를 통해 우리 사회가 비극을 소비하는 방식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죽은 자를 향한 위선적인 사랑' 대신 '산 자를 향한 구체적인 연대'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초음속으로 흐르는 세상 속에서 타인의 슬픔을 단지 '사건'으로 치부하지 않고, 고유한 삶의 무게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감각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