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퀴넌의 독설로 해부한 ‘열화 판본(劣化 版本)'들의 서글픈 초상
조 퀴넌은 그의 저서 《아직도 책을 읽는 멸종 직전의 지구인을 위한 단 한 권의 책》에서 나쁜 책을 향해 거침없는 독설을 내뱉는다. 그는 "나쁜 책은 정말 나쁜 책"이라는 확고한 시각을 고수하면서도, 역설적으로 그 형편없음이 존재하기에 좋은 책들이 더욱 돋보인다고 말한다. 나쁜 소설을 "좋은 소설의 단물 다 빠진 버전" 혹은 "진흙탕"에 비유하는 그의 문장들은 매섭다. 옥수수 농사꾼의 《보바리 부인》이 되어버린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나, 오디세우스가 실종된 《오디세이아》 같은 《트로이의 부적》을 보며 우리는 비로소 문학의 햇살이 그리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 냉소의 끝에 묘한 여지를 남긴다. "때로는 견과류가 당기지만, 때로는 그렇지 않다"는 그의 말처럼, 우리에겐 가끔 그 형편없는 '불량식품' 같은 문학이 필요한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진흙탕의 미학: 악취가 알려주는 향기의 소중함
조 퀴넌의 비유처럼, 진흙탕을 봐야 햇살이 사라진 지 오래라는 것을 깨닫는 법이다. 이 문장은 문학의 생태계에서 '나쁜 소설'이 수행하는 생태학적 지위를 정확히 짚어낸다. 만약 세상에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 마르셀 프루스트만 존재했다면 우리는 아마 문학적 당뇨병에 걸려 고사했을지도 모른다. 모든 문장이 찬란하고 모든 통찰이 심오하다면, 독자는 그 무게에 짓눌려 책장을 넘길 근육조차 잃어버릴 것이다.
나쁜 책은 우리에게 '휴식'과 '대조'를 제공한다. 형편없는 문장과 조악한 구성, 뻔한 신파로 점철된 베스트셀러를 읽으며 우리는 비로소 위대한 고전들이 왜 위대한지를 몸소 체험한다. 얄팍한 감정의 과잉을 목격할 때, 우리는 《보바리 부인》의 차가운 문체 속에 숨겨진 절제된 비극을 그리워하게 된다. 진흙탕에 발을 담가봐야 비로소 신발 밑창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걷는 포장도로의 안락함을 절감하는 법이다.
옥수수밭의 엠마 보바리와 원형이 거세된 모험
퀴넌의 비유는 신랄하면서도 절묘하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향한 그의 공격은 단순한 취향의 문제를 넘어선다. 그것은 원형의 미학을 대중적 감상주의로 희석한 '열화 판본(하위 호환)'에 대한 비판이다. 플로베르가 엠마 보바리를 통해 인간의 헛된 욕망과 환멸을 현미경처럼 해부했다면, 로버트 제임스 월러는 그 날카로운 메스를 내려놓고 대신 달콤한 시럽을 뿌린 셈이다. 이는 본질은 거세된 채 껍데기만 남은 서사의 전형이다.
마찬가지로 《트로이의 부적》에서 오디세우스를 제거했다는 비판은, 현대 대중 문학이 처한 거대한 상실을 의미한다. 신화적 고난과 인간적 고뇌가 빠진 자리에 화려한 액션과 말초적인 자극만이 들어찰 때, 책은 영혼의 양식이 아닌 일회용 껌으로 전락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하위 호환들은 우리 안에 잠들어 있던 고전에 대한 갈증을 깨운다. 조악한 뉴트 깅리치의 대체 역사 소설을 읽다가 문득 필립 로스의 정교한 상상력이 그리워지는 순간, 나쁜 책은 제 소임을 다한 것이다. 그것은 독자를 다시 '진짜'의 세계로 등 떠미는 거친 가이드다.
문학적 견과류와 불량식품 사이의 줄타기
우리는 늘 헤르만 헤세의 구도적 자세로 책을 읽을 수 없다. 뇌를 쉬게 하고 싶고, 아무런 지적 긴장 없이 페이지가 넘어가는 소모적인 텍스트에 몸을 맡기고 싶어 할 때가 있다. 나쁜 책은 문학계의 '불량식품'이다. 몸에 좋지 않고 영양가도 없지만, 그 자극적인 맛은 때로 고고한 평론가들조차 유혹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먹고 있는지 자각하는 데 있다. 불량식품을 미슐랭 3스타 요리라고 착각하는 순간 비극은 시작된다. 퀴넌이 경고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다. 형편없는 책이 존재한다는 사실보다, 그 형편없음을 '탁월함'으로 오인하는 대중적 시선이 문학의 토양을 황폐화한다. "나쁜 책은 정말 나쁜 책이다"라는 그의 시각을 버리지 않는 태도는, 문학의 품격을 지키려는 마지막 보루인 셈이다.
멸종 위기의 독자들을 위한 위안
우리는 이제 책을 읽지 않는 시대, 아니 '책을 읽는 시늉'만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SNS의 짧은 문장과 영상 릴스가 텍스트를 대체하는 환경에서, 조 퀴넌이 명명한 '멸종 직전의 지구인'들은 여전히 종이 위에 박힌 글자를 더듬는다. 이들에게 나쁜 책을 식별해내는 안목은 일종의 생존 기술이다.
나쁜 책을 읽으며 투덜대고, 저자의 무능함을 비웃으며, 책장을 덮고 고전의 첫 페이지를 다시 펼치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숭고한 의식이다. 진흙탕 속에서 햇살의 부재를 한탄하는 그 마음이야말로, 아직 우리가 문학적 감수성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다.
결국 좋은 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나쁜 책들이 무수히 쏟아낸 오답 노트를 비웃으며 정답을 보여주는 텍스트가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오답 사이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대체 불가능한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조 퀴넌의 독설은 차갑지만, 그 이면에는 문학에 대한 지독한 짝사랑이 숨어 있다. 정말 나쁜 책을 향해 가차 없는 매질을 가할 수 있는 사람은, 그만큼 좋은 책이 주는 황홀경을 온몸으로 기억하는 사람뿐이다. 그러니 오늘 밤, 책상 위에 놓인 형편없는 소설 한 권에 실망할 필요는 없다. 그 책 덕분에 당신은 내일 아침, 서가 구석에 먼지 쌓인 고전의 가치를 전율하듯 다시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의 태양은 언제나 진흙탕 너머에서, 우리가 고개를 돌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