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행간에서 마주친 나의 밤샘과 당신의 오해
흔들리는 몸과 곧추세운 시선, 그 평원 위를 걷다
나는 걸으며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데, 몸을 움직이는 그 분주한 물리적 리듬 속에서 오히려 찰나의 집중력은 단연 최고조에 달하곤 한다. 발바닥이 지면에 닿을 때마다 몸으로 전해지는 미세한 진폭을 상쇄하기 위해 시선을 흔들리지 않게 곧추세우다 보면, 어느덧 내가 언제 책을 펼쳤는가 싶게 차원을 이동하듯 텍스트의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몰입의 상태에 진입하고 나면 산책을 겸하려던 처음의 가벼운 생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나는 오직 문장과 나만이 존재하는 길 위의 탐험가가 된다.
지금 내 손에 쥔 책은 카렌 블릭센의 《아웃 오브 아프리카》다. 그녀가 써 내려간 아프리카의 풍경 뒤로, 불쑥 오래전 극장에 걸렸던 동명의 영화와 그 시절의 내가 겹쳐 흐르기 시작한다. 기억이란 이처럼 예기치 못한 순간에 문장과 문장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현재의 보행을 방해하곤 한다.
그녀가 커피 농장을 운영하며 사랑했던 은공(Ngong) 산의 푸른 능선과, 광활한 사바나를 가득 채웠던 사자들의 포효 소리. 문장은 나를 서울의 보도 위에서 단숨에 케냐의 평원으로 데려다 놓는다. 나는 카렌이 사랑했던 그 대지를 딛듯,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발을 내딛는다. 시선은 종이 위에 고정되어 있으나 의식은 무한히 확장되는 이 기묘한 독서의 순간이야말로 내가 길 위에서 얻는 가장 값진 전리품이다. 오래전 그날, 나는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하고 있었고, 우리는 이 영화를 보기 위해 나란히 극장에 앉아 있었다.
Ngong 산의 저녁 노을과 오해의 계절
당시 내 곁에 있던 사람은 이 영화가 비록 누군가에겐 지루할지 모르지만 예술적 미감이 대단히 훌륭한 작품이니 부디 조는 일이 없길 바란다며 며칠 전부터 신신당부를 했었다. 그녀에게 그 영화는 단순한 영상물이 아니라 자신의 미학적 취향을 내게 확인받고 공유하고 싶어 하는 간절한 초대장과 같았다. 스크린 속에 카렌의 연인, 데니스 해튼(Denys Finch Hatton)의 경비행기가 은공 산의 석양을 등지고 날아오를 때, 그녀의 눈은 반짝였지만, 나는 영화 중반부터 쏟아지는 졸음을 끝내 물리치지 못한 채 자꾸만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내가 그토록 무력하게 잠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그녀에게 끝내 말하지 못한, 혹은 말하지 않기로 선택한 밤샘의 노고가 숨어 있었다. 사실 나는 그녀가 내게 맡겼던 영어 번역 작업을 마무리하기 위해 전날 밤을 거의 하얗게 지새운 터였다. 낯선 단어들과 씨름하며 그녀의 언어를 우리말로 옮기느라 몸은 이미 한계를 넘어서 있었다. 사랑하는 이의 짐을 덜어주고 싶다는 순수한 열망이 나를 밤샘의 책상 앞에 묶어두었던 것이다. 카렌이 농장의 파산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지새웠던 수많은 밤처럼, 나 또한 우리의 계절을 지키기 위해 밤을 지새웠었다.
그렇다고 사내대장부라는 알량한 자존심은 그 노고를 변명의 사유로 떠벌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네 일을 해주느라 잠을 못 잤다"는 고백은 사랑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생색처럼 느껴졌고, 나는 차라리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무심한 사내가 되는 길을 택하며 그 오해를 묵묵히 감내했다. 그녀가 내게 던졌던 싸늘한 시선 뒤로 내가 감추었던 진심은 그렇게 발화되지 못한 채 내면의 동굴 속에 갇혀버렸다.
지금 돌아보면 그 작은 오해를 풀지 못해 가슴 졸이던 시간들이 왜 그리도 길게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당시의 나는 너무나 큰 일인가 싶어 막막한 시간을 헤쳐 나가며 그녀의 마음을 되돌리려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 시절의 어긋남은 세상이 무너지는 균열처럼 거대해 보였고, 나는 그 균열 사이를 메우기 위해 이름 모를 불안 속을 헤매야 했다. 카렌이 데니스를 비행기 사고로 잃고 아프리카를 떠나야 했을 때 느꼈던 그 광막한 상실감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내게도 그 시절은 내 전부를 잃을 것만 같은 두려움의 시간이었다.
카렌 블릭센이 아프리카를 떠나며 그곳에서의 삶을 영원히 가슴에 새기고 기록으로 남겼듯, 나 또한 이 책을 통해 그 시절의 나를 기록한다. 사람은 떠나고 관계의 연대기는 종지부를 찍었어도, 그 시절의 진심은 물길 바닥에 가라앉은 조약돌처럼 선명한 빛을 잃지 않는다. 그녀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은 기록하는 순간 내 것이 되었다"고 말했듯, 나는 오늘 이 책의 행간마다 묻어있는 지나간 나의 진심을 마주하며, 그것들을 다시 내 것으로 만든다.
다시 먼 산을 바라보며 걷는 법, "나는 아프리카에 농장이 있었다"
결국 나는 걷던 발걸음을 멈추고 책장을 덮는다. 문장을 읽으려 할 때마다 그날의 습도와 그녀의 서운했던 눈빛, 그리고 끝내 삼켰던 밤샘의 노고가 활자 위로 은하수처럼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첫 문장, "나는 아프리카에 농장이 있었다(I had a farm in Africa)"라는 서술형 과거형의 문장을 마주할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아릿하게 저려온다. 나 또한 "나는 한 사람을 사랑했었다"라는 과거형의 문장으로 내 첫사랑을 정의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
책을 가슴팍에 품은 채 시선을 높이 들어 저 멀리 보이는 산의 능선을 하냥 바라본다. 사랑은 흘러갔으나 그 흔적은 지층처럼 겹겹이 쌓여 지금의 나라는 풍경을 만들었고, 흐르는 세월은 날 선 아픔을 무디게 만들었지만 가끔 예기치 못한 책 한 권이 잠잠하던 기억의 수면 위로 돌을 던진다. 그 파동은 잔잔하면서도 깊어서,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산을 바라보며 마음의 진폭이 가라앉기를 기다린다.
이제는 전할 길 없는 그날의 번역 원고처럼, 내 마음의 잔상들도 저 능선 너머 노을 속으로 조용히 흩어지길 바란다. 카렌 블릭센이 덴마크로 돌아가 그 광활했던 아프리카를 추억하며 위대한 소설가가 되었듯, 나 또한 읽다 만 이 책을 품고 다시 나만의 길을 가야 함을 안다. 완독하지 못한 책이 때로는 완독한 책보다 더 긴 여운을 남기듯,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또한 삶의 갈피마다 소중한 표식으로 남는다.
나는 다시 나만의 속도로, 흔들리면서도 꼿꼿하게 길을 나선다. 발밑의 보도는 다시 견고해지고, 시선은 다시 정면의 풍경을 향한다. 읽다 만 책을 가방에 넣고 다시 걷기 시작하는 나의 뒷모습 위로, 어느덧 낮게 내려앉은 오후의 햇살이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보행은 계속될 것이고, 언젠가 이 책을 다시 펼칠 때쯤이면 오늘의 이 아련함 또한 카렌의 문장처럼 더 깊고 너그러운 지혜로 변해 있을 것임을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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